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7 7. 진짜와 가짜
남일은 수한을 볼 때마다 신기해했다.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남일의 앞에서 전혀 주눅 들지 않은 모습이 볼 때마다 남일을 울컥하게 했다. 물론 좋은 의미에서가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기를 확 꺾어 주고 싶은데 지금은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그가 기를 꺾을 상대는 수한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성공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가?”
“네, 자신합니다.”
대답하는 수한은 이제까지 실패 한 번 안 해 본 사람의 모습이었다. 보기만 해도 강한 신뢰감을 주었다.
“좋아, 그러면 뜻대로 하지.”
“그 말은…….”
수한의 눈빛이 기대로 빛났다. 그 기대를 본 남일은 뿌듯하게 웃으며 말했다.
“원하는 대로 하라고. 이유 있는 도박이라고 생각해야지.”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성민의 말대로 남일이 자신을 다시 보는 건가 싶었다. 수한은 들뜬 얼굴로 남일을 보며 웃었다. 그러나 남일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대신 자네는 이 단계에서 완전히 빠지게.”
“네? 이 단계에서 완전히 빠지라는 말은?”
“다른 사람이 담당하게 될 거야. 어차피 자네 일도 아니었지 않나?”
그러면 그렇지 온전히 수한의 공을 돌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원하는 대로 하긴 뭘 원하는 대로 한단 말인가? 여기서 원하는 대로 하는 건 남일뿐이었다. 수한은 기대했던 자신을 바보같이 여기며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네. 여기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요.”
“그래. 이런 일은 전문가가 나서야지. 다 자네 위해서 하는 말이야.”
“네, 압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 좋은 얼굴을 해도 수한은 하나도 속지 않았다. 이제는 남일이 어떤 인간인지 정도는 파악이 되었다. 수한은 나가기 전 탐탁지 않아 하는 남일의 찰나를 보고 대표실에서 나왔다.
‘앞으로도 계속 절대 친해질 일이 없겠군.’
그와 별개로 대표실 앞에서는 성민이 수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표님이 뭐래?”
“드라마에 투자하겠다는데요.”
“그래? 좋은 일이네. 아직 불안하긴 하지만. 뭐, 그런 거 생각하면 우리 회사가 아직 상장 회사가 아니어서 다행이네.”
“아무래도 신경 쓸 게 많아서 그렇죠?”
“그치. 결정 하나 내리는데 주주들 눈치가 얼마나 보이는데.”
특히 연예 기획사이기 때문에 연예인 하나로 주식이 올랐다가도 사건 하나가 터지면 쉽게 내려간다. 수익성을 믿고 투자하기에는 불안한 주식이었다.
“그럼 바늘과 얘기 좀 해 봐야겠네.”
“그쪽에서 제작을 맡는다고 합니까?”
“그렇다고 하네. 네가 만나고 온 그 여자가 상당히 능력이 좋은 모양이야.”
그 여자라 하면 유지영을 말하는 거였다. 수한은 이렇게 될 줄 알았지만, 그런 의미로 더 유지영의 능력에 놀랐다. 이 기회에 친해지는 게 좋을 것 같다.
“바늘에 갈 건데 너도 갈래?”
“아니요. 저는 여기까지만 하고 할 일 하라고 하던데요.”
주어를 말하지 않아도 누가 그런 소리를 했는지 알았기에 성민은 수한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여주었다. 그러면서도 별로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 양반은 진짜. 왜 그러는지 몰라.”
“그러게 말입니다. 어쩔 수 없죠. 어차피 고주혁 씨 앨범 준비 때문에 바쁘니 그 일에 집중해야겠습니다.”
소원의 앨범 작업을 하면서 요령이 조금 생기긴 했지만, 고주혁은 콘서트까지 준비하기에 생각해야 할 게 많았다. 물론 다른 부서의 도움을 받아서 수한이 결정한다기보다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뿐이지만, 그 진도 상황을 고주혁에게 알려 주는 것도 수한의 일이었다.
