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 8. 과도기
수한은 부스 안에 있는 고주혁의 신난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음악이 다 준비되었으니 녹음해서 결과만 좋게 내면 됐다.
고주혁은 타고난 가수였다. 굳이 직접 작곡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만든 곡을 온전히 자기의 것으로 소화했다. 그중에는 소원이 작곡가 에이치로 작곡한 것도 있기에 오늘은 소원이 수한을 핑계로 현장에 놀러 왔다.
“슈퍼스타 때도 느꼈는데 직접 보니까 정말 대단하네요.”
“네. 고주혁 씨는 가수로서 대단한 재능을 가졌습니다.”
기회가 있으면 그 기회를 잡고 높이 날아오를 사람이 고주혁이었다. 고주혁은 수한이 없어도 알아서 슈퍼스타가 될 사람이었다. 물론 수한이 맡은 연예인 중에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수한은 이미 고주혁의 팬이 되었다.
“물 좀 마실게요.”
“네. 그럼 잠시만 쉬겠습니다!”
계속되는 녹음에 목이 아플 만했다. 수한은 새삼 소원에게 관심을 전혀 보이지 않는 고주혁을 신기해했다. 수한이 힐끔 소원을 보자 소원도 은근히 서운해하는 것 같았다. 처음 인사할 때는 나쁘지 않았는데 그 이후로 고주혁은 이런 식으로 소원을 계속 본 척, 만 척하였다.
수한은 괜히 소원의 눈치를 보면서 다시 부스 안으로 들어가는 고주혁을 봤다.
“소원 씨, 그래도 녹음하는 건 마음에 들죠?”
“당연히 마음에 들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가도 소원의 얼굴을 보면 굉장히 섭섭해하는 게 보였다. 소원은 시간을 확인한 후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이제 가 봐야겠어요. 덕분에 잘 구경하고 가요.”
“집까지 데려다주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제가 어린애인가요. 혼자 가도 괜찮아요.”
수한의 눈에는 어리게만 보였지만, 소원의 내면은 성숙했다. 어떤 면에서는 소원이 가장 어른스럽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녀는 이미 어른이지만 말이다.
“그럼 들어가 보세요.”
소원이 가고 나서도 녹음실은 바쁘게 돌아갔다. 녹음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녹음하는 때도 있고 그랬다. 기계의 힘이 있지만, 어느 정도는 인간의 노력과 능력이 필요했다.
어느새 지친 고주혁이 부스 안에서 다시 나왔을 때는 벌써 밤이었다. 막차 시간도 간당간당한 시간이라 수한이 직접 데려다주기로 했다.
“오늘 세 곡이나 녹음했으니 삼 분의 일은 한 셈이네요.”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수한이 현장에 있는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자 고주혁도 함께 했다. 이런 점을 보면 ‘SSS급 슈퍼스타’를 찍을 때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수한 형, 소원 씨 언제 갔어요?”
“왜요? 본 척, 만 척할 때는 언제고요?”
“그게 쑥스러워서요.”
고주혁이 수줍게 말하자 수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소원을 이성으로 보고 있나 해서였다. 물론 남녀 사이의 일은 삼자가 관여해서는 안 되지만, 이들의 직업이 연예인 이상은 관여를 안 할 수 없었다.
“아니요. 절대 아니에요! 오히려 경쟁자라고요!”
“갑자기 경쟁자요?”
수상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의심의 눈초리는 진해지면 진해졌지 풀어지지는 않았다.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도 수한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고주혁과 소원을 양팔 저울에 올려 둔다면 당연히 소원 쪽으로 저울이 기울어졌다. 소원은 수한의 아픈 손가락이니까. 그런 의미로 수한은 고주혁이 쑥스럽다는 핑계로 소원을 내버려 둬 다행이라 여겼다.
‘설마 소원 씨도 그런 쪽으로 고주혁 씨에게 관심 있는 건 아니겠지?’
“고주혁 씨, 안 됩니다. 소원 씨가 아깝습니다.”
“아니라니까요. 진짜예요. 그러고 보니 형 너무하네요. 저도 형 연예인인데 대하는 게 너무 다르잖아요.”
수한이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이 웃자 고주혁이 크게 좌절했다. 물론 두 사람 다 장난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서로에게 타격이 전혀 없었다. 두 사람은 장난치며 주차장까지 걸어갔다.
“맞아, 형. 저 오랜만에 연습생 같이하던 친구들을 만났는데요. 엘 엔터에 있는 친구들이요. 거기서도 형 소문이 은근히 났나 봐요.”
