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 7. 진짜와 가짜
수한은 일부러 시간을 두고, 유지아 작가에게 연락했다. 그때 괜히 모른 척하고 간 건가 싶게 계속 마음에 걸려 타이밍을 엿보다가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유지아 작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수한은 혹시 몰라 문자도 남겼지만, 문자 또한 이렇다 할 답장이 오지 않았다.
‘자기가 표절한 게 아닌데 이렇게 피할 수도 있나?’
연락을 피하니 의심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수한은 회사에서 샀다는 신곡들을 들어 보다가 마음이 답답해졌다. 하나같이 좋긴 하나, 능력치를 보면 그리 좋은 곡을 샀다고 볼 수 없었다. 그러자 멀리서 성민이 수한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웃으면서 다가왔다.
“그 작가한테 연락해 봤어?”
“네. 해 봤는데 받지를 않네요. 그래서 증거가 있으면 문자로라도 답해 달라고 했는데 답이 없어요.”
“그래? 그 정도면 드라마 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
“다른 곳에 도움을 청하려는 건 아니겠죠?”
그 소심해 보이는 성격에 그럴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니까 가능성을 완전히 닫아 두지는 않았다.
“혹시 모르니 계속해서 연락해 보겠습니다.”
“그래.”
수한은 몰랐지만, 만날 당시에 성민이 따로 녹음기를 켜 두었다고 한다. 나중에 다른 말을 할 수도 있으니 만약을 대비해서였다. 그런 의미에서 유지아 작가가 다른 길을 선택한다면 그녀 자신에게 곤란한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로맨스 연대기 쪽은 어떻습니까?”
“드라마 제작 확정되어서 배우 캐스팅 중이래. 최민희 작가 첫 작이라 신경 많이 쓸 것 같더라. 감독은 연출 잘하는 베테랑이 붙었어.”
“좋네요. 대본도 좋은데다가 감독까지 좋으면. 그런데 시은 씨가 은근 입봉 작품을 많이 하네요.”
“그러게 말이다. 뭐, 신인 감독 영화에만 줄줄이 출연하는 배우도 있으니까.”
드라마 쪽도 인맥으로 돌아갔지만, 영화 쪽은 더했다. 인맥에 인맥을 이은 곳이 영화계였다. 수한도 한때 자기가 키우던 배우를 영화 쪽으로 돌려 보려다가 좌절한 경험이 있기에 영화 쪽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새로운 도전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흥미가 살짝 생겼다.
“이번 작품도 성공하면 스타 작가 대본도 들어오겠지.”
스타 작가라 하면 대박 작품을 여러 개 쓴 작가를 말했다. 대한민국에서도 손에 꼽는 작가이기에 그런 작가의 대본을 받기 위해 많은 배우가 줄 섰다.
‘스타 작가의 작품이라면 서브라도 들어가면 일단 좋은 법이니까.’
그만큼 시청률이 높게 나오니 대중에게 눈도장을 찍을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면 스타 작가가 쓰는 작품의 장르는 하나였다. 오롯이 로맨틱 코미디였다. 그 안에 판타지를 넣을지언정 그 장르의 정체성이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수한은 신경 쓰였다.
“다음에도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내보낼 생각입니까? 대중들이 질려 하지 않을까요?”
그와 더불어 똑같은 연기만 한다고 욕먹을 가능성도 컸다. 물론 시은이니까 다르게 잘 연기하겠지만, 그래도 조금 그랬다. 그러자 성민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 길이 안전하잖아. 욕은 잠깐이지만, 기록은 영원하지. 반짝 떴다가 망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수한은 성민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고 쓰게 웃었다. 장르를 다르게 하거나 영화계로 진출해서 성공하는 경우가 많은 남자 배우와 달리 여자 배우는 그런 광경을 보기 힘들었다. 나름대로 욕심은 가지긴 하나, 그 욕심을 채울 만한 작품이 없는 것이다.
정확히는 작품성 있는 작품이 없었다. 그래서 인기가 반짝 올랐다가 고꾸라지는 여자 배우들의 사례가 많았다. 정말 거품처럼 사라진 인기였다.
그래서인지 성민은 웬만해서는 시은에게 도전을 하게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시은 씨도 이에 관해서 고민 많이 하겠네요.”
