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 탑스타-82화 (82/186)

082  8. 과도기

사진 몇 장이 널찍한 책상 위에 떨어졌다. 사진에서는 딱히 건질 것이 없었다. 강우형은 따로 올라온 보고서를 읽었다. 김수한을 얼마나 상세히 조사한 건지 그가 대학로 극단에 있었다는 정보까지 강우형의 손에 들어왔다.

‘지망생들이 이런 식으로 빠지는 경우가 있긴 한데 독특하네.’

그렇다고 해도 매니저를 하기에는 얼굴이 조금 아까웠다. 하지만 연예인을 할 정도로 잘생긴 편도 아니라서 강우형은 딱히 그의 얼굴에 미련을 가지지 않았다. 엘 엔터테인먼트에 있는 연습실만 가더라도 잘생긴 놈들이 수두룩하니까.

엘 엔터테인먼트는 몇 년에 한 번씩 신인 그룹을 내는 체제였다. 데뷔한 그룹을 다 탑 아이돌로 만들어야 하기에 잘생긴 놈만 가지고는 부족함이 많았다. 그래서 얼굴이 못나더라도 노래가 되는 놈 하나 정도는 있어야 했다. 물론 그게 끝이 아니었다. 춤에다가 예능감까지 있어야 탑 아이돌이 될 수 있어 엘 엔터테인먼트의 데뷔 조에 대한 기준은 높은 편이었다.

누군가는 아이돌을 굉장히 무시하지만, 그들이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수많은 기준을 통과해야 했다. 그런 점에서 수한은 얼굴에서부터 탈락이었다. 물론 강우형이 김수한에게 기대하는 건 연예인으로서의 자질이 아니라 매니저이기 때문에 그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보고서를 다 읽어 본 결과 성품도 괜찮고, 추진력도 좋았다. 어떤 점에서는 건방진 점도 있지만, 그건 강우형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였다.

“가온 내에서는 어떻지?”

“평판이 좋습니다. 하는 것마다 성공해서 미다스의 손이라고도 불린다고 합니다.”

강우형은 수한이 이룬 성과를 보고 피식 웃었다. 확실히 신입하기에는 힘든 일들이었다. 강우형은 동시에 엘 엔터테인먼트에 있는 비슷한 연차의 직원들을 떠올렸다.

“우리는 왜 이런 사람이 안 나타나는 거지?”

강우형에게 보고를 올린 남자는 할 말이 많았지만, 트집 잡히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수한이 그리 할 수 있던 것에는 가온이라는 중소 기획사의 특성이 발휘되어서였다. 이성민 실장이라는 든든한 지원자도 있으니까. 그런 의미로 만약 수한이 엘 엔터테인먼트에서 비슷한 일을 시도했으면 시도하기도 전에 억눌려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거다. 남자는 그리 확신했다.

“그러나 서남일 대표는 이자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고 합니다.”

굴러온 복덩이를 알아서 떠미는 꼴이었다. 강우형은 돌아가는 상황이 재미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정작 ‘로맨스 연대기’의 상황은 재미있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계획대로 해야지. 기사는 못 내더라도 업계 사람들한테는 알릴 수 있는 거잖아.”

“네. 그렇죠.”

일부러 표절 논란을 일으켜서 ‘로맨스는 없었다’에 들어갈 투자처를 없애는 게 강우형의 계획이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생각이지만, 그래서 더 파괴력이 높았다. 대형 기획사라는 이점을 제대로 살려 시작도 전에 철저히 박살 낸다.

“김수한에 관한 조사는 이만 끝낼까요?”

“아니, 그 친구의 약점을 가져오질 않았잖아.”

“약점이라면……?”

“돈 문제가 있다든가 그런 거 말이야.”

남자는 강우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까 스카우트 제안을 하고 싶다는 거였다. 과연 이런 식으로 뒷조사를 한 사실을 알고도 엘 엔터테인먼트에 오고 싶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남자가 걱정할 게 아니었다.

남자가 나가고 나자 강우형은 심각한 얼굴로 최민희 작가의 새로 나온 대본을 읽었다. 회장님께서 관심을 보이니 어떻게서든 좋은 성과를 내긴 해야 했다.

‘그런데 내 기분 탓인가?’