수한은 바쁘게 일하다가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핸드폰 전화를 받았다.
“네, 가온 엔터테인먼트의 김수한입니다.”
[김수한 씨, 저예요.]
목소리를 들어보니 유지영에게서 온 전화였다. 수한은 무슨 일인가 싶어 기다리다가 바늘 엔터테인먼트로 당장 와 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수한은 자리를 비운 성민을 보고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마…….’
수한은 곧장 성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굳이 수한에게 유지영이 직접 전화를 건 게 마음에 걸렸다. 그러자 얼마 안 가 성민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실장님, 저 김수한입니다.”
[그래, 알고 있어.]
어쩐지 성민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수한은 그 안에서 성민이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는 물었다.
“거기서 저보고 따로 회사에 오라고 하는 데 가도 되는 겁니까?”
[뭐? 그런 전화를 했어?]
성민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리면서 수한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역시 유지영이 독단적으로 전화를 한 게 맞았다.
[내가 안 된다고 했는데도 고집을 부리네.]
“설마 제가 꼭 참여해야 한다는 겁니까?”
[그래. 그래서 나도 대표님한테 말해봤는데 안되면 밀어붙이라는 거야. 중간에서 골치만 아파졌어.]
“일단 제가 그쪽으로 가 보겠습니다. 가서 이야기를 듣는 게 낫겠네요.”
한 번 간 적이 있어서 그런지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더불어 지난번과 다르게 바늘 엔터테인먼트 사무실 내 사람들 시선이 나쁘지 않았다. 그때는 모두가 수한을 압박하는 형태여서 부담스러웠는데 지금은 반대로 반가워해서 기분이 살짝 좋아졌다.
지난번에 이야기를 나누었던 작은 회의실 안에 들어가니 성민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와 별개로 유지영은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뭐 마실래요?”
“시원한 물이 마시고 싶네요.”
워낙 급하게 와서 그런지 유난히 몸이 뜨거웠다. 유지영은 그런 수한을 이해한다는 듯이 얼마 안 가 얼음을 띄운 물을 가져왔다. 한 모금 마시니 살 것 같다.
“그래서 저는 왜 부른 겁니까?”
“합의를 봐야 할 것 같아서요.”
“합의요?”
“해야 할 일이 많다고 들었어요.”
수한이 고개를 돌려 성민을 보자 성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짓을 보냈다. 그것과 별개로 수한은 실제로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맞습니다.”
“네, 그건 이해해요. 그런데 김수한 씨가 여기서 완전히 손을 떼는 건 저희 쪽도 곤란해서요.”
“네? 어째서요?”
“유지아 작가요. 이번 일로 인해서 사람 잘 못 믿게 되었어요.”
수한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는 쓰게 웃었다. 그러니까 유지아 작가를 위해서 완전히 손을 떼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였다. 수한이 하던 일을 다른 사람이 하는 건 믿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적어도 유지아 작가는 김수한 씨가 담당해야 할 것 같아요.”
수한은 옆에서 인상을 구기고 있는 성민을 발견했다. 수한은 성민이 얼마나 난처해졌는지 알아채고는 생각에 빠졌다. 남일에게 물었는데도 안 된다고 한 걸 보면 수한을 완전히 배제하고 드라마를 진행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물론 욕심이 안 들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굳이 이 일을 내가 할 필요는 없지.’
그러나 간신히 용기를 낸 유지아 작가를 수한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유지아 작가님은 제가 담당하겠습니다.”
“뭐? 그건…….”
“대신 저는 공식적인 담당이 아닙니다. 저는 보이는 곳에서는 유지아 작가님을 돕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되나요?”
“네. 어차피 드라마를 성공하게 하는 게 목표니까요.”
