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 탑스타-79화 (79/186)

079   8. 과도기

화보 촬영하는 내내 순돌이는 말을 잘 들었다. ‘댕댕이를 부탁해’를 찍을 때도 느꼈지만, 순돌이는 순한 성격의 강아지였다. 그래서 예진이 순돌이를 키우기로 마음먹은 건지도 모르겠다. 다만 옷 갈아입히는 건 여전히 힘들어서 수한의 도움이 필요했다.

“순돌이가 매니저님을 잘 따르네요.”

“네.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이미 TV를 통해 얼굴을 내비친 적이 있어서 그런지 수한을 대하는 스태프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물론 수한이 워낙 주변 사람들에게 잘하기도 했다. 순돌이가 사람들에게 귀염받는 동안 예진은 옷을 갈아입었다.

강아지와 함께 하는 컨셉이라 오늘의 화보는 멋있기보다는 친근한 이미지였다. 수한은 새삼 예진이 얼마나 말랐는지 깨닫게 되었다.

“목은 안 마르십니까?”

“물 좀 줄래?”

“네, 잠시만요.”

수한이 물병에 빨대를 꽂아서 주자 예진이 입술에 묻은 립스틱이 지워지지 않게 조심스레 먹었다. 그 표정이 어딘가 귀여워서 수한이 웃고 있자 예진이 수한을 노려봤다. 그 전에 표정 관리를 했지만, 이미 다 본 후였다.

“너도 화장해 봐. 이렇게 하게 될걸?”

“저는 안 하겠습니다. 그리고 귀여워서 웃은 거니까 너무 뭐라 하지 마십시오.”

남자 연예인이면 모를까 일반인인데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나중에는 남자들도 관리하는 시대가 오지만, 수한은 먼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 예진은 조금 전에 말을 더 의식한 건지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누가 뭐래?”

순돌이의 협조 아래 화보 촬영은 금세 끝났다. 예진은 스태프들 먹으라고 남겨 둔 간식을 가리키며 말했다.

“난 잠시 옷 갈아입고 올 테니까 넌 저거 먹고 있어.”

“네! 매니저님! 와서 드세요!”

“그러면 먹으면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수한은 순돌이가 음식을 함부로 먹지 않게 주의하며 핫도그 하나를 잡아서 먹었다. 평범한 맛인데도 현장에서 먹으니까 맛있다. 수한은 더 먹으라는 말에 거절했다. 스태프들이 이런 식으로 식사를 때운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수한은 쓰레기까지 완벽하게 처리한 후에 재원에게 문자를 넣었다.

[선배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일정은 무사히 마쳤습니다.]

[고맙다. 나중에 밥 한 끼 살게.]

다 같이 힘든 일 하는 처지에 못 도와줄 일이 없었다. 수한은 순돌이와 놀아 주다가 문득 동현이 떠올랐다. 낌새가 심상치 않았던 거로 봐서 이직하는 건 확정이었다.

‘더블에스는 안 갔으면 좋겠는데.’

왠지 느낌이 안 좋았다. 그렇다고 수한에게 말릴 권한은 없으므로 만약 그리 결정한다면 잘되기를 바라기로 했다. 물론 재원이었으면 뜯어말렸을 테지만 말이다.

‘이럴 때 보면 나도 참 이기적이네.’

수한에게는 일정 선이 있으나, 그 선이 참 불명확했다. 누군가 수한을 보면 하얀 사람이라 보겠지만, 누군가는 속이 까만 사람이라 볼 것이다.

수한 자신은 자기를 회색 인간이라 생각했다. 이 업계에서 일하는 이상 완전히 선한 사람이 될 수는 없으니까. 결국, 연예인이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 수한은 그 이치를 잘 이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가자.”

옷 갈아입으면서 화장까지 지운 건지 민얼굴이 보였다. 물론 많이 봐서 수한은 놀라지 않았다. 어차피 예진은 민얼굴도 예쁘니까.

“간식은 많이 먹었어?”

“그럼요.”

