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 7. 진짜와 가짜
수한은 고민하다가 하루가 지나서야 유지아 작가에게서 전화 온 사실을 성민에게 말했다. 어제 전화 받을 당시에 다시 전화를 걸어 봤으나, 유지아 작가는 받지 않았다. 그걸로 정말 끝이었다.
수한은 유지아 작가가 그런 말을 하는 데에는 무슨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해서 머리가 많이 복잡해졌다.
‘정말로 표절을 당한 거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런 전화가 왔었다고?”
“네, 그렇습니다.”
“발 뺀 거네.”
수한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던 게 성민의 말로 인해서 정리되었다. 성민은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면서 마음 편하게 먹으라고 말했다. 그리 생각한다면 수한도 편하긴 하지만, 마음은 불편했다.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건 아니겠죠?”
“그런 게 있었으면 그 상태로 끝냈을 리가 없지. 오히려 잘됐어. 이걸로 영화도 무산되었을 테니 표절 관련해서 말이 나오지는 않겠네.”
한쪽이 물러난 이상 표절이든 아니든 무의미하게 되었다. 그게 참 씁쓸했다.
“네, 알겠습니다.”
굳이 걱정을 사서 할 필요가 없으니 수한도 그만 잊기로 했다. 굳이 길이 작가의 길만 있는 건 아니니까. 다만 이 일로 너무 크게 좌절하지 않았으면 했다. 표절이 아니라면 말이다.
“고주혁이 말이야. 대관은 했어?”
“네. 내년 상반기로 잡고 있습니다.”
앨범 활동을 하고 바로 두 달 후에 콘서트를 할 생각이었다. 아직 규모를 정확히 잡을 수가 없어 막막함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래도 올림픽 공원은 가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산 곡들의 퀄리티가 제 마음에 안 차네요.”
“A&R팀이 노력은 하고 있는데 대형 기획사에서 어지간히 독점하고 있는 모양이야.”
이해는 되었다. 한류가 퍼져 나가는 상황이니 대형 기획사에서는 더 악착같이 곡을 사서 쟁여 두고 있었다. 이런 점들이 어떻게 보면 중소 기획사의 한계였다.
‘이렇게 되면 소원 씨나 지훈 씨의 도움을 받아야 할 텐데.’
소원의 도움은 어떻게 받을 수도 있겠으나, 지훈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SSS급 슈퍼스타를 통해 자존감이 많이 회복되기는 했으니 수한은 살짝 기대해 보기로 했다. 그러면서 지훈의 앨범 준비도 멈추지 않았다.
“자! 이거 마셔라. 내 거 타 온 건데 너니까 특별히 주는 거야.”
“네, 감사합니다.”
수한은 성민이 건네주는 믹스 커피를 받아서 마셨다. 은근 커피 하나는 잘 챙겨 준다. 수한은 새삼 커피 중독자가 된 현대인의 일상을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성민은 무언가 떠올랐는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그 한소원한테 들어온 그 대본 말이야.”
“네, 왜요?”
“한소원이 아닌 다른 배우를 넣을 수 있는지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
“소원 씨한테 온 거니까 제가 연락해 보겠습니다.”
“그래.”
수한은 자리로 와서 소원에게 온 대본을 다시 살폈다. 소포 안에 들어 있던 명함을 봤다. 소포를 보낸 곳은 드라마 제작사였다. 검색해 보니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수작들만 내보낸 곳이었다. 그래서 믿음이 갔다.
수한은 명함에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명함에 쓰여 있는 건 평범하게 02로 시작하는 전화번호였다. 평범한 통화음이 들리더니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보내 주신 대본 보고 연락드렸습니다. 저는 가온 엔터테인먼트의 김수한입니다.”
[김수한이라고요?]
들려온 목소리는 여자 목소리였다. 아니, 성별이 중요한 게 아니다. 수한은 당황한 상대 쪽 목소리에 이상함을 느꼈다.
‘뭐지? 연락 올 거 알고 보낸 게 아니었나?’
수한이 말을 이으려고 하기가 무섭게 갑자기 전화가 뚝 끊겼다. 수한은 잠시 멍한 상태가 되었다. 설마 끊은 건가 싶었다. 아니지, 실수로 끊은 걸 수도 있다. 수한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그쪽하고 할 말이 없어요.]
