소설리스트

내 눈에 탑스타-84화 (84/186)

084    8. 과도기

남일은 투자 문제가 풀렸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온 엔터테인먼트에서 투자한다고 해도 가온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 콘텐츠 하나를 제작하는 데에는 그만큼 큰돈이 들었다. 그래도 감독을 잘 잡아놓아서 그런지 문제가 풀리자마자 이곳저곳에서 투자하겠다며 나섰다.

“오늘 회장님과 만나기로 하셨다면서요.”

“그래.”

남일은 이 만남을 강우형이 주도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무래도 이게 오늘의 만남과 연관된 것 같다. 남일은 자신을 낮게 보는 강우형의 눈빛을 떠올리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이 무너지는 걸 이 눈으로 보고야 말 것이다.

‘그래도 투자 문제가 풀리니까 기분은 좋네.’

한 단계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 남일은 지나가며 인사하는 수한까지 예뻐 보여서 놀랐다. 그만큼 남일은 들뜬 상태였다.

“퇴근 전에 다음 보고 사항을 올려 두겠습니다.”

“그래. 고생 많았어.”

성민이 나가고 나자 남일은 책상 서랍에 보관되어 있는 유지아 작가의 대본을 한 번 더 보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유지아 작가의 대본은 손댈 것 하나 없이 완벽했다.

수한이 왜 투자를 제안했는지 이해가 될 정도의 미친 대본이 나왔다. 사소한 건 현장에서 촬영하면서 바뀔 수 있지만, 그전에 대본만 봐도 재미있다. 대본을 보기만 해도 다음 내용이 궁금하고, 다음 화가 기대되었다. 오랜만에 사업가가 아니라 일반 대중이 된 기분이었다.

이 작품은 무조건 성공한다. 남일은 확신했다.

남일은 약속 시각에 맞춰서 고급 한식당으로 향하였다. 만남을 연결해 준 회장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안 나갔을 자리였다. 오늘도 강우형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대표님.”

남일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이미 ‘로맨스 연대기’의 바뀐 대본을 봤기 때문에 웃음이 안 나오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그런 남일을 보는 강우형이 어딘가 이상했다.

‘응? 뭐지?’

남일을 향해 웃고는 있는데 이상하게 그 웃음이 비웃음으로 보였다. 단번에 남일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웃음이라 남일은 강한 의문을 가지며 마찬가지로 비웃음을 입에 머금었다. 설마 그 대본으로 승리한다는 확신을 가진 건가 싶어서 우스운 마음이 들었다.

술자리는 남일이 자리에 앉으면서 시작되었다. 비싼 한정식이라 그런지 하나같이 입에 맞았다. 그래서 남일은 회장과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 대체로 돈은 회장이 썼다.

남일은 시종일관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는 강우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강우형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회장의 비위를 맞추다가 마침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남일을 봤다.

“서 대표님, 직원 관리 좀 잘 하셔야겠습니다.”

갑작스러운 화제에 남일은 당황하며 회장을 보았다. 회장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궁금해 죽겠다는 듯이 앞에 있는 술을 단번에 삼키며 강우형을 봤다. 강우형은 그런 두 사람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얼마 전에 김수한이라는 직원이 우리 회사에 찾아온 게 아닙니까.”

설마 이런 데서 ‘김수한’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올 줄 몰랐기에 남일은 깜짝 놀랐다. 회사 말단 직원이 무슨 일로 엘 엔터테인먼트까지 찾아갔단 말인가?

그와 별개로 강우형은 남일이 거래 내용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왔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게 실제로 밝혀지자 이보다 한심한 대표가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강우형은 대강 내용을 말해 주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그 직원에게 들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그것참 당돌한 친구군.”

“그렇죠? 저도 그 당돌함이 마음에 들어서 그 친구한테 우리 회사에 오면 어떻겠냐고 물었는데 경험이 없어서 생각 좀 해 보겠다고 합니다.”

일부러 말을 흘리는 강우형을 알면서도 남일은 걷잡을 수 없이 분노했다. 분명히 이 일에서 빠지라고 했는데 수한이 이런 식으로 끼어들어 모욕감을 줄 줄은 몰랐다. 특히나 남일은 자신을 한심하게 보는 강우형의 시선을 견딜 수 없었다.

