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 탑스타-83화 (83/186)

083   8. 과도기

누가 대형 기획사의 대표 이사가 아니랄까 봐 강우형은 음성 파일을 다 듣고도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빛이 바뀌었다. 풋내기를 보는 듯한 오만한 시선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궁금한 흥미를 느끼는 시선이다.

수한은 갈증이 났지만, 물을 마시는 순간 틈을 보이는 거라 생각하여 침착하게 용건을 꺼냈다.

“투자처를 막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랬죠.”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면서도 일부러 수한의 입에서 나오게 하려고 강우형은 그 이상은 꺼내지 않았다. 어차피 수한의 입으로 꺼낼 생각이었기에 수한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걸 풀어 주십시오. 그게 거래 조건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강우형이 피식 웃었다. 강자의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가운데에서도 강우형의 눈빛이 수한을 압박하였다.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다. 수한은 지지 않으려고 주먹을 쥐며 저절로 모이려는 두 손을 의지로 버텨냈다.

“그전에 이 파일의 주인공들을 알아야겠습니다.”

다 알면서도 묻는 걸 보면 강우형은 신중한 성격이었다. 아니면 다른 걸 노리는 걸지도 몰라 수한은 잠시 머리를 굴려 보려다가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최민희 작가와 유지아 작가입니다.”

“그럼 이걸 내준 사람은 유지아 작가겠군요.”

수한은 그저 강우형을 보기만 했다. 무언이 답이라 생각했는지 강우형은 쓴웃음을 보였다. 최민희 작가가 통제가 안 된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그도 몰랐다. 그러면서도 흥미롭다는 듯이 수한을 봤다.

‘이 친구가 우리 회사에 온다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수한은 쭉 훑어 오는 시선에 그 의도를 파악하고 말했다.

“여기는 제 면접 장소가 아닙니다.”

“실례했습니다. 좋습니다. 어차피 막는다 해도 오래갈 거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쪽 세계의 갑(甲)은 방송국으로 보이지만, 정확히는 돈이었다. 돈이 되느냐, 안 되느냐가 가장 중요하였다. ‘로맨스는 없었다’가 돈이 된다고 판단되면 엘 엔터테인먼트가 막아도 결국은 풀어지게 되어 있다. 물론 기를 쓰고 막으면 몇 년은 막아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막으면 호기심만 일어난다.

‘게다가 상대는 표절당한 작품.’

어떤 식으로든 말 나오기 좋은 상황이다. 강우형은 이런 식으로 거래를 생각해 낸 수한을 기특하게 보았다.

“우리가 풀어 준다고 하면 그 파일을 모두 넘겨주는 겁니까?”

“당연히 그래야죠.”

“만약 이 파일이 노출될 경우 발생하는 피해까지도 거래에 명시해야겠군요.”

“그렇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유지아 작가와도 합의된 내용이었다. 지금 당장은 드라마 제작이 중요하니까. 어차피 작품이 성공하면 지금의 한까지도 모두 풀어낼 좋은 기회가 생긴다. 유지아 작가는 그 시기를 노리기로 했다.

“좋습니다. 그러면 거래를 합시다. 변호사를 불러올 테니 서로 합의한 내용에 사인합시다.”

수한은 단번에 거래를 하자고 할 줄 몰랐기 때문에 살짝 당황했다. 이리저리 재면서 간을 볼 거라 생각해서 더욱 긴장하고 왔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라서 살짝 마음이 들떴지만, 수한은 애써 기쁜 마음을 숨겼다.

얼마 안 가 엘 엔터테인먼트를 담당한 변호사가 들어오고 변호사가 보는 앞에서 서로 합의한 내용에 사인했다. 이런 서류에 함부로 사인하면 안 된다고 하지만, 수한은 혹시 몰라 성민의 허락 아래 다른 변호사에게 자문받고 온 상태였다.

“이걸로 우리의 거래도 끝났습니다. 파일은 약속대로 다 넘겨주십시오.”

“네. 약속한 거니까 지켜야죠.”