“네?”
다시 전화가 끊어졌다. 수한이 황당해서 말이 안 나왔다. 지금 뭐 하는 걸까? 장난이라도 치는 건가? 오랜만에 오기가 들면서 수한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이제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이게 뭐 하는 거지?’
수한은 어이없다는 듯 웃다가도 승부욕으로 인해 눈빛이 달라졌다. 제대로 불타올랐다. 수한은 이제 자신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키패드를 누르는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러자 신호음이 가기가 무섭게 전화 받는 소리가 들렸다.
[네, 바늘 엔터테인먼트입니다.]
“안녕하세요.”
인사하기가 무섭게 전화가 끊어졌다. 수한은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러면서도 입은 웃고 있었다.
‘어디 해 보자, 이거지?’
“선배님! 핸드폰 좀 빌려 주세요!”
수한은 옆자리에 있는 매니저의 핸드폰을 잠깐 빌려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다시 받는 소리가 들리더니 조금 전에 들려온 목소리가 들렸다.
[네, 바늘 엔터테인먼트입니다.]
“안녕하세요. 가온…….”
뚝. 띠-디-디-디.
수한은 다시 다른 사람의 핸드폰을 빌렸다. 이제는 오기가 나서라도 포기 못 하겠다. 수한의 그런 집념이 통한 탓인지 항복은 그쪽에서 먼저 했다.
[알았으니까 그만 전화해요!]
“우선 이유부터 들어 봅시다. 저야말로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멀리서 빨리 전화하고 핸드폰 내놓으라고 하는 성민이 보였다. 물론 수한은 그런 성민을 가뿐히 무시하며 통화에만 집중했다.
[그쪽이 너무 얄미워서 그랬어요.]
“네?”
수한은 황당했다. 누가 보면 아는 사람인 줄 알겠다. 수한은 특별히 명훈을 제외하고는 주변 사람에게 못한 것이 없기에 황당하기만 했다.
‘잠깐 그렇다는 말은 저쪽에서는 날 안다는 거 아니야?’
그러면 말이 살짝 달라진다. 수한은 무슨 사정이 있는지 일단은 들어 보기로 했다. 저쪽에서는 약간 뜸을 들이더니 한숨 쉬는 소리가 들리면서 말했다.
[그 대본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는 확인하고 전화한 거예요?]
당연히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수한은 구석진 곳에 쓰여 있는 이름에 깜짝 놀랐다. 왜 이 이름이 여기서 튀어나온 건지 모르겠다.
‘유지아 작가…….’
어째서인지 안 좋은 예감은 들어맞는지 모르겠다. 펜을 꺾는다고 했으니 이 대본이 진행될 리가 없었다. 드라마 제작도 무산되었을 테니 이런 반응이 조금은 이해되었다. 수한은 이제 저쪽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정 궁금하면 우리 사무실로 오던가요. 전화로는 다 못 해요. 할 말이 너무 많거든요.]
“그럴 거면서 전화는 왜 끊으신 겁니까?”
[그쪽이 너무 끈질기게 전화해서 받은 거예요. 싫으면 말든가요.]
“아닙니다. 시간 내서 찾아가겠습니다. 사무실로 가면 되겠습니까?”
[네, 사무실로 오세요.]
수한은 끊긴 핸드폰을 멍하니 보다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보는 성민에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곤란한 일이 일어났다.
***
“인제 와 말을 바꾸면 어떻게 합니까?”
출근하자마자 들려온 큰 목소리에 수한은 놀란 얼굴로 사무실에 들어왔다. A&R팀에 들러서 의견을 나누느라 조금 출근이 늦어졌다. 그 탓에 왜 성민이 큰 소리를 내는지 이해를 못 했다. 마침 자리에 앉아 있던 재원이 있기에 수한은 재원의 옆으로 갔다.
“오늘 예진 씨 일정 없습니까?”
“그 예능 프로그램 하차했잖아. 그래서 요즘 집에서 순돌이와 노는 중이야.”
한마디로 말해 백수 생활을 즐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수한은 진심으로 재원을 부러워했다. 요즘 이 사무실에서 가장 바쁜 게 수한이었다. 괜히 가수 전담을 맡아서 일이 힘들어졌다. 물론 그만큼 보람도 있어서 할 만하지만 말이다.
