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 탑스타-74화 (74/186)

074   7. 진짜와 가짜

그 말을 듣는 순간 떠오른 건 단 한 가지였다. 그러나 그 전에 수한은 먼저 유지아 작가의 의지를 알고 싶었다.

“만약에 제가 방법을 알려 주면 그 방법대로 하실 겁니까?”

“그건…….”

무슨 방법을 알려 줄지 모르기 때문에 유지아 작가가 망설이는 게 보였다. 그 모습에 수한은 고개를 저었다. 수한이 더는 볼일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유지아 작가가 따라 일어났다.

“일단 방법부터 알려 주시면 제가 생각해 보고…….”

“그 방법을 알려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작가님께서 저를 어떻게 판단하셨는지는 모르겠는데요. 저 좋은 사람 아닙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알려 드릴 수는 없습니다.”

“네? 조금 전에 제게 사과하셨잖아요.”

수한이 넘어오지 말라며 먼저 경계선을 긋자 당황하는 게 보였다. 수한은 그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싸늘하게 유지아 작가를 봤다. 그 눈빛에 유지아 작가는 크게 몸을 움찔하였다. 짧은 순간 유지영을 먼저 보낸 걸 후회하는 게 보였다.

“그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작가님께 도움 드릴 이유는 없습니다. 이미 작가님께서도 그 정도로 사과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시잖아요.”

수한의 여유로운 태도에 유지아 작가의 머릿속이 헝클어지는 게 보였다. 이런 경우는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다. 나름대로 용기를 냈는데 일이 잘 안 풀리니 혼란스러운 게 당연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망설임이 멈췄다. 수한은 그 순간 입을 열었다.

“지난번처럼 또 도망치려면 얼른 가시죠. 이번에도 잡지 않겠습니다.”

수한은 유지아 작가에게서 강한 시선을 느꼈다. 온몸으로 발끈하는 게 보였다. 이런 모습을 보면 이지훈과는 또 다른 사람이었다. 강한 오기가 눈빛에서 보였다.

“그래서 제게 원하는 게 뭔데요?”

“강한 정신력이요.”

“네?”

“지난번처럼 도망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는 말이 있죠.”

유지아 작가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서 오히려 분함을 느꼈다. 그날 유지아 작가가 도망치면서 공격할 기회가 최민희 작가에게 주어졌다. 최민희 작가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고, 그 결과 유지아 작가가 항복한 꼴이 되었다.

‘남의 것을 베끼려면 그런 뻔뻔함은 있어야 한다는 거지.’

물론 피해자에게 책임을 지게 하려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지난번처럼 도망치는 건 곤란했다. 수한이 하려는 방법은 정말로 유지아 작가의 정신력이 중요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방법이 뭔데요?”

“똑같이 드라마를 만드는 겁니다.”

“네?”

유지아 작가의 시선이 불안전하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런 말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수한은 오히려 담담하게 말했다.

“사실 작가님께서도 알고 있던 방법이잖아요. 제게서 그 방법밖에 없는 건지 확인하고 싶어서 물은 게 아닙니까?”

그 말이 맞는다는 듯 유지아 작가가 힘없이 의자에 몸을 기댔다. 정곡을 찔러서 말하니 항복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답을 정해 놓고 묻고 있었으니 이보다 어리석은 일이 없다.

“역시 그 방법밖에 없는 걸까요?”

“다른 방법도 있겠지만, 치명타를 원하시면 그렇습니다.”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복잡한지 유지아 작가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그녀는 누가 떠밀어 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물어본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수한의 태도로 보면 그는 절대로 그녀의 뜻대로 해 줄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유지아 작가가 전면으로 나서야 한다는 의견이니까.

“저, 그러면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될까요?”

“네, 말씀하세요.”

“둘이 붙으면 누가 이길 거라 생각하세요?”

수한은 그 물음이 어리석다는 듯이 씩 웃었다. 그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웃음에 유지아 작가는 눈이 커다래졌다. 그리고 곧 자신감을 얻었다.

