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 7. 진짜와 가짜
수한은 긴장한 얼굴로 앉아 있는 유지아 작가를 봤다. 현재 수한의 손에 들려 있는 건 소설을 드라마로 바꾼 1화였다. 지난번에 봤을 때부터 감이 오긴 했는데 드라마 쪽으로 확실히 재능이 있다.
“드라마 대본은 이번이 두 번째입니까?”
“그렇긴 한데 제가 아예 경험이 없는 건 아니에요. 드라마 보조 작가로 3년 동안 일한 적 있거든요.”
어쩐지 드라마 촬영 현장을 아는 사람처럼 글을 잘 썼다고 했다. 그러나 유지아 작가는 그 생활이 좋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표정이 어두웠다.
“잡심부름만 하다가 끝났거든요. 아마 그 작가님이 절 보면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너무 힘들어서 도망쳤거든요.”
인제 보니 도망치기 선수였다. 그러나 수한은 하나도 불안하지 않았다. 제 안목을 믿었다.
“연예계는 작가 쪽도 녹록지 않나 봅니다.”
“다 힘들겠지만, 굳이 따지자면 이쪽 상황이 더 안 좋아요.”
특히나 예능 쪽은 답이 없다고 한다. 텃세도 만만치 않은데다가 하나가 무너지면 와장창 한꺼번에 무너지는 게 작가라고 했다. 물론 힘든 건 연출 쪽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버티면 보상이 넉넉하다고 한다. 적어도 작가처럼 실수 한 번으로 무너지는 곳이 아니었다.
수한은 역시 이쪽 분야는 어느 쪽이든 인력을 갈아서 쓰는 것 같아서 씁쓸했다.
“그래서 영화 쪽으로 먼저 도전하셨던 거군요.”
“네, 맞아요. 언니 도움이 컸어요.”
유지영이 드라마 제작 회사에서 일하니 도움을 크게 줄 수 있었다. 유지영은 그 안에서도 어느 정도 힘이 있는 위치에 있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최민희 작가도 운이 좋은 편이었는데…….’
그 기회를 본인이 스스로 말아먹었으니 안타깝게 여길 수도 없었다. 수한은 다 읽은 대본을 덮고 유지아 작가를 봤다. 수한이 어떤 말을 할지 모르니 그녀가 긴장하는 건 당연했다.
“대본이 좋기는 합니다.”
“그래요?”
“하지만 이 정도로는 어림없습니다.”
재미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미 ‘로맨스 연대기’를 읽어서 그런지 그와 비교하면 부족한 점이 많았다. 무엇보다 그 부족함을 수한의 눈이 말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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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는 없었다 – 대중성: C, 화제성: S, 평균 시청률: 4%, 성장 가능성: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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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성도 ‘로맨스 연대기’와 비교하면 한 등급 떨어졌다. 물론 시청률이 1% 높긴 하지만, 미미한 수치였다. 이 정도면 둘 다 모호하였다. 화제성만 높아서는 의미가 없다.
“작가님, 작가님 소설의 장점이 무엇이라 생각하세요?”
“제가 장점을 잘 못 살렸다는 거죠?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어요. 고쳐 올게요.”
기대했던 반응이 아닌지라 크게 실망하는 게 보였다. 그래도 수한은 성장 가능성을 크게 봤다. 무려 성장 가능성이 100%가 아닌가? 그러나 음악과 다르게 드라마는 어떻게 손봐야 할지 수한도 가늠이 잘 안 되었다. 음악이야 들으면서 바꾸면 되는데 글은 그러기 힘들었다.
“그럼 고치면 메일로 보낼게요.”
“네, 알겠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수한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그대로 앉아 있는 유지아 작가를 발견했다. 수한이 의아하게 보자 그녀는 가방에서 노트북 하나를 꺼냈다.
“여기에서 쓰시려고요?”
“네. 백색 소음이 있어야 집중이 잘 되거든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수한이 나가는 동안 유지아 작가는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대본을 보았다. 어디를 고쳐야 할지 감을 못 잡는 얼굴이었다.
수한은 가기 전에 자신이 생각한 소설의 장점을 적어 메시지로 보내 놓았다. 글 쓰는 건 작가 본인이니 큰 도움은 못 주겠지만, 그래도 이게 방향을 잡는 데에는 도움이 됐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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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한이 사무실에 돌아오자 성민의 표정이 안 좋았다. 또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성민을 보니 성민이 한숨을 내쉬다가 바깥에 나갔다. 수한은 아는 척도 하지 않고 나가서 수한이 신경을 쓰니 자리에 앉아 있던 재원이 자신이 본 광경에 대해서 말했다.