“근데 무슨 일 있습니까?”
안부를 물어본 건 말을 걸기 위한 핑계였다. 재원도 그 사실을 알기에 웃으면서 말했다.
“안 그래도 나도 너한테 물어보려고 했어.”
“네?”
수한은 웃음이 터져 나올 뻔한 걸 겨우 막았다. 웃기에는 성민의 상황이 너무 심각해 보였다. 좋은 얼굴의 성민만 그동안 쭉 봐 왔으니 이 광경이 어색한 게 당연했다.
“결론은 선배님도 잘 모른다는 거네요.”
“근데 뉘앙스로 들어봤을 때 박시은 일 같았어.”
그렇다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짐작이 되었다. 성민이 저토록 화를 내는 이유는 하나였다. 캐스팅이 엎어진 것이다. 이미 홍보팀에서 기사 낼 준비도 마쳤기 때문에 성민이 화내는 게 당연했다.
‘어쩐지 일이 너무 찝찝하게 흘러간다고 했어.’
드라마 하나 들어가는 데 삐걱거리는 게 많았다. 특히나 계속해서 신경 쓰게 했던 유지아 작가 말이다. 거기서부터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합니까? 우리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한 거라고요?”
성민이 불같이 화내고 있었다. 성민이 저런 식으로 화를 낸 건 정말 처음이라서 수한은 어서 전화가 끝나길 바랐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성민에게 자세히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성민은 얼마 안 가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수한아, 찬물 잔뜩 떠다 줘야겠다.”
“네, 알겠습니다.”
재원의 말에 수한은 조용히 탕비실로 가서 유리컵에다가 얼음을 넣은 뒤 찬물을 잔뜩 담았다.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픈 차가움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성민에게는 이게 딱 맞았다. 수한이 탕비실에 나와 성민의 자리로 가자 뜨거운 숨을 내뿜는 성민이 보였다.
“한 잔 쭉 들이켜십시오.”
평소였으면 뭐라고 한마디 했을 성민인데 지금은 수한의 말을 따랐다. 수한은 쭉 들어가는 찬물을 보다가 얼음으로 찰랑거리는 유리컵이 책상 위에 콱 부딪히는 걸 봤다. 물을 마시자 속이 조금 가라앉기는 했는지 성민이 울상을 지었다.
“수한아, 어떡하냐.”
“엎어진 겁니까?”
“그래. 그렇게 되어 버렸어.”
드라마 일을 하다 보면 이런 일이 다반사라 수한은 괜찮다고 위로하고 싶었지만, 성민의 생각은 다른 모양인지 그는 이를 악물며 의심의 눈초리를 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실수한 게 맞은 것 같아.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았네.”
“실수라면 어떤 실수를 말하는 겁니까?”
“표절 말이야. 아무래도 이 작품이 표절작이었던 것 같아.”
“그에 관한 근거는요?”
이미 유지아 작가를 표절 작가로 확신한 전적이 있기에 수한은 조금 더 확실한 근거를 원했다. 그런 수한을 성민도 이해했기에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네가 찝찝해했던 것처럼 나도 찝찝해했거든. 솔직히 그걸 증거로 내세우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잖아.”
“그렇죠.”
“그래서 뒤로 따로 알아봤어.”
인맥이 넓은 성민이기에 어느 정도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 있기는 했다. 그런데 문제는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발생했다.
“최민희 작가가 유지아 작가에게 따로 연락하고 있었다고요?”
“그래. 엄청나게 압박을 한 모양이야. 자세한 내용까지는 모르겠는데 이 바닥에서 발도 못 붙이게 하겠다는 등 협박을 한 것 같아. 고소당할 준비 하라고. 그것도 매일 같이 연락해서 못살게 굴었나 봐. 네가 보기에는 이게 표절당한 작가가 할 짓이라고 생각해?”
수한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흥분해서 그런 말을 할 수는 있으나, 이상하게 마치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구린 냄새가 났다.
유지아 작가가 수한에게 연락한 다음에도 그러고 있다는 소식에 성민이 직접 나섰다. 그 결과가 이런 식으로 나타났으니 화가 안 날 수가 없었다. 명백히 보복이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이럴 생각을 하고 있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번만은 확실해. 최민희 작가가 표절 작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