“저는 당연히 서 대표님이 아는 줄 알고 거래를 한 건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능글맞은 저 미소가 이토록 얄미워 보일 줄은 몰랐다. 남일은 그때부터 술을 연신 들이켰다. 수한이 남일의 단점으로 뽑은 감정적인 그의 태도가 이 자리에서 나타났다. 강한 분노가 술로 들어가 그의 내면을 꽉꽉 채워 주었다.

당연히 그런 남일을 보는 강우형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남일이 어떤 식으로 수한을 회사에서 쫓아낼지 보기만 하면 되었다. 강우형은 갑작스레 달아진 술맛에 천천히 그 맛을 음미하였다.

***

“수한아.”

수한은 갑작스레 불린 제 이름에 고개를 돌렸다. 평소 성을 붙여서 말하는 사람이 친근하게 성을 떼고 이름을 부르니 느낌이 이상했다. 그런데 막상 성민을 보니 더 이상한 건 그의 표정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대표님이 아신 것 같아.”

“네?”

“유지아 작가와 네가 연락하고 있던 거 말이야.”

수한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민을 따라 대표실에 가니 안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노 조절 장애라도 있는 건지 안을 박살 낼 기세여서 수한은 정색하며 대표실 문을 노려봤다.

“어제 혹시 누구 만났습니까?”

“엘 엔터 대표 이사와 만났다고 하더군. 그자가 말한 것 같아.”

수한은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어쩐지 얌전히 뒤로 물러나 준다고 했더니 이러려고 그랬던 모양이다. 이런 식으로 수한의 뒤통수를 치기 위한 수작이었다.

‘이직을 권한 것도 미끼였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수한을 보는 강우형의 눈빛은 호감 그 자체였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하나다. 제 것이 아니면 파괴하는 타입 말이다.

‘이게 무슨 로맨스 소설도 아니고.’

그런 인물은 콘텐츠를 통해 접하는 게 좋았지, 실제로 접하는 건 좋지 않았다. 수한은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는 성민을 보며 마음의 각오를 다졌다. 어차피 이런 미움받을 거 각오하고 한 일이니 후회는 없었다.

“들어와.”

분노가 섞인 목소리에 문을 여니 생각한 것보다 안이 더 엉망이었다. 수한은 두려움보다는 여기를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 막막함이 먼저 들었다. 수한은 바닥에 깔린 유리 조각을 의식하며 걸어갔다. 마침내 마주한 남일은 조금 전에 분노를 없애고 무미건조한 얼굴로 두 사람을 봤다.

“너흰 대체 날 뭐로 보는 거야.”

“죄송합니다. 제가 보고를 해야 했는데 한시가 급해서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성민이 재빠르게 수한을 보호하자 남일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 웃음이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라는 걸 알아서 무거운 침묵이 돌았다. 성민은 눈치를 보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일은 잘 해결되지 않았습니까.”

“그래?”

괜히 말을 꺼냈다. 그 말로 인해 남일의 눈빛에서 강한 분노가 느껴졌다.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기분이라 성민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성민. 내가 그동안 오냐오냐했더니 이제는 날 대표로 보지도 않나 봐?”

“아닙니다. 대표님.”

“정 그렇게 원하는 대로 하고 싶으면 나가서 네 회사를 따로 차리든가.”

남일은 어느새 성민의 앞으로 다가와 성민의 이마를 검지로 밀어냈다.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행동이었지만, 성민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밀어내는 족족 버텼다. 물론 성민의 자존심도 그 밀어냄과 함께 뚝뚝 떨어졌다.

그 현장을 보고 있던 수한은 잘못한 일이기는 했지만, 이 정도 일인가 싶었다. 강우형이 남일의 자존심을 제대로 건드린 게 보였다. 수한이 생각했던 것과 정반대로 일이 돌아갔다.

‘이래서 그 사람이 엘 엔터테인먼트 대표 이사구나. 수 싸움은 그 사람이 한 수 위네.’

그 가운데 이제 화살은 수한에게로 돌아갔다. 아니, 본래 화살은 수한을 향한 거였다.

“김수한, 언제까지 제멋대로 할 생각이지?”

“죄송합니다.”

이럴 때는 고개를 바짝 숙이고 죄송하다는 말만 해야 한다. 수한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자꾸만 울컥하는 감정을 다잡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성민에게 하듯이 수한에게 그런다면 수한은 참지 못할 것 같았다.