우선은 가지고 온 파일을 지웠다. 나머지 파일은 회사에 돌아가는 즉시 지울 생각이었다. 물론 유지아 작가가 가진 원본 파일은 엘 엔터테인먼트가 약속을 지킨 후에 지우게 할 거였다.

‘나중에 다른 일로 말썽이 일어났을 때 약점으로 삼으면 좋을 파일이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건 신뢰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독립할 가능성을 수한은 놓치지 않았다. 수한은 엘 엔터테인먼트에서 약속을 지키는 즉시 파일을 지우기로 하며 미소를 지었다. 일이 잘 풀렸으니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수한이 강우형을 보자 그 역시도 미소를 지었다. 수한은 그 미소에 의문이 생겼다. 이 상황은 엘 엔터테인먼트로서는 좋은 상황이 아니다. 그런데 웃다니 이상했다. 아니, 그것만 이상한 게 아니다.

‘왜 내게 호감을 품지?’

의문에 찬 상태로 수한이 강우형을 보니 그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김수한 씨, 엘 엔터테인먼트는 어떻습니까?”

무슨 의미로 물어보는지 모를 정도로 수한은 순진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한은 잠시 순진한 척을 하기로 했다.

“회사 건물을 말하는 거면 되게 좋네요.”

살짝 실망하는 표정에 수한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이상하게 반감이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기라는 인재를 알아봐 줘서 조금 기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충성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말이다.

“기획사를 말하는 거면 좋은 회사입니다.”

비록 나중에는 고인 물이 터져서 썩게 되지만, 현재는 그 단계가 아니었다. 고인 물이 더 고이고 있는 그런 상태였지. 수한은 그 생각을 속으로 삼키며 호감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럼 직장으로는 어떻습니까?”

이렇게 돌직구로 물어볼 줄 몰랐기에 수한은 또 한 번 놀랐다. 사람이 겉으로 보는 것보다 제법 야성적이다.

‘신기하네.’

이 업계에서 지내다 보면 다양한 인간상을 만날 수 있다. 수한은 남일과 비슷할 거라 생각했던 강우형에 관한 이미지를 지웠다. 이 사람은 자기가 인재라 생각하면 그 사람이 전에 무슨 일을 했든 상관없이 다 제 품으로 데려오는 타입이다.

‘실장님에게 듣기로는 이현우의 사촌이라고 했던 사람이 이 사람의 친척이라고 하던데.’

SSS급 슈퍼스타로 서로에게 안 좋은 감정이 있는데도 수한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걸 봐서는 쉽게 감정에 휘둘려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남일과 강우형을 두고 누가 리더감이냐고 묻는다면 수한은 주저 없이 강우형을 택할 것이다. 그래서 수한은 의문이 들었다.

‘이런 사람이 있는데 왜 망하는 거지?’

저 사람한테도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이상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대답을 기다리는 강우형이 보였다. 수한이 순진한 척을 한 건 이 대답을 하기 위해서였다.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이직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상하게 일복이 많아서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거든요.”

“그럼 지금부터 생각하십시오.”

“네?”

역시 야성적이었다. 기다리면서 상대를 잘근잘근 씹는 여유로움이 강우형에게서 보이지 않았다. 틈이 보이면 바로 삼켜 버린다. 그게 강우형의 스타일이었다.

수한은 수화기를 드는 강우형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불러와도 제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얼마 안 가 문이 열렸다. 서류 봉투를 들고 오는 한 남자가 보였다. 정장 차림에다가 익숙하게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아서는 강우형의 비서 중 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게 아니어도 강우형의 수족은 틀림이 없었다.

남자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쭉 이직 조건을 말하였다. 마치 이 순간을 준비해 왔던 것처럼 막힘이 없어서 수한은 자신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나를 이 정도로 탐낸다고?’

연봉 2배부터 시작해서 집까지 구해 준단다. 조건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만약 수한이 엘 엔터테인먼트의 미래를 몰랐다면 자신만의 기획사고 뭐고, 생각하지 않고 이직을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미래가 안 보이는 회사에 가서 굳이 고생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엘 엔터테인먼트에 가면 고인 물과 싸워야 하는데 여기는 서남일 대표만 상대하면 되니까 훨씬 나은 상황이지.’

