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8 7. 진짜와 가짜
"김수한이! 가자!"
"실장님이 직접 가십니까?"
수한은 이미 나갈 준비를 마쳤기 때문에 놀란 눈으로 성민을 봤다. 설마 성민이 따라갈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오늘 양복을 쫙 빼입은 게 사무실에서만큼은 편한 옷을 추구하던 성민이 아니었다. 수한도 오늘 가벼운 정장 차림이었기에 괜히 헛기침했다.
"그래도 내가 가니까 안심되지?"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뭐, 인마?"
"어쨌든 간에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나도."
두 작가는 따로 만나서 작품을 확인한 뒤에 따로 합치기로 했다. 괜히 두 사람이 먼저 만났다가는 중재도 없이 싸울 것 같았다.
"실장님이 먼저 로맨스 연대기 작가를 만나는 거죠?"
"그래. 너는 로맨스는 없었다 작가고."
"실장님은 누가 표절 작가인 것 같아요?"
"장담할 수 없겠지만, 이쪽일 가능성이 크지."
성민이 가리킨 대본은 '로맨스 연대기'였다. 성민도 수한의 생각과 같았다. '로맨스 연대기'를 보고 있으면 무언가 원작이 존재하고, 그를 각색한 느낌을 주었다. 게다가 이 내용을 가지고 로맨스 코미디 장르를 썼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솔직히 이 대본과 제목이 어울리는 건 아니지."
"그렇죠."
'로맨스는 없었다'와 '로맨스 연대기'. 두 작품의 제목만 봐도 장르가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다. 그래서 두 작품을 읽기 전까지는 이토록 내용이 비슷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최대한 두 사람 다 자극하지 않게 조심하자고. 그게 쉽지는 않겠지만."
"네. 자기 작품을 누가 빼앗았을 수도 있다고 하는데 흥분하지 않는 게 이상하니까요."
흥분하지 않는다면 그건 훔친 사람일 것이다. 아니면 적반하장으로 더 화를 낼지도 모르는 일이고.
"지금 우리가 하는 생각도 티 내서는 안 되고."
"당연하죠. 저는 실장님이 아닙니다."
성민이 어이없게 수한을 쳐다보자 수한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성민도 결국 따라 웃으면서 함께 밖으로 나갔다.
수한이 막상 운전대를 잡자 성민이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본인이 직접 나서겠다고 해서 나섰으나, 부담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원래 이런 교섭은 다른 부서에서 하는 거죠?"
"그렇지. 우리가 못 할 건 없지만, 나설 필요가 없는데 나선 건 사실이니까. 일이 잘못되면 우리에게 책임을 물을지도 모르지."
"아직 제작되지도 않았는데요?"
"그건 앞으로 어떻게 일이 진행되는지 두고 봐야 알겠지."
그런 부담감에도 나선 이유는 시은 때문이었다. 수한이 소원을 아끼는 만큼 성민도 시은을 아꼈다. 그걸 알아서인지 수한의 가슴 한편이 따뜻해졌다. 수한은 새삼 이런 따뜻한 사람들이 매니저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현실은 그렇지 못하지만 말이다.
수한이 약속 장소에 성민을 내려 주자 성민이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민감한 문제인 만큼 먼저 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수한도 '로맨스는 없었다' 작가와 만나야 하기에 그대로 운전대를 돌려 다른 카페로 향했다. 두 카페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수한은 카페 안에 도착하자마자 문자로 먼저 도착해 있다는 내용을 보냈다. 수한은 그러면서도 이 와중에 시은이 보낸 메시지가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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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안 만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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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겠다고 했으면서도 내심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보여서 귀여웠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레 한숨이 나왔다. 일이 잘못될까 봐 걱정되어서였다.
'사실 가장 좋은 건 둘 다 표절하지 않은 건데.'
사전에 합의를 본 상태로 제작에 들어간다면 별말 없이 잘 끝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그렇게 될 가능성이 가장 낮았다. 이걸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이다.
수한은 초조하게 안에서 기다리다가 유난히 체구가 작아 보이는 여자 하나를 발견했다. 편한 후드 차림에 얼굴의 반을 가린 안경이 보이면서 왠지 여자가 신경 쓰였다. 수한은 그대로 작가로 저장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얼마 안 가 여자로부터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저 사람이군.'
수한은 거리낌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의 앞으로 걸어갔다. 갑작스러운 수한의 움직임에 당황한 여자의 눈동자가 보이면서 수한은 해가 없는 얼굴로 웃었다.
"안녕하세요. 가온 엔터테인먼트에서 나온 김수한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유지아예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유지아 작가는 허리를 바짝 숙이며 인사를 건네 수한을 당황스럽게 했다. 수한은 마찬가지로 꾸벅 숙이며 인사를 한 뒤 유지아 작가를 자리로 안내했다.
"일단 작품부터 보시죠."
만나기 전에 비슷하다는 이야기만 했지, 어느 정도 비슷한지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한은 이 자리에서 글을 읽어 보게 했다. 작가 당사자가 읽어도 비슷하다면 이건 확실한 문제였다. 수한은 그러면서도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은 유지아 작가를 발견해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습니까?"
"아니요. 물이면 괜찮아요."
수한은 계산대로 가서 물 두 잔을 시킨 후 금방 나온 물을 받아 하나는 유지아 작가의 자리에, 하나는 자신의 자리에 두었다. 수한이 물을 한 모금 마시는 동안 유지아 작가는 집중해서 읽었다.