“소문이요? 안 좋은 소문입니까?”
“아니요. 엘 엔터에서 형을 탐내는 것 같던데. 형을 따로 알아보는 모양이에요. 그러는 거 보면 매니저로 탐내는 거 아니겠어요?”
수한은 처음 듣는 이야기이기에 의아해했다. 역시 연예계라 그런가. 아니 땐 굴뚝에서도 연기가 났다. 아니, 이 경우에는 잘못된 추측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럴 리가요. 오히려 제게 이를 갈면 갈았지, 탐내지는 않을 겁니다.”
“저는 충분히 탐낼 만하다고 생각하는데요. 형이 회사 옮긴다고 하면 저는 따라갈 의사도 있어요.”
“고주혁 씨,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닙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있다. 둘이 있는 것 같지만,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수한은 악마의 편집을 겪었으면서도 그런 말을 하는 고주혁을 단속했다. 고주혁은 그런 수한에게 아무런 불만 없이 웃으면서 차에 올라탔다.
“고주혁 씨, 몸은 잘 만들고 있습니까?”
“네. 형이 근육 만들라고 했잖아요.”
어딘가 바뀐 것 같다고 했더니 몸을 만드는 중이었다. 수한이 흐뭇하게 웃자 고주혁은 울상을 지었다. 운동이 힘든지 답지 않게 칭얼거렸다.
“제가 하고 싶은 건 가수인데 그 외의 것들도 해야 하네요.”
“고주혁 씨가 갈 곳은 저 위니까요. 솔직히 노래만 하고 싶은 건 아니잖아요.”
수한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듯 고주혁이 웃었다. 아직 고주혁이 위로 가려면 한참 멀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네! 모레 봐요!”
수한은 고주혁을 무사히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유지아 작가에게서 온 대본을 핸드폰으로 내려받아서 봤다. 직접 출력하지 않았기에 능력치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수한도 재미있는 것과 없는 것은 구별할 줄 알았다.
‘재미있긴 한데 감정선이 너무 빠른데?’
이러다가 시청자 몰래 사귄다는 이야기를 듣겠다. 물론 장르가 스릴러이다 보니 애정 전선은 보조지만, 그래도 개연성은 있어야 했다.
수한은 읽으면서 생각나는 것들을 우선으로 적어 두고, 사무실로 돌아가자마자 출력부터 했다. 오늘은 수한이 늦게 도착해서인지 사무실이 텅 비어 있다.
‘이제는 사무실이 내 집이네.’
매니저라는 직업 특성상 어쩔 수 없기는 했지만, 수한은 나중에 기획사를 차리면 회사 내에 제 방을 따로 만들기로 했다. 전에 명훈과 만들었을 때는 그러지 못했다. 명훈이 집이 회사가 되는 걸 원치 않는다고 적극적으로 말하고, 설득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런 설득을 들을 이유도 없게 됐지만.’
만든다면 이제 오롯이 홀로 해야 할 일이었다. 수한은 누군가와 동업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굳이 한다면 성민이 떠올랐지만, 성민이 가온 엔터테인먼트에서 나올 가능성은 적었다.
‘역시 방을 만들자. 직원들은 무슨 이런 막장 사장이 다 있냐고 욕하겠지마는…….’
수한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워졌다. 수한은 그대로 간이 침대에 누워서 자려다가 재원에게서 메시지 하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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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한아, 실장님께 말씀드렸는데 내일 예진이 일정에 네가 나 대신 가야겠다.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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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오전에 재원이 아파서 병원에 갔다는 소식을 들은 것 같다. 수한은 성민이 가기 전에 보낸 예진의 일정을 보고 웃었다.
‘화보네. 그것도 순돌이와 함께.’
안 그래도 예진이 ‘댕댕이를 부탁해’에서 하차해서 아쉬워하는 시청자들의 반응이 많았다. 소원의 말로 표현하면 ‘댕댕이를 부탁해’는 예진의 입덕 방송이라고 한다. 워낙 매력이 철철 넘쳐서 그 방송을 보면 예진을 싫어했던 사람도 예진을 좋아하게 된다고 했다.
‘물론 그 말을 예진 씨의 팬인 소원 씨에게 들어서 신뢰성을 잃었지만…….’
수한은 예진에게 또 한 소리 들을 각오하면서도 자기 전에 ‘댕댕이를 부탁해’를 틀었다. 그러면서 꾸벅꾸벅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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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에서는 딱히 말이 없더라.”