수한이 성민의 의견을 묻자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포기한 얼굴이 보였다. 수한이 씩 웃자 성민은 곧 침착함을 되찾았다. 처음부터 이렇게 삐걱거리면 나중에는 더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성민은 할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럼 공식적인 담당은 제가 해야겠네요. 어차피 유지아 작가님은 저도 만나 본 적이 있으니까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그걸 원하고 수한을 불렀으면서 입에 발린 말을 하는 유지영을 성민은 못마땅하게 봤다. 그러나 그를 티 내지 않고, 조금 더 제작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나왔다. 성민은 바늘 엔터테인먼트에서 나와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졌다고 여겼을 때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하여튼 간에 저런 고집불통은 처음 봐.”
“그래도 일로 들어가니까 두 분이 잘 맞던데요.”
“그게 잘 맞는 거였으면 너를 불러내지도 않았겠지.”
수한은 성민이 이렇게 치를 떠는 건 처음이라서 웃음이 나왔다. 물론 성민은 그런 수한도 못마땅하게 봤다.
“거기서 네가 하겠다고 하면 어떡해.”
“저도 유지아 작가님이 걱정되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넌 정말 상사 잘 만난 줄 알아.”
“어차피 제 공을 실장님이 다 가져갈 건데 제가 왜 그리 생각해야 합니까?”
수한은 웃으라고 한 말이었지만, 성민은 웃지 못했다. 그야 그 말대로 될 거니까. 성민은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얼굴을 했다.
“나도 대표님이 그렇게 딱 잘라 안 된다고 말할 줄 몰랐어.”
“애초에 절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어 했잖아요.”
“그래도 요즘은 괜찮아진 줄 알았지.”
그러나 오산이었다. 수한은 더블에스와 다른 의미로 이 회사에 장래가 없다고 여겼다. 물론 회사 자체는 크게 클 예정이고, 지금도 커지고 있다. 하지만 수한이 이 회사에서 크게 될 확률은 낮았다.
이번 일만 해도 유지아 작가의 대본을 물고 온 건 수한인데 인정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빼 버리니 말이다.
‘이래서 동현 선배님이 이직을 생각하나 보군.’
더블에스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괜찮은 기획사에서 제안이 들어오면 수한도 고민해 볼 것 같다. 매번 이런 식으로 초를 치는 것에 수한도 지치기 시작했으니까.
“일단 드라마만 생각하자고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넌 꼭 챙겨 줄게.”
“네, 감사합니다.”
그래도 지금은 동료가 좋은 것에 만족도가 올라갔다. 하지만 이게 언제까지 수한을 참게 해 줄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
“그 작가를 데려가다 못해 아예 투자한다고?”
“네, 그렇다고 합니다.”
강우형은 보고를 받자마자 웃음부터 나왔다. 묘하게 삐뚤어진 남일의 눈빛을 거슬려 하던 참이었다. 원래 이런 일은 강우형의 일이 아니지만, 아이돌뿐만이 아니라 콘텐츠 사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회장 때문에 강우형이 일일이 보고를 받았다.
“대본은?”
“아직 얻지 못했습니다만 금방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꼭꼭 숨기려고 해도 이 업계에서는 그럴 수 없다. 돈을 조금만 뿌려도 정보는 쉽게 얻을 수 있다. 물론 가끔 관심이 많이 필요한 사람들이 알아서 유출하기도 하니 대본을 얻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문제는 그 안에 든 것이었다.
“그 정도로 자신이 있다고?”
투자까지 하면서 제작하려는 의지가 보여서 관심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네. 김수한이라는 직원이 이 일을 적극적으로 피력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많이 들려오는 이름이네.”
“네. SSS급 슈퍼스타에서 부딪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강우형도 화가 났다.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이라 생각했는데 다른 곳도 아닌 가온 엔터테인먼트에게 우승을 빼앗겼으니 말이다. 회장과 다르게 강우형은 솔로 가수에게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좋은 기회를 놓쳐서 화났었다.
‘그때 승태가 그자에 관해서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이현우를 담당했던 매니저가 강우형의 친척 동생이었다. 일을 그르쳤을 때 수한에 관해서 이야기했던 게 지나가듯이 생각나서 강우형은 호기심이 생겼다.
“김수한에 대해서 알아봐.”
“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