“실장님, 대표님한테 불려 가더니 엄청 깨졌어. 일에는 친척이고 뭐고 없다는 거지.”
“무슨 일로요?”
“어제 누구를 만나고 온 것 같더니. 엘 엔터 사람이었나 봐. 아주 대표님 속을 살살 긁었대.”
성민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기에 수한은 쓰게 웃었다. 지난번에도 어지간히 자존심을 긁었다고 하더니 이번에도 비슷하게 그랬나 보다.
“무엇보다 이번에는 드라마 쪽에서 물 먹이니까 못 견디신 거지. 너도 불똥 튀지 않게 조심해.”
“네, 조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수한이 고개를 돌려 동현을 찾으니 동현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시은의 현장 매니저이니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건 당연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유지아 작가만 물 먹은 게 아니네.’
사무실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 같아 수한은 조심스럽게 자리로 돌아갔다. 그사이에 수한은 메일 하나가 온 것을 발견했다. 유지아 작가에게서 온 메일이었다.
‘금방 왔네.’
내용을 보니 수정을 마친 파일이었다. 수한은 자신이 가진 눈의 단점을 이럴 때 찾았다. 종이로 뽑아서 보지 않으면 능력치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수한은 파일로 보내진 것을 뽑았다. 양이 상당하기에 성민이 다시 사무실에 돌아왔을 때가 되어서야 대본이 다 출력되었다.
“응? 이게 뭐야?”
“아! 잠깐 보려고 뽑은 겁니다.”
성민이 꺼낸 종이를 수한이 재빠르게 받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대본의 능력치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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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는 없었다 – 대중성: A, 화제성: S, 평균 시청률: 12%, 성장 가능성: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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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랐다.”
“어? 뭐가?”
“아닙니다.”
그러나 들뜬 기분을 어떻게 숨길 수는 없었다. 수한은 얼른 대본을 읽고 싶어 손이 간질간질해졌다. 수한이 얼른 자리에 앉아서 대본을 읽기 시작하자 성민이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
“그거 유지아 작가 대본이야?”
“네, 맞습니다.”
“최종이야?”
“그건 아니고, 아직 더 고쳐야 합니다.”
성장 가능성이 아직 50%나 남아 있으니 더 고칠 수도 있었다. 그보다 수한은 그 짧은 시간 안에 대본을 고쳐 능력치를 올린 유지아 작가의 재능에 깜짝 놀랐다. 이 정도면 이 사람도 천재가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수한은 새삼 자신의 능력치를 떠올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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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한 – 스타성: E, 연기력: B, 가창력: C, 춤: B, 인지도: D, 기타: ???, 성장 가능성: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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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 씨의 기타가 작곡 능력이면 내 기타는 행운일 수도 있겠네.’
애초에 이 눈을 가진 것 자체가 행운이니 말이다. 수한은 대본을 다 읽은 후 전과 달라진 부분을 동그라미를 쳐서 보았다. 다행히 고치기 전 대본이 있어 비교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장점으로 말한 부분을 다 살렸구나.’
더불어 캐릭터의 매력을 부각하였다. 드라마는 배우가 연기를 잘해야 하기도 하지만, 그 배우가 맡은 역할의 매력이 중요했다. 얼마나 매력이 있는지에 따라 시청자의 몰입하고, 공감하는 정도가 달랐다.
‘근데 이 느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수한이 드라마를 자주 보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예 안 보는 사람은 아니었다. 인기 드라마는 나중에라도 찾아봤으니 말이다. 그래서 수한은 성민에게 도움을 청했다. 성민도 보자마자 느낌이 왔는지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는 손뼉을 쳤다.
“아! 그래! 이런 느낌으로 대사 쓰는 작가가 하나 있긴 하지!”
“누구요?”
“누구겠어? 로맨틱 코미디의 대가 있잖아.”
성민이 고개를 돌린 곳에는 1년 전 대박 난 드라마 포스터가 보였다. 표절 논란 전혀 없이 미래에서도 계속 대박을 친 스타 작가의 작품이었다.
‘설마 이 작가의 보조 작가로 있었다는 건가?’
아무래도 본인에게 가서 물어봐야 할 것 같다. 수한은 곧바로 유지아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직 카페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유지아 작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실장님, 저 잠시만 다녀오겠습니다.”
“어디 가는데?”
“작가님 좀 만나고 오겠습니다.”
유지아 작가와 만난 카페가 회사에서 멀지 않았기 때문에 수한은 금방 찾아갔다. 다행히 유지아 작가는 아직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아니다. 다행한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
수한은 유지아 작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최민희 작가를 발견하고는 소름이 돋았다. 우연히 만난 건지 아니면 일부러 찾아온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수한은 그 상태로 핸드폰을 들어 유지아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지아 작가의 핸드폰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다. 진동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최민희 작가가 재빠르게 핸드폰을 빼앗아 가는 게 보였다. 유지아 작가는 그런 최민희 작가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노려만 봤다.