“우리가 잘 잡아 줘야지. 어쨌든 간에 돈이 되는 일을 해야 하는 게 이 업계니까.”
“그렇네요.”
“그 작가한테 이번 주에도 연락 없으면 무시하고 넘어가자고.”
“네, 알겠습니다.”
수한은 그 자리에서 사무적인 일을 보다가 갑자기 온 소포를 살폈다. 받는 사람의 이름에 소원이라 적혀 있기에 팬이 보낸 선물인가 했다. 언제 이상한 팬이 나타날지 모르기에 늘 선물 확인을 하던 수한은 예상과 다르게 대본 하나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잠깐만 이거?’
수한이 대본을 보자 여자 주인공 이름에 형광펜 줄이 쳐 있었다. 이미 다른 배우의 대본을 본 적이 있기에 수한은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소원 씨에게 연기 제안이라니. 그것도 여자 주인공으로?’
수한은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을 봤으면 절대로 이런 제안이 들어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소원은 그냥 발연기도 아니고, 역대급 발연기였다. 수한은 생각이 많아졌다. 웃긴 건 이 와중에 대본의 능력치가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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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잎클로버 – 대중성: S, 화제성: S, 평균 시청률: 25%, 성장 가능성: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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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열심히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던 능력치의 대본이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황당하네.’
살짝 읽어 본 것만으로도 어떤 장면이 그려질지 눈앞에 그려졌다. 누가 봐도 매력 있는 작품이어서 수한은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수한은 그 대본을 가지고 성민에게 갔다.
“이거 한번 읽어 보십시오.”
“응? 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수한이 들고 온 대본이라서 성민은 잠깐 시간을 내 대본을 빠르게 읽었다. 얼마 안 가 그는 정말 미쳤다는 얼굴로 수한을 봤다.
“요즘 우리 작품 운이 미쳤나 봐. 시은이한테 들어온 대본이야? 아니면 예진이?”
“둘 다 아닙니다.”
“응? 그러면?”
“소원 씨입니다.”
수한은 성민의 눈동자가 제대로 흔들리는 것을 봤다. 성민도 촬영 현장을 함께 봤기 때문에 소원의 발연기를 잘 알고 있었다. 소원에게 연기 제안이 온 것과 별개로 벌써 공포가 펼쳐졌다.
“왜 하필 한소원한테? 아니지, 캐릭터만 보면 한소원이 딱인데 말이야. 아니! 근데 문제는 연기를 못하잖아!”
“그러게 말입니다.”
성민이 가진 혼란을 수한도 이해하기에 허탈한 웃음만 계속 흘러나왔다. 물론 가수에서 연기자로 전환하는 연예인들이 많기는 했다. 특히 아이돌의 경우에는 가수로서 한계가 있으므로 조금 더 오래가기 위해서 연기자로 전향했다.
‘하지만 소원 씨는 절대 연기를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야.’
특히나 이렇게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좋은 대본이 들어왔다고 덥석 물어 버리는 건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그래, 아닌 건 아닌 거지. 그래도 한소원한테 물어볼래? 하고 싶냐고?”
“아니요. 이건 제 선에서 자르고 싶습니다.”
“왜? 평소에는 연예인 의사를 가장 먼저 물어보던 게 너잖아.”
수한은 솔직히 말해 소원이 연기를 하고 싶다고 말하면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물론 소원은 지금 당장은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겠지만, 미래 일은 모르는 일이다. 그런 순간이 온다면 수한은 소원을 어떻게든 말릴 거라고 크게 다짐했다.
“너 좀 걱정했었는데 그 태도를 보니까 안심이 좀 된다.”
“제가 연예인한테 휘둘릴까 봐요?”
“다른 사람한테는 단호해도 자기 연예인한테는 무른 경향이 없지 않아 있잖아.”
수한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면이 있긴 하지만, 그건 성민이 고주혁과 함께 했던 수한을 못 봐서 하는 말이었다. 고주혁은 스스로 잘하긴 했지만, 수한이 끝까지 관리하는 연예인이었다. 요즘도 팬과 너무 가까이 지내는 것과 같아 조용히 경고하는 중이었다.
