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 탑스타-81화 (81/186)

081   8. 과도기

뜻하지 않은 호재였다. 수한은 대본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어쩌다 이렇게 대본이 망가지게 된 건지 궁금했다. 수한은 얼마 안 가 원인을 분석해 냈다.

‘매력이 싹 사라졌네.’

어려운 말은 싹 사라지고, 쉬운 말로 대체되었다. 그것까지는 괜찮은데 대사까지 유치해져서 노리는 시청자층이 궁금해졌다. 물론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에는 이게 맞긴 하지만, 수한은 그래서 바뀐 것 같지 않다고 추측하였다.

‘아마도 첫 연기라서 그렇겠지.’

시은에게서 여자 주인공을 빼앗은 그 여자 아이돌 하나 말이다. 수한이 기억하는 미래에서 하나는 연기 활동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런 식으로 싹 망가진 대본을 들고 연기하다가 말아먹은 게 틀림없었다.

수한은 싹 뜯어고쳐진 대본을 보고 여유를 가졌다. 유지아 작가에게 당장에라도 이 소식을 알려 주고 싶어 손가락이 다 간지러웠다.

‘하지만 이런 걸 알려 주면 금방 의욕이 빠질 테니까.’

제대로 싸우기도 전에 상대가 쓰러지는 것만큼 힘 빠지는 게 없었다. 수한은 안 그래도 유지아 작가의 집필 속도에 감탄 중이었다. 이대로라면 드라마 촬영도 전에 완결 고가 나올 것 같다. 역시 말하는 건 최대한 미루는 게 나을 것 같다.

수한은 혹시 몰라 유지영에게 따로 연락했다. 그의 판단이 옳은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수한이 생각한 것을 유지영이 생각 못 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신경 써 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기분이 좋았다.

‘이제 고주혁 씨 일만 해결되면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일 것 같은데.’

하필 또 스토커 문제라서 이게 어떻게 해결될지 짐작이 안 갔다. 수한은 여전히 고주혁에게 보내지는 선물을 보며 더 열심히 선물을 확인하기로 했다. 해를 끼칠 물건이 고주혁에게 절대로 가면 안 되니까.

***

“자! 다들 일어납시다!”

일부러 시간을 빼서 만든 시간이라서 퇴근 시간에 맞춰 다 같이 일어났다. 다행히 드라마 촬영에 들어간 다른 매니저들도 후반부에는 참석할 수 있다고 하니 다들 가벼운 마음으로 겉옷을 챙겨 들었다.

“회식을 송별회로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는 사람끼리 조촐한 시간을 가지려고 했지만, 성민이 일을 키웠다. 그동안 함께한 시간이 있으니 축복하며 보내고 싶다고 말하였다.

“실장님, 혹시 교회 다녀?”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그쪽 사람으로 안 보이는데요.”

종교인 특유의 선함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모습이었다. 수한의 말을 성민이 들었는지 고개를 휙 돌리며 눈에 힘을 주었다.

“김수한! 너 내 험담했지?”

“네, 했습니다.”

“이제는 대놓고 했다고 하네?”

성민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면서 즐거운 분위기로 회식 장소에 매니저들을 데리고 갔다. 이번 회식 장소로 정해진 곳은 지난번에 갔던 한우 전문점과 다르게 저렴하면서도 많이 먹을 수 있는 삼겹살집이었다. 수한이 집게를 잡자 성민이 뿌듯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저번에 얘랑 고깃집에 갔었는데 고기를 기가 막히게 잘 굽더라고.”

“와, 실장님 너무하시네요. 저희는요?”

“나도 가고 싶어서 간 거 아니거든?”

“저와 한 내기에서 져서 사 주신 겁니다.”

“심지어 사 주셨대.”

성민은 괜한 말을 했다고 수한에게 눈치를 줬지만, 수한이 기가 막히게 구운 삼겹살을 앞에 내놓자 얼른 집어 먹었다. 그야말로 굽기의 달인이었다.

수한이 그다음으로 동현을 챙기자 다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으면서 소주를 따랐다.

“가서 힘들면 바로 돌아오십시오.”

“회사가 무슨 학원인 줄 알아?”