수한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예진이 한결 풀어진 얼굴로 순돌이를 끌어안았다. 예진을 이제까지 고양잇과로 봤는데 이리 보면 갯과이기도 했다. 강아지처럼 순하게 보일 때가 가끔 있다. 출발하기 전 수한은 예진이 안전띠를 잘 착용한 것을 확인했다.

“김수한.”

“네, 예진 씨.”

“나도 드라마 들어가고 싶어. 네가 대본 봐 줘.”

“네. 그러면 재원 선배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막장 드라마가 아닌 로맨틱 코미디 장르로 고를 생각이었다. 순간 유지아 작가가 쓴 ‘네잎클로버’가 떠올랐지만, 수한은 고개를 저었다. 그 작품의 여자 주인공은 소원 같은 사람이 해야 한다. 소원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연기력이 뛰어난 사람이 해야 하는데 아직 예진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 작가님은 지금 작품만으로도 벅찬 상태니까.’

수한이 아침 일찍 보낸 조언을 보고 재빠르게 대본을 고쳐 왔다. 수한은 사무실에 가면 다시 그 대본을 읽어야 했다. 그사이에 예진이 힐끔 수한을 보더니 대뜸 말을 건넸다.

“맞아, 저번에 내가 준 홍삼은 다 먹었어?”

“네. 다 먹고 새로 사서 먹고 있습니다.”

“그래?”

은근히 기뻐하는 게 보여서 수한이 웃자 금세 정색을 했다. 조금은 솔직하게 대해도 좋을 텐데 저게 소원이 말하는 예진의 매력이라 하니 수한은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다음에는 홍삼 사지 마.”

“왜요? 사 주시게요?”

“어.”

수한이 놀라서 백미러를 보자 예진이 괜히 헛기침했다. 그래놓고는 하는 변명이 재미있어서 수한은 웃음을 터트렸다.

“재원 오빠가 너무 허약한 것 같아서 겸사겸사 사 주는 거야.”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먹으니까 효과는 있어?”

“네. 체질에 안 맞는 사람도 있다는데 저는 체질에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다행이고.”

수한은 이래서 예진을 좋아했다. 그보다 매번 예진을 만날 때마다 느끼는 건데 기분이 안 좋을 때 만났다고 하기에는 늘 기분이 좋아 보여서 이상했다. 성민이 겁주려고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아서 수한은 미심쩍어하며 예진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

수한은 카페에 수상한 인물 한 사람이 들어오는 걸 발견했다. 나름 모자도 쓰고, 선글라스도 껴서 얼굴 감추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누가 봐도 수상한 사람이라 수한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작가님. 굳이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됩니다.”

“네?”

대본을 읽을 때도 느꼈지만, 유지아 작가는 은근 엉뚱한 면이 있었다. 유지영에게 몰래 도와주는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정말 수상한 복장으로 와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소원도 이렇게까지 안 했기에 수한은 생각이 많아졌다.

‘그러고 보니 네잎클로버에서 이런 비슷한 장면을 본 것 같은데…….’

수한은 유지아 작가의 로망 같은 거였나 의심하게 되었다. 유지아 작가도 사람들이 자꾸 자신을 보는 걸 인식했는지 결국 풀이 죽은 얼굴로 선글라스를 내렸다.

“모자도 벗을까요?”

“아니요. 지금으로도 충분합니다.”

수한의 단호한 대답에 유지아 작가의 어깨가 내려갔다. 이 사람은 천재이긴 한데 남의 눈치를 너무 보는 나쁜 버릇이 있다. 물론 최고 나쁜 버릇은 그걸 견디지 못해 도망치는 거였다.

“대본은 잘 봤습니다.”

“어떤가요?”

긴장한 기색이 잔뜩 보여서 수한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 이번 대본은 더욱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감정선을 정리해 달라고 했더니 아예 감정이 확 사라졌다.

“작가님, 저는 개인적으로 로맨스는 판타지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그런가요?”

“네. 실제 감정이 그렇든 아니든 우리는 상관이 없습니다. 시청자가 설레어하면 그만이니까요.”

수한이 한 생각은 아니고, 예전에 어떤 배우에게 들은 말이었다. 자기의 일은 그 판타지를 채워 주는 거라고 말했다. 그건 로맨스도 마찬가지고, 다른 장르도 마찬가지라 했다.