“저도 아니라고 생각한 건 아니라고 보는 사람입니다.”
“그래, 알겠다.”
그렇다고 해도 작품이 아까워서 수한은 대본을 계속 만지작거리게 되었다. 괜히 좋은 대본을 날린 것 같아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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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저한테 연기 제안 온 거 오빠가 안 된다고 반대했다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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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한은 일하는 도중에 온 메시지에 누가 보낸 건가 싶어 메시지의 주인공을 확인했다. 수한을 오빠라고 부르는 사람은 두 사람밖에 없지만, 혹시나 해서였다. 수한은 메시지의 주인공을 보고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 주인공은 얼마 안 가 전화를 받았다.
“연기하고 싶으셨습니까?”
[네, 당연히 하고 싶었죠.]
진심이 담긴 듯한 소원의 목소리에 수한은 머리에 안개라도 낀 기분이었다. 진심으로 하고 싶다고?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떨어진 기분이었다. 그런 수한을 예상했는지 얼마 안 가 웃음소리가 들렸다.
[농담이에요.]
“진짜인 줄 알고 놀랐습니다. 누구한테 그 소식 들었습니까?”
[예진 언니한테요.]
수한은 전에 집에 갔을 때 강아지 옷을 안 입히고 간 것에 대한 보복을 이런 식으로 하나 싶었다. 안 하고 싶어서 안 한 게 아니라 시간이 없어서 얼굴만 비치고 간 거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수한도 억울했다.
‘나도 순돌이와 놀고 싶다고.’
강아지를 좋아하지만, 키우지 못하는 사람의 심정을 아는 건 부모님의 반대로 강아지를 키우지 못하는 사람들만 알 것이다. 물론 수한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없어서 못 키우는 거지만 말이다.
[저 발연기라고 열심히 반대하셨다면서요?]
“저만 반대한 건 아닙니다.”
[저 농담으로 한 거였는데…….]
갑자기 풀이 죽은 목소리가 들리면서 수한을 당황스럽게 했다. 수한은 예진이 소원에게 나쁜 물을 들이고 있는 거라 확신했다. 아니면 시은이 나쁜 물을 들이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런 장난기는 시은의 것과 비슷하니까.
“연기하고 싶으면 나중에 좋은 연기 선생님을…….”
[이것도 농담이에요. 연기는 저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오빠랑 같은 생각이에요.]
다행이었다. 수한은 십년감수하는 기분이었다. 아직 가수로서 가야 하는 길이 천 리다. 수한은 소원에게 싱어송라이터의 이미지를 제대로 심어 주고 싶었다. 지금은 걸음마만 뗀 상태라 앞으로의 길이 중요했다.
“예진 씨에게는 소원 씨에게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당사자한테 그냥 말하는 게 낫지 않아?]
갑자기 들려온 삼자의 목소리에 수한은 소름이 돋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야 했는데 왜 그렇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애초에 소원이 이런 식으로 먼저 장난 칠 사람도 아니건만.
“그럼 당사자에게 말하겠습니다. 소원 씨한테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마세요.”
[뭐가 이상한 건지는 나도 모르겠는데?]
“예진 씨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습니다.”
[뭐야? 너 지금 나 비꼰 거지?]
“예진 씨가 그렇게 받아들이신다면 어쩔 수 없네요. 저는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지만요.”
수한은 커지는 예진의 목소리에 바쁘다고 말하며 끊었다. 소원의 번호로 전화가 여러 번 왔지만, 일부러 받지 않았다. 하여튼 간에 애한테 이상한 거 가르치고 있다.
전화가 또 온다. 수한은 다시 한번 오는 전화에 바쁘다고 말하려고 전화를 거절하려다가 어디서 많이 본 이름에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바로 전화를 받았다.
“네, 유지아 작가님. 김수한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던 유지아 작가가 직접 전화를 했다. 안 그래도 그녀의 존재가 찝찝하던 찰나에 수한은 기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으나, 유지아 작가는 그렇지 못했는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펜 꺾었으니까 더는 연락하지 말라고 연락했어요.]
“네?”
[그 작가한테 전해 주세요. 남의 글 훔쳐서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는지 두고 보겠다고요.]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