“당연히 작가님입니다.”

***

수한은 자리에 앉아서 조용히 성민의 눈치를 봤다. 의도치 않게 정말로 사고 아닌 사고를 쳐 버렸다. 성민의 자리에서 연신 들려오는 한숨 소리에 수한은 괜히 마우스만 움직였다. 그러다가 낮게 불리는 목소리에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김수한이.”

“네! 실장님.”

“따라와.”

“네, 알겠습니다.”

수한이 성민을 따라가자 이번에는 카페가 아닌 텅 비어 있는 회의실이었다. 수한은 어색하게 웃으면서도 당장에라도 방어할 준비를 했다. 물론 몸싸움을 하면 수한이 이기겠지만, 그래도 싸움은 먼저 치는 사람이 유리했다.

“너 가수 전담하랬지. 누가 드라마 제작에 관심을 가지랬어?”

성민은 수한이 가져온 기획안을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복잡한 얼굴이었다. 신입치고는 경력자가 만든 것처럼 기획안을 너무 잘 만들어 왔다. 아예 못하면 버려 버릴 텐데 인재는 인재였다.

“너 솔직히 말해 봐. 이 업계에서 일하다가 왔지?”

“아닙니다. 과거에는 적어도 그런 일이 없습니다.”

수한으로서는 말장난에 불과한 말이었지만, 성민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수한이 가져다 놓은 기획안을 다시 살펴봤다.

“네가 보기에 이게 승산이 있어 보여?”

“네.”

“아직 유지아 작가의 대본이 나온 것도 아니잖아.”

“제 눈을 실장님께서도 믿으실 거라 확신합니다.”

“하여튼 간에 말이라도 못하면…….”

성민은 입술을 깨물었다가도 기획안은 마음에 드는지 연신 고민하는 게 보였다. 그런 성민을 다 알면서 수한은 괜히 묻게 되었다.

“그래서 별로라고 생각하십니까?”

“조금 허무맹랑한 계획도 있긴 한데 가능성은 있어 보인단 말이지.”

요즘 한국 드라마가 중국에 팔려 나간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외국에 수출하겠다는 계획이 아주 헛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용케 유지아 작가 설득했다?”

“제가 설득했다기보다는 본인의 의지입니다.”

“하긴 제 새끼를 통째로 빼앗겼는데 가만히 있는 게 이상하지. 얌전해 보이더니 의외로 전투력이 있네.”

그 전투력을 자극한 게 수한이긴 하지만, 유지아 작가는 이 일을 하기로 마음먹으면서 어느 정도 욕먹을 각오도 했다. 무너질 거면 함께 무너져 엉망진창으로 구를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유지아 작가가 그를 인지하고 나섰기에 수한은 기필코 이 일이 성사되기를 바랐다.

“근데 우리 회사에서 드라마에 투자하는 건 좀 과하다는 생각 안 들어?”

성민이 꺼리는 게 이런 것이었다. 엘 엔터테인먼트에서 한다고 굳이 중소 기획사에서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물론 그럴 필요성은 없습니다. 다만 과연 다른 투자자가 선뜻 나설 줄지가 의문입니다.”

엘 엔터테인먼트가 가수 기획사로 유명하다고 해도 아무래도 대형 기획사이다 보니 힘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쪽에서 먼저 압박을 주면 하겠다고 나섰다가도 발을 뺄 투자자가 넘쳤다. 수한은 그 미지의 불안정성을 가져가고 싶지 않았다.

“일단 대표님께 이 기획안은 드려 볼게.”

“실장님만 믿겠습니다.”

“인마, 믿지 마.”

“그래 놓고 가시면 잘하실 거잖아요.”

수한이 성민의 뒤로 가서 어깨를 주무르자 성민은 말로는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얌전히 안마를 받았다. 그러면서도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해졌다.