강우형이 수한을 밀어준다고 해도 성민만큼 밀어줄까 싶었다. 성민은 그야말로 꿈의 상사였다. 현실에서 절대 만날 수 없는 상사다. 그 사실을 수한이 가장 잘 알기에 수한의 결정에 성민이 힘이 되어 주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아직 일을 배우는 처지라서요. 그래서 제안은 감사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이런 조건인데도 거절을 하겠다고요?”

강우형은 진심으로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사실인데 어떻게 하겠는가? 게다가 저 좋은 조건이 너무 수상하게 느껴졌다. 수한이 아무리 능력자라고 한들 결국은 매니저였다.

‘내 눈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닌데 저런 조건이라고?’

수한은 저 조건 안에 다른 게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소를 지으면서 다시 정중하게 사양하였다.

“그런 제안을 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나중에 제가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인 후에 다시 제안해 주시면 고민해 보겠습니다.”

일부러 입에 발린 말은 하지 않았다. 수한이 거래한 내용이 담긴 서류 봉투를 챙기자 강우형이 할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수한을 향한 호감을 놓지 않았다.

“좋습니다. 나중이라는 기회를 다른 사람에게 쉽게 주지는 않지만, 김수한 씨에게는 줄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수한은 일부러 뒤돌지 않고 앞만 보고 걸어 나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 탄 후에야 숨을 편하게 내쉬었다. 긴장하고 오긴 했지만, 역시나 쉬운 상대가 아니다.

수한은 엘 엔터테인먼트 건물에서 나와 건물을 다시 한번 보았다. 그러다 보니 자기가 놓친 기회를 되새기면서도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졌다.

‘나중에 나도 저런 건물 하나 세워 봐야지.’

꿈은 크게 가지라고 했다. 수한은 언젠가 자신도 저런 건물을 세우리라 다짐했다.

***

“내가 너무 과했던가?”

“네. 너무 과했습니다.”

수한이 가고 난 방에는 싸한 한기가 돌았다. 강우형은 수한을 실제로 보게 되니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원하는 인재상에 부합했다. 어떻게 이럴까 싶을 정도로 쏙 마음에 들어 자신도 모르게 몰아붙이며 이직을 권유했다. 그래서 후회했다.

“이런 건 내 스타일이 아닌데.”

강우형의 앞에 있는 남자는 이번에도 할 말이 많았지만,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했다. 강우형은 원래 그런 스타일로 일한다. 그래서 빠른 속도로 승진하여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되었다. 그 부작용으로 강우형에게 반발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일단은 회장이 신임하고 있으니 그들도 현재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저런 인물을 서남일은 싫어한다고?”

“네, 그렇습니다.”

강우형은 남일이 정말로 이해가 안 갔다. 물론 남일에 관한 소문은 이 업계에 깔려 있어 그 사정을 강우형도 알고 있기는 했다. 그래서 더 기가 막혔다. 사소한 감정에 얽혀서 일 잘하는 직원을 멀리하는 게 딱 소인배가 아닌가?

“그런 됨됨이로 이 업계에서 살아남아 있는 게 신기하군. 그러니까 고작 중소 기획사 대표겠지.”

“그래도 요즘 성장세를 보면 가볍게 볼 곳은 아닙니다.”

남자의 말에 강우형은 피식 웃으며 조금 전에 있었던 수한을 떠올렸다. 알고 있어서 수한을 욕심내는 거다.

요즘 급상승세로 치고 올라가는 스타의 뒤에는 수한이 있다. 만약 이 상태가 계속 유지된다면 강우형뿐만이 아니라 다른 대형 기획사도 수한을 탐낼 것이다. 강우형은 그 전에 미리 침을 발라놓기로 했다.

‘김수한은 내 방법을 끔찍이도 싫어할 테지만…….’

그렇다고 그런 인재가 남일의 밑에 계속 남아 있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스스로 나오기 싫다면 나오게 하는 것도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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