“다시 고쳐 올게요.”

“저, 근데 최민희 작가로부터는 더는 연락이 없습니까?”

수한은 묘하게 굳은 유지아 작가를 발견했다. 설마 했는데 또 몰래 연락하고 있나 보다. 그 사람 인성 자체가 좋은 쪽이 아니니 이럴 줄 알았다.

“그래서 뭐라고 답하셨습니까?”

“아무 대답도 안 했어요.”

“잘하셨습니다. 하지만 혹시 나중에 어떻게 쓰일지 모르니 증거로 남겨 두세요.”

“네. 안 그래도 언니도 그 말을 해서 그러고 있었어요.”

유지아 작가 같은 소심한 성격의 사람에게 유지영처럼 똑 부러진 언니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물론 그 이유로 수한이 유지아 작가와 여전히 일하는 거지만 말이다.

“그리고 제 말은 절대적인 건 아니니 굳이 제가 하라는 대로 안 하셔도 됩니다.”

“아니에요. 좋은 참고가 되고 있어요. 감사해요.”

수한이 아는 천재들은 왜 이렇게 다들 겸손한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오만하게 제멋대로 하는 사람보다는 이런 사람들이 나았다.

찰칵-.

수한은 어디선가 들린 것 같은 카메라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수한이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유지아 작가도 따라서 두리번거렸다. 수한은 케이크를 찍는 여자를 발견하고는 그 소리인가 하고 넘기려고 했다. 그러나…….

찰칵-.

또 한 번의 소리가 들리면서 신경이 예민해졌다. 수한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급하게 카페에서 나가는 한 남자가 있었다. 까만 복장에다가 모자를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급하게 나가는 모습은 누가 봐도 도망치는 거라 수한은 유지아 작가에게 여기에 있으라고 말한 뒤 급하게 달려갔다.

‘누굴 찍은 거지?’

수한은 까만 남자만 보며 달려갔다. 요즘 운동할 시간이 없어서 몸 감각이 둔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느린 속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저쪽은 아예 이런 쪽으로 단련이 되어 있는 건지 너무 빠르게 달려서 쫓아가기도 힘들었다.

이게 영화나 드라마였으면 지나가는 사람의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훔쳐 타서 잡을 텐데 현실은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었다.

“헉헉.”

어디로 간 건지 이제는 옷자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수한은 주먹을 꽉 쥐며 눈에 힘을 주었다. 이렇게 도망치기까지 하는 거라면 작은 일은 아니었다.

‘그 사진이 어떻게 쓰일 수 있는 거지?’

수한으로서는 전혀 상상되지 않았다. 수한은 혼자 카페에 남아있는 유지아 작가를 떠올리고는 서둘러 반대로 돌아갔다. 혹시나 만약에 이게 미끼고 진짜 볼일은 유지아 작가에게 남아 있는 거라면 큰일이었다.

“하하.”

그러나 이 또한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었다. 유지아 작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수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 작가님께 접근한 사람은 없습니까?”

“아니요. 전혀요. 근데 그 사람은 누구예요?”

“그러게요. 저도 묻고 싶네요. 누구인지.”

지난번에 고주혁이 말했던 게 살짝 스쳐 지나갔지만, 수한은 설마 했다. 엘 엔터테인먼트 같은 대형 기획사에서 중소 기획사의 일개 사원에게 관심을 가진다고? 말이 되지 않았다.

수한이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자고 하자 유지아 작가는 어울리지 않는 선글라스를 다시 썼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원래 천재들은 이렇게 독특한 면을 가지고 있나 싶었다. 그러나 소원과 지훈은 이런 특이한 면을 가지지는 않았다.

‘잠깐만…….’

수한이 정색하며 유지아 작가를 보자 유지아 작가가 무슨 일이냐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랬다. 일개 사원인 수한은 몰라도 유지아 작가에게는 관심을 둘 수는 있는 일이었다.

‘무슨 속셈이지?’

무슨 여론 몰이를 하려고 준비 중인지 수한은 매우 궁금해졌다. 물론 수한은 그대로 당해 줄 생각이 전혀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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