수한은 일단은 다가가지 않고, 근처에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최민희 작가가 핸드폰을 빼앗은 이유를 깨닫고는 조용히 핸드폰 녹음 기능을 켰다. 어디까지 녹음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아 보였다.
“저번에 더러워서 글 안 쓴다고 하지 않았어요?”
“생각해 보니까 왜 제가 그만둬야 하는지 몰라서요. 표절을 한 건 제가 아니고 당신인데요.”
“이 사람이 큰일 날 소리를 하네. 설마 제가 고소 못 할 거라 생각하고 그러나 봐요.”
“고소하고 싶으면 고소하세요.”
유지아 작가가 눈에 힘을 주며 말하자 최민희 작가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유지아 작가를 봤다. 무시하는 게 수한의 눈에도 다 보여서 유지아 작가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이 되었다.
“가온이랑 요즘 만나고 다닌다면서요.”
“그래서요?”
수한은 업계 정보 하나는 빨리 돈다고 생각했다. 최민희 작가는 그런 유지아 작가가 같잖다는 듯이 비웃음을 입에 걸며 말했다.
“거기 제가 여자 주인공 바꾼 거 열 받아서 그쪽 이용하려고 접근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쪽 생각해서 찾아간 거 아니라고요.”
“저도 이용하려고 만나는 거예요. 절 걱정하는 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저한테 가장 폐를 끼치고 있는 건 당신이니까요.”
한번 마음을 제대로 먹어서 그런지 강해졌다. 수한은 속으로 잘하고 있다고 응원하며 최민희 작가가 어떻게 나올지 지켜봤다. 최민희 작가도 유지아 작가가 이렇게 세게 나올 거라 생각 못 했는지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러나 흥분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써 괜찮은 척 웃었다.
“그거 알아요? 글은 무조건 재미있으면 장땡이거든요. 그게 표절이든 말든 상관없이요.”
“지금 표절이라고 인정하는 거예요?”
“어. 어차피 논란 일어나도 나는 아무 상관없다고 말하는 거야. 이미 제작사에서도 이거 다 알고 시작하는 거거든.”
일부러 유지아 작가를 자극하려고 하는 말이 틀림이 없어서 수한은 유지아 작가의 반응을 살폈다. 어느새 힘이 들어간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저런 여자를 상대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결국, 눈물을 터트린 유지아 작가에 최민희 작가가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수한이 나설 차례였다.
“저도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갑작스레 수한이 나타날 줄 몰랐기에 최민희 작가의 당황한 얼굴이 보였다. 수한은 최민희 작가의 손에 있던 핸드폰을 빼앗아 유지아 작가 앞에 두었다. 그리고 유지아 작가의 옆에 앉으며 담담하게 최민희 작가를 봤다.
“재미있으면 그만이죠.”
“설마 우리 둘 이야기 엿들은 거예요?”
“아니요. 마침 들려온 겁니다. 유지아 작가님과 만나기로 했었거든요. 그렇죠? 작가님?”
수한이 유지아 작가를 보자 유지아 작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수한이 손수건을 들려 주자 그녀는 눈물을 쓱 닦고 최민희 작가를 노려봤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저야말로 묻고 싶습니다. 표절한 거면 알아서 쭈그려 있지 왜 작가님을 자극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되어서 말입니다.”
“지금 누가 표절을 했다는 거예요?”
수한이 팔짱을 낀 채로 웃고만 있자 최민희 작가의 화난 얼굴이 다 보였다. 여기서는 웃는 사람이 일류인 것을 최민희 작가는 몰랐다.
“그리 당당하시면 이런 식으로 우리 작가님과 만나지 마십시오. 물론 잘못했다며 빌려고 만나는 거라면 허락하겠습니다.”
“두고 봐요. 그쪽도 제가 고소할 거예요.”
“네. 마음대로 하십시오.”
갈 거면 어서 가라는 수한의 태도에 최민희 작가는 그대로 일어나서 걸어갔다. 그러나 불안한 심리가 그 걸음 안에 담겨있어서 수한은 느긋하게 그 뒷모습을 봤다. 그 사이에 유지아 작가가 겨우 숨을 돌리는 게 느껴졌다.
“제 대본 아직 부족하죠?”
“네, 아직 부족합니다. 박살 낼 거면 더 철저히 박살 내야 발악 못 합니다.”
수한이 고개를 돌리자 복수심에 의욕이 넘치는 얼굴이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눈물은 뚝뚝 떨어지고 있어서 그리 강해 보이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