전보다 대본의 질이 나빠진 것 같다. 그러나 철저하게 대중에게 맞춰 다시 쓰게 한 대본이었다. 강우형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일단은 이대로 계속 쓰게 하기로 했다. 강우형은 은근히 최민희 작가가 통제가 안 되어서 짜증도 났다.

‘표절 작가 주제에 뭐 그렇게 불만이 많은 거야?’

정 안 되면 작가를 갈아 치우면 되니 강우형은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일단 지금의 적은 가온 엔터테인먼트였다.

***

“미치겠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그 목소리가 꽤 큰지라 성민의 목소리를 사무실에 있는 모두가 들었다. 또 무언가 일이 잘 안 풀리는 게 틀림이 없어서 다들 성민의 눈치를 봤다. 그와 별개로 수한은 예진이 준 홍삼을 쭉 마시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비싼 홍삼은 다르네.’

소름 끼치게 맛없다. 그래서 더 건강해진다는 걸 체감하였다. 수한은 젊은 나이인데도 급격하게 체력이 떨어지는 건 역시 이 직장이 힘들어서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운동을 꾸준히 해야 하는데 일이 너무 많네.’

약에 의존하기에는 20대 중반이라는 나이는 너무 젊었다. 수한은 이제는 틈을 내서라도 운동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그러면서도 약은 꾸준히 챙겨 먹을 생각이었다. 수한은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홍삼을 다 털어 먹었다.

성민은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홍삼을 먹는 수한을 발견하고는 빠르게 다가왔다.

“그거 맛있냐?”

“아니요. 더럽게 맛없습니다.”

하나만 먹자는 얼굴에 수한은 할 수 없이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 홍삼을 준 게 예진이라는 사실을 알아서 저렇게 빼앗아 먹는 거다.

“예진이 너무하네. 나도 잘해 줬는데.”

“예진 씨는 그렇게 생각 안 하나 보죠.”

수한이 장난스럽게 말해도 성민의 관심은 홍삼에 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성민은 홍삼을 뱉을 뻔했다. 이럴 줄 알고 수한도 순순히 홍삼을 건네준 거였다.

“으-악! 무슨 맛이 이래!”

“건강에 좋은 건 원래 그런 맛입니다.”

수한이 능청스럽게 말하자 성민이 질렸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손에 쥔 건 다 먹는 게 성민은 자신의 건강을 엄청 잘 챙겼다.

“그래서 무슨 일입니까?”

“엘 엔터에서 나서기 시작한 거지.”

“투자처를 다 틀어막았나요?”

“그래. 아니, 그래 봤자 연예 기획사인데 왜 자기들이 몸을 사리느냐고.”

이미 유지아 작가의 대본도 업계에 돌았기 때문에 얼마나 재미있을지 알면서도 몸을 사리는 투자처에 성민은 짜증이 났다. 이럴 줄 알고 수한이 가온에 투자를 제안한 거였지만, 막상 그게 현실이 되니까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일단은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야죠. 어차피 작품이 잘 나온 걸 알 테니 얼마 안 가 투자할 겁니다.”

지금으로써는 이런 말밖에 할 수 없어서 현실이 참 서글펐다.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하겠는가? 성민의 한숨 소리에 수한의 마음도 함께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인생은 늘 이런 식이다. 쉽게 나아가는 것 같으면서도 결정적일 때 발목을 붙잡고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만든다.

“뭐, 최대한 붙잡고 설득해 봐야지.”

“네.”

수한은 유지아 작가에게서 온 새로운 대본이 잘 나와서 미소를 짓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여전히 최민희 작가가 연락하고 있을까? 그 순간, 재미있는 생각이 났다.

수한은 아직 주변을 벗어나지 않은 성민을 향해 말했다.

“실장님, 방법이 한 가지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

“방법?”

수한은 혹시 몰라서 전에 녹음해 둔 파일을 성민에게 들려 주었다. 성민은 듣자마자 눈이 커지더니 수한과 비슷한 미소를 지었다. 상대가 악랄하게 구는데 이쪽에서 못할 건 또 어디 있겠는가? 물론 이건 애피타이저였다. 메인은 유지아 작가에게 있으니 말이다.

개인적으로 수한은 눈에 눈, 이에는 이. 함무라비 법전을 좋아했다.

“근데 누굴 만나서 이걸 들려 주려고?”

“가장 높은 사람을 만나야죠. 우리 대표님도 꼼짝 못 할 사람.”