“일단 말은 해 두겠는데 대본부터 가져와라. 그걸 봐야 확실히 네 말이 맞을지 확신이 설 테니까.”

“물론이죠. 걱정하지 마세요.”

성민은 수한의 넘치는 자신감이 좋으면서도 이럴 때는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큰 그림으로 보면 회사에 큰 이익을 가져다 줄 일이니 이번만 제대로 도와주기로 했다. 다만 대본 상태가 그 기대를 채워 주지 않으면 그때부터는 도움이고 뭐고 일절 없다.

***

남일은 갑작스럽게 잡힌 약속 때문에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내색하지 않으며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예약해 둔 이름을 부르니 종업원이 자리를 안내하였다.

“어서 오세요, 대표님.”

남일은 안에 있는 사람에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반갑지 않은 인사가 자리에 있었다. 엘 엔터테인먼트 대표 이사 강우형이었다.

“지난번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그 말에 강우형은 하하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남일이 그때 일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 지나간 일이니 섭섭한 게 있다면 오늘로 다 풀었으면 합니다.”

“그래요, 서 대표. 다 지나간 일 아닌가?”

누구 마음대로 지나간 일이란 말인가? 남일은 감정이 울컥 올라왔지만, 감정적으로 굴지 않았다. 이 자리는 친목을 하기 위한 자리이면서도 미래에 함께 기업을 이끌어 나가자는 협력 관계를 다지기 위해서 만들어진 자리였다.

‘이 자리에 저 인간을 데려왔다는 건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건데.’

사실 대충 짐작은 되었다. 성민으로부터 하나의 기획안을 받았기 때문이다. 남일은 처음에는 심드렁하게 기획안을 보다가 그 기획안을 작성한 사람이 수한이라는 것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

‘이거 난 놈이네?’

이쪽 머리가 돌아가도 너무 잘 돌아가서 탈이었다. 왜 중소 기획사에서 일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되는 인재였다. 무엇보다 중국 시장에 관심이 있는 남일의 마음을 아주 잘 공략했다. 그래서 수한을 향한 경계가 다시 올라갔지만 말이다.

‘모 아니면 도는 할 놈이란 말이야.’

남일이 다른 생각을 하는 동안 두 사람은 서로 술을 주고받으며 웃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제야 남일을 인식한 것처럼 말을 건넸다.

“서 대표, 그러지 말고 술 한 잔 받지.”

“네. 회장님이 주시는 술이니 받겠습니다.”

남일은 대표 자격으로 왔는데도 이 자리에서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 기필코 회사를 더 크게 키우고 만다.’

수한의 기획안이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일이 잘되기만 하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물론 더 확실한 걸 가져와야 알겠지만 말이다. 그 생각을 알아챈 것처럼 강우형이 웃으면서 남일과 눈을 맞췄다.

“요즘 가온 상황은 어떻습니까?”

“그냥, 그렇죠. 좋은 대본이 들어오지 않아서 걱정입니다.”

이미 성민에게서 좋은 작품을 엘 엔터테인먼트에서 가로챘다는 이야기를 들은 남일이었다. 남일은 다 안다는 듯이 웃는 강우형의 모습에 부아가 치밀었다.

‘이거 일부러 나 자극하려고 물어본 거군.’

수한을 품고 싶지 않아도 지금은 품고 있으라고 하늘에서 계시라도 내리는 기분이었다. 물론 일이 잘 안 되면 수한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면 되니까 상관없으나, 역시 큰돈이 들어가는 일이라 망설이게 되었다. 그런 성민을 자극하는 것처럼 강우형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요즘 가온 배우들이 하는 드라마마다 다 잘됐으니 나중에 비법이라도 따로 알려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도 가수를 어떻게 하면 잘 키울 수 있는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미 소원과 고주혁이라는 인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우형은 그 성과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남일은 어디 두고 보라며 강우형을 향해 웃었다. 나중에 이날을 다시 상기할 때는 이가 갈리는 사람이 바뀌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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