성민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지만, 수한은 그의 얼굴을 보고 왠지 받아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 이 업계는 늘 일손이 부족하므로 일 잘하는 사람이 돌아온다면 대환영이었다. 물론 명훈처럼 좋지 않게 나가는 경우는 제외였다.

수한은 반쯤 진심으로 말한 거지만, 누구도 그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사자인 동현도 농담으로 받아들였으니 말 다 했다.

“월급 더 올려 주시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건 내 권한이 아니야.”

이럴 때는 딱 잘라 말하는 성민이 얄미워서 수한이 다 구운 고기를 재원에게 넘기니 성민이 허탈한 웃음을 날렸다.

“검은 머리는 거두는 게 아니라는데 널 보면 딱 그래.”

“그렇습니까?”

“그러면서 실장님이 가장 예뻐하는 게 김수한이잖아요.”

“일을 잘하니까 그렇지.”

그러면서도 한쪽 눈을 찡긋하는 게 정말 입맛을 떨어지게 했다. 수한은 잘 구워진 고기를 입에 넣으며 담백하면서도 고소한 맛을 즐겼다. 삼겹살을 먹으면 먹을수록 소주가 더 당기는 건지 서서히 채워지는 빈 병에 수한은 남은 삼겹살을 모조리 판 위에 구웠다.

‘다들 많이 취했네.’

적어도 수한보다 술이 센 사람이 한 명쯤은 있을 줄 알았는데 안타깝게도 없었다. 아니다. 동현 혼자 살아남았다. 그나마 이 중에서 술자리에 가장 많이 가는 사람이 동현이었다.

“선배님, 가신다니 아쉽습니다.”

“나도 그래. 막상 간다고 하니 되게 아쉽네.”

동료 매니저들을 보는 동현의 얼굴에는 어딘가 미련이 있어 보였다. 수한도 더블에스에서 나올 때 비슷한 감정을 느꼈기에 공감했다. 그래도 그때는 명훈과 함께 나오는 거라서 세상 거칠 게 없었다.

“여전히 네 생각은 비슷해?”

“더블에스요?”

“그래. 결과적으로 따지자면 내가 네 말을 무시한 게 되었으니까.”

“선배님께서 결정한 건데 제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스스로 돌이킨다면 돌이킬 수 있겠지만, 동현에게선 흔들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사람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선배님이라면 잘하실 거라 믿습니다.”

“사실 말이야. 내가 이 회사를 떠나는 데에는 이유가 있어.”

“네?”

수한은 어느새 주변을 살피는 동현을 발견했다. 다들 술에 취해서 비몽사몽 한 상태여도 여기서 말하기에는 조심스러움이 있었다. 수한은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여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집에 가셔야죠. 내일 일정 있으신 분 있지 않습니까?”

일정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이는지 대부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에 모조리 다 데려가기에는 사무실은 좁았다. 다 같이 고생할 거 아니면 택시를 태워서 보내는 게 나았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수한은 마지막으로 성민까지 택시에 태워 보낸 뒤 아직 남아있는 동현을 봤다. 확실히 술이 세긴 센지 얼굴은 붉은데 눈빛은 맑았다.

“우리끼리 2차 가지요.”

“좋아.”

구석에 있어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술집으로 들어갔다. 조용한 분위기가 흘러서 대화하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수한은 술은 더는 마시고 싶지 않기에 물을 마시며 앞에 놓인 어묵탕을 보았다.

“그래서 회사를 떠나는 이유가 뭡니까?”

“대표님 말이야. 그분이 널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

“네. 안타깝게도 말이에요.”

남일만 아니라면 회사가 커 갈 때 함께 있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솔직히 자신만의 기획사를 만들어 키우는 건 매니저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흔히 꿈꿀 내용이었다. 그러나 수한도 기획사를 차려 보니 알게 되었다.

‘사실 안정감은 월급쟁이가 최고지.’

초기에 들어가는 자본금을 포함해서 돈이 끝도 없이 많이 드는 게 이 세계였다. 수한은 쓴 현실에 앞에 놓인 물을 마셨다.

“아마 그분은 네가 아무리 잘해도 널 인정해 주지 않을 거야.”

“선배님 눈에도 그렇게 보입니까?”