“어차피 논란을 일으키면 자기들도 함께 손해를 볼 거라서 그런 걸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괜히 대형 기획사가 아닐 테니 다른 계획이 있을 수도 있고.”
이대로 조용히 있어 준다면 고맙긴 하겠지만,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 건 수한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또 모르지 않는가? 드라마 촬영하고 있을 때 갑자기 표절 사건을 터트려서 엿을 먹일지.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쪽에서 물러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노이즈 마케팅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 말이다.
‘유지아 작가님도 그 정도는 이미 각오해 두었고.’
“재원이한테 연락받았지?”
“네. 예진 씨 일정 알고 있습니다.”
“예진이 요즘 심기 안 좋으니까 조심해.”
어째 만나러 갈 때마다 심기가 안 좋은 것 같다. 그래도 수한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 예진의 까칠함도 요즘에는 그리웠다. 최근에 엮이는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피로감이 어마어마했다.
수한이 시간에 맞춰 예진의 집 앞으로 가자 오늘은 순돌이가 예진의 품에 안겨 있었다. 외출하는 게 좋은지 꼬리 치고 난리가 났다.
“오랜만입니다. 예진 씨.”
“왜 네가 와?”
“네? 재원 선배님이 아파서 대신 온 건데요.”
“그건 아는데 네가 온 게 별로라서.”
수한은 예진의 한결같음에 웃으면서 순돌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순돌이의 몸짓이 만져 달라고 난리였다. 그러나 그런 수한의 손을 예진이 덥석 잡았다. 뜨거운 예진의 성격만큼이나 손도 뜨거웠다.
수한이 놀란 눈으로 예진을 보자 예진이 도리어 화들짝 놀라며 재빠르게 잡은 손을 거뒀다.
“알고 잡은 거 아닙니까?”
“못 만지게 하려고 잡은 거거든?”
그러면서 얼굴이 새빨간 게 어지간히 당황한 게 틀림이 없었다. 그 반응에 수한도 괜히 쑥스러워지면서 예진이 귀엽게 보였다.
“근데 왜 못 만지게 하는 겁니까?”
“너 저번 일 기억 안 나?”
수한이 전혀 모르는 얼굴을 하자 예진의 가방에서 순돌이 옷이 나왔다. 저번부터 입히고 싶다고 벼르던 옷이었다. 수한은 자신이 오는 것을 몰랐던 게 맞나 의심이 들었지만, 그래도 기꺼이 순돌이 옷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예진이 원하는 대로 옷을 입혔다.
“순돌아-.”
왠지 저 뒤에 하트가 붙어야 할 것 같다. 너무 좋아하는 예진의 모습에 수한은 진즉에 해 줄 걸 그랬나 싶었다. 수한이 흐뭇하게 웃으며 예진을 보고 있자 예진의 얼굴에는 붉은 기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오늘 화보 찍을 때도 옷 갈아입혀야 한대.”
“네, 알겠습니다. 일단 타시죠.”
예진이 차에 타자 안에서는 좋은 향이 났다. 예진은 그와 별개로 평소에 타던 차가 아님을 깨닫고 놀랐다.
“그게 차에 이상이 생겨서요. 미리 확인하고 수리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괜찮아.”
예진이 놀란 것은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예진이 좋아하는 향을 기억한다는 사실이었다. 수한에게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지만, 예진에게는 특별하게 다가왔다.
“예진 씨는 작품 활동 안 하십니까?”
“생각 중이야.”
“원하시면 제가 대본 골라 드리겠습니다.”
“자신감이 넘치네? 시은이 대본 네가 골라 준 거라며?”
“네, 그렇습니다.”
재원에게 대충 회사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들었기 때문에 예진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수한을 봤다. 그러면서도 말은 마음과 다르게 나왔다.
“너 대표한테 찍혔다며.”
“그게 예진 씨의 귀에도 들어갔습니까?”
“어.”
수한은 대놓고 짜증 내는 예진의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예진의 시비는 그쪽으로 향했다.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어?”
“제 편이 되어 주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 좋아서요.”
“네가 원하면 대표한테 따져 줄 수도 있어.”
“그러면 따져 주십시오. 예진 씨 위치를 더욱 공고하게 만든 후예요.”
예진은 수한의 말을 깨닫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예인이 기획사 대표에게 갑(甲)이 되려면 방법은 하나다.
더 높게 올라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