수한의 머릿속에 강우형 대표 이사가 떠오르면서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원하지 않지만, 남일의 자존심을 좀 챙겨 줘야겠다.

***

수한은 유지아 작가에서 파일을 받아 고르고, 골랐다. 어째서인지 시간이 갈수록 최민희 작가의 막말하는 수위가 올라갔다. 수한은 저절로 알 수밖에 없어졌다.

‘자기 스트레스를 유지아 작가한테 푸는 거네.’

어지간히 위에서 압박을 주는지 갈수록 심해지는 발언에 수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수한이 파일이 필요한 이유를 말해 주니 유지아 작가는 담담하게 전화를 받아 녹음했다. 어떻게 보면 엘 엔터테인먼트라는 거대한 물고기를 잡기 위한 낚시라고 볼 수 있겠다.

‘이 정도면 충분하네.’

이재성 PD만 악마의 편집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수한도 할 줄 알았다. SSS급 슈퍼스타를 통해 얼마나 열심히 배우게 된 건지 수한은 완성본을 듣고 입을 쩍 벌리는 성민을 지켜봤다.

“완전 쓰레기네?”

“그렇죠?”

그러나 수한은 이재성 PD와는 또 달랐다. 안 한 일을 한 것처럼 만들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심하게 한 말들만 엮어서 만들었으니 최민희 작가도 억울할 수는 없었다. 결국, 자기가 다 한 말이니까.

“이 정도면 되겠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혼자 가도 괜찮겠어?”

“오히려 실장님과 함께 가면 거기서 더 경계하겠죠.”

수한 자신도 놀랄 정도로 담력이 세진 상태였다. 솔직히 말해 수한이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갑(甲)은 수한이니 말이다. 특별한 을(乙)이 있을지언정 대체로의 을(乙)은 갑(甲)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막상 엘 엔터테인먼트 건물 앞에 서게 되니 긴장은 되었다. 수한은 원본은 따로 둔 채로 복사본을 들고 왔다. TV나 드라마에서 볼 법한 멍청한 짓은 수한이 할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강우형 대표 이사님을 뵈러 왔습니다.”

“사전에 약속한 게 있으신가요?”

“아니요. 근데 제가 만나자고 하면 만날 겁니다.”

추측뿐이지만, 수한을 감시하는 것 같으니 말이다. 수한의 예상과 다르지 않게 연락을 취하니 올라오라는 말이 들려왔다. 수한은 직원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 뒤 무사히 출입문을 통과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역시 돈이 좋긴 좋네.’

신사옥을 지었다고 듣긴 했는데 신축 건물의 티가 확 났다. 드라마에서만 봤던 회사 건물이 이랬다. 수한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높은 층에서 내렸다. 더 위로 가면 회장실이므로 더는 가서는 안 됐다.

‘우리 대표님과 다르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비서들이 보였다. 수한이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자 그들은 자연스럽게 안으로 수한을 안내했다. 수한은 큰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할 말을 잃었다.

‘이건 거의 우리 사무실보다 더 크네.’

그 가운데 소파에 앉아 수한을 기다리는 강우형이 보였다. 앉아 있기만 해도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위압감이 확 들었다. 시선만으로도 상대를 압도하는 힘이 있다. 남일에게도 카리스마가 있지만, 강우형에 비하면 부족한 점이 많았다.

나이는 남일보다 젊어 보였으나, 그가 가진 욕망은 남일을 뛰어넘었다. 남일이 상대하기에는 벅차 보이는 상대였다. 그러나 남일의 앞에서도 당당했던 수한이다.

수한은 기죽지 않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가온 엔터테인먼트의 김수한입니다.”

“반가워요. 강우형입니다.”

강우형이 굳이 자신의 직책을 말하기에는 책상 위에 보란 듯이 명패가 있었다. 수한은 명패를 스치듯이 봤으나, 그 시선을 봤기에 강우형은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원래는 이런 식으로 방문하는 거 받지 않지만, 김수한 씨에 대해 제가 관심이 있어서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덕분에 쉽게 만나게 되었으니까요.”

수한은 흥미롭다는 듯이 보는 강우형을 향해 핸드폰을 불쑥 내밀었다. 강우형의 얼굴에 생긴 의문은 곧 수한이 트는 음성 파일로 인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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