수한이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대답하자 이번에는 동현이 놀랐다. 수한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이 그걸 모르면 바보라고 생각했다.

“근데 왜 그렇게 열심히 해?”

“대표님이 제 능력을 인정해 주는 건 아무 상관없습니다. 제가 인정을 받고 싶은 건 저를 아는 사람들이니까요.”

수한은 조금 더 크게 시야를 보고 있었다. 그걸 동현도 깨달았는지 골 때린다는 듯이 수한을 봤다. 이런 또라이는 그도 처음 봤기에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나중에 기획사 차리면 나한테도 연락해라.”

“연락하면 오시겠습니까?”

“조건 보고 생각해 볼게. 물론 제대로 기획사 꼴을 갖추고 연락해야 한다.”

“당연하죠. 저도 아는 사람들을 데려오려면 그리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네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을 줄 몰랐네.”

이번에는 동현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작 1년 차에 해 놓은 성과가 대단했기 때문에 인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수한은 모르지만, 매니저들 사이에서 수한에 관한 말은 자주 나왔다.

처음에는 무모하다는 말이 나왔고, 그다음에는 운이 좋다는 말이 나왔다. 지금은 무조건 될 놈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어 수한에 대한 신뢰도는 상당히 높았다.

“원래 사람은 꿈을 크게 가지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 젊으니까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라.”

그리 말하는 동현도 젊은 편이지만, 원래 당사자가 되면 잘 체감하지 못한다. 물론 수한은 미래에서 온 사람이기 때문에 체감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대표님은 절 왜 싫어하는 걸까요?”

“예전에 대표님과 싸웠던 사람과 닮아서겠지. 사람 좋은 척하지만, 몇몇은 그런 식으로 회사에 쫓겨났어.”

“대표님과 싸운 사람이요?”

“우리는 라이벌이라고 부르지만, 대표님은 그 표현 자체도 싫어하셔. 굳이 따지면 최명훈과 너와 같은 관계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수한이 이해가 확 되는 말에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어쩐지 최명훈과 장단이 잘 맞는다고 했더니 그런 이유였다. 수한은 생각보다 하찮은 이유에 어이가 없었다. 아니지, 원래 인간은 사소한 것 하나로도 일을 망치는 재주가 있다. 남일이 그 과였다.

“그래서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었어. 사고로 죽었다는데 누군가 사고로 위장한 건 아니냐는 그런 말도 있지.”

“혹시 그 죽음에 대표님이 관련되어 있나요?”

“대표님이 그런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 당시에 두 사람 관계가 더 안 좋았다고 하더군. 어쩌면 그 소문 때문에 더 싫어할 수도 있겠네. 그 사람이 죽은 뒤로 일이 잘 풀리기 시작했거든. 대표님은 그게 너무 분한 거지. 그 사람이 사라져서 성공한 거로 보일 테니까.”

수한은 아무리 그래도 남일이 사람 죽일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하는 짓을 보면 딱 그 행보라서 알아서 오해를 만들고 다니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원래는 이 회사에서 너무 힘쓰지 말라고 조언을 해 주려고 했는데 의미가 없네.”

“아니요. 선배님 덕분에 제 계획이 더 확고해졌으니 오히려 감사합니다. 그런 의미로 저도 한 가지 조언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거기 있는 사람들 말이 잘 안 통할 겁니다. 벽창호를 인간으로 만들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하지만 벽창호도 돈에는 약하거든요. 얼마나 이익을 볼지 말하면서 대화를 시작한다면 조금은 먹힐 겁니다.”

수한이 경험한 바였다. 동현은 생각보다 진지하게 그 말을 듣고는 조언 고맙다고 하면서 2차 계산을 했다. 1차 계산은 성민의 카드로 했기에 수한은 다음 날 성민이 얼마나 절망하며 원망할까 기대했다.

“그럼 기획사 잘 차려 놓고 선배님께 연락하겠습니다.”

수한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자 동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날 동료 하나가 험난한 길로 떠나갔다. 다행히 인수인계를 잘 하고 떠나서 일정이 꼬이거나 일이 더 힘들어지지는 않았으나, 들려오는 소식은 수한의 예상대로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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