“내가 이 일에서 빠지랬지?”

“죄송합니다.”

“하는 일마다 잘되니까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아나 봐? 그렇지?”

수한의 자존심을 톡톡 건드리는 말이었지만, 수한은 그저 묵묵하게 그 말을 들었다. 그때 성민이 끼어들었다.

“대표님. 이 일은 수한이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작가가 수한이의 도움이 필요하다는데 저희로서는 맞춰 주는 수밖에…….”

“이성민, 누가 여기에 끼어도 좋다고 했지? 그리고 우리가 언제부터 저쪽에 맞춰 줬나?”

성민의 말을 막는 남일을 보며 수한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남의 말은 죽어도 안 들으려고 하는 그의 태도에서 벌써 수한은 질려 버렸다. 마치 더블에스 엔터테인먼트에 있던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물론 답답한 건 그 회사에 있을 때가 더 컸다. 그곳에는 성민과 같은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곳은 남의 공을 빼앗아 먹을 궁리만 하는 하이에나들이 모인 곳이었다.

남일의 태도에 욱한 건 성민도 마찬가지였는지 결국 인내심이 터져 버렸다.

“하지만 이게 그렇게 잘못한 일이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칭찬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성민, 너 미쳤냐?”

“저 안 미쳤습니다. 해야 할 말을 하는 것뿐입니다.”

이 정도면 남일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데 그럴 틈이 없었다. 오히려 반기를 들며 따지는 성민에 더 큰 분노를 보였다.

‘차라리 엘 엔터테인먼트의 고인 물이랑 싸우는 게 낫나?’

아주 잠깐 든 생각이었다. 그러나 끝까지 자신을 보호해 주려는 성민의 모습에서 수한은 크게 감동했다. 이번 분노는 이전과 차원이 다른데도 성민은 끝까지 수한을 보호했다. 덕분에 남일도 금세 지쳐 버렸다. 누군가와 싸우기에는 그도 나이를 어느 정도 먹은 편이었다.

“성민이 네가 그 정도로 저놈을 비호할 줄은 몰랐군.”

공과 사가 구분이 없어진 경계에 성민은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수한은 역시 가족은 되어야 저렇게 대표와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래, 좋아. 이번 일은 넘어가지.”

“대표님, 감사합니다!”

태세 전환이 빨라도 너무 빠르다. 수한은 어이없다는 듯이 보는 남일 때문에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달려들 기세가 아니었던가.

“근데 그냥 넘길 생각은 없어.”

“네?”

성민의 당황한 목소리와 함께 수한을 보는 남일의 눈빛은 사나웠다. 애초에 성민과 이런 식으로 다툼을 하게 된 게 수한 때문이라 그러한 태도는 당연했다.

“김수한, 강우형한테 들었어.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이직을 거절했다고?”

“이직이요?”

“그래. 강우형 대표 이사가 김수한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더군.”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기에 성민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수한은 굳이 그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기에 일부러 하지 않았다.

“경험 좋지. 내가 너무 많은 일을 줘서 정작 제대로 매니저 일은 못 하고 있다는 거 잘 알아. 그런 의미에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거지.”

수한은 설마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애써 그 생각을 부정했다. 그러나 그 부정한 생각을 남일이 다시 끌어 올렸다.

“로드 매니저 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그동안 해 온 일은 다른 담당자를 세울 테니까 그리 알아.”

“대표님!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왜? 넘어가 주라며. 네 말대로 하겠다는데 왜 큰 소리야. 그리고 소원한테는 다른 매니저를 붙일 예정이니 그렇게 알고 있어.”

“그건 계약 위반입니다.”

성민이 말리기 위해 말을 붙였으나, 그런 건 남일의 귀에는 전혀 안 들어오는 듯싶었다. 처음에 소원을 동정했던 기획사 대표는 이 자리에 없었다.

“정 싫으면 나가라고 해야지. 원하면 계약 해지해 줄 테니 알아서 하라고 해.”

수한은 이를 악물었다. 일을 이런 식으로 할 일인가 싶었지만, 남일은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해 보였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에 냉정함을 보이니까 어이가 없었다.

남일은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을 밖으로 쫓아냈다. 두 사람에게 화풀이를 제대로 했기에 안에선 더는 깨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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