로맨스 연대기를 읽으면 읽을수록 유지아 작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에 수한은 역시나 했다.
'이쪽이 표절당했군.'
유지아 작가가 연예인이 아닌지라 눈으로 연기력 수치를 확인하지 못하지만, 유지아 작가는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는 편이었다. 도저히 연기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얼굴이라 수한은 거의 확신에 찼다. 표절한 작가는 이 사람이 아니다.
유지아 작가는 끝까지 다 읽어 본 후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너무 화가 나네요."
처음 봤을 때의 소극적인 태도는 사라지고, 그녀의 눈동자에선 거센 분노만이 느껴졌다.
"표절을 확신하십니까?"
"네. 제 작품을 보지 않았으면 이런 게 나올 리가 없어요. 특히 이 부분이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테이블 위에 쥔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수한은 잠시만 기다리라 하고, 구석으로 가 성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동안 유지아 작가는 수한이 가져다 놓은 찬물을 연신 들이켰다.
수한은 성민도 대본을 보여 줬을 테니 로맨스 연대기 작가의 반응을 봤을 거라 예측하였다. 얼마 안 가 성민이 전화를 받았다. 성민도 구석으로 가 전화를 받았는지 조심스러움이 목소리에 없었다.
[어! 이야기해 봤어?]
"네. 아무래도 표절 작가는……."
[그쪽이지?]
"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응? 아니야?]
수한은 순간 당황해서 머리가 새하얘졌다. 어떻게 하면 이런 결론이 나오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하나였다.
"그쪽도 화를 냈습니까?"
[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화내던데?]
"연기 같아 보이지는 않았고요?"
[전혀. 애초에 연기를 잘하는 타입으로도 보이지 않아서. 근데 그쪽도 그래?]
누군가 한 명은 거짓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수한은 유지아 작가를 봤다. 그녀는 변함없이 분노의 얼굴을 보였다.
"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네요."
[그래. 둘을 만나게 해야지.]
"제가 차를 가지고 있으니 그쪽으로 이동하겠습니다."
[그래. 그동안 차분히 대화할 수 있게 작가님을 달래고 있을게.]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수한은 생각이 많아졌다. 이를 정말로 우연의 일치로 볼 수 있는가? 두 사람이 서로의 작품을 보지 않고 이토록 비슷한 생각을 한다고? 물론 작품의 질은 다르지만, 그래도 비슷한 건 비슷한 거였다.
"작가님."
"네?"
"저와 함께 이동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유지아 작가는 여전히 붉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일어난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수한이 운전대를 잡자 옆에 탄 유지아 작가가 안전띠를 꽉 붙잡았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많은 생각을 하는 게 보였다. 분노했다가 불안해했다가 해탈했다가. 다양한 감정이 내비쳐졌다.
'아무리 봐도 저게 연기로는 안 보이는데.'
수한은 운전하다가 문득 명훈을 떠올렸다. 하긴 명훈만 해도 좋은 형의 얼굴로 수한의 뒤통수를 때렸다. 수한은 너무 맹목적으로 사람을 믿지 않기로 했다. 게다가 유지아 작가는 그도 오늘 처음 본 사람이다.
'거짓말 탐지기 기능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이미 사기적인 눈을 가졌으나, 수한은 괜한 욕심을 부려 봤다. 물론 농담처럼 가진 욕심이었다. 수한이 유지아 작가를 쳐다보자 시무룩한 얼굴이 보였다. 역시 농담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수한이 유지아 작가를 데리고 성민이 있는 카페로 들어가자마자 싸늘한 공기가 나돌았다. 굳이 서로 소개를 하지 않아도 서로를 알아봤는지 분노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카페에서 따뜻한 감성을 지닌 소원의 노래가 나와도 이 분위기는 희석되지 않았다.
그 순간, 성민이 나섰다. 성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작가의 시야를 막았다.
"안녕하세요. 이성민 실장입니다."
"유지아입니다."
성민이 내민 손을 유지아 작가가 얼떨결에 붙잡았다. 그동안 수한은 '로맨스 연대기' 작가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김수한입니다."
"최민희예요."
소심한 기운이 돌던 유지아 작가와 다르게 최민희 작가는 새침하면서도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어딘가 예진을 떠오르게 하는 높은 자존감이 보였다. 옷도 정장 차림으로 입고 와서 더 그래 보이기도 했다. 물론 최민희 작가도 유지아 작가와 비슷하게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아마 비슷하게 분노로 붉어진 게 아닌가 싶었다.
"일단 앉으시죠."
성민이 권하자 두 작가가 정면으로 앉게 되었다. 서로가 전혀 꿀림이 없어 보여 수한은 혼란스러웠다. 두 사람의 태도만 보면 두 사람 다 표절 작가가 아니었다.
'정말 우연의 일치라고?'
그사이에 성민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두 작가님 다 서로의 작품을 읽으신 거로 아는데 두 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표절이라 생각해요."
"표절이에요."
말이 서로 겹쳤지만, 생각하는 건 같았다. 그래서 성민과 수한 모두가 곤란해졌다. 성민은 중재자로 온 거였기 때문에 나름대로 말을 정리해서 했다.
"제가 지난번에 집필 시기를 여쭤 봤는데 두 분 다 작년으로 시기가 비슷하시더라고요."
"어떻게 제 작품을 본 건지는 모르겠지만, 전 표절이라 확신해요."
최민희 작가의 당당한 말에 유지아 작가의 얼굴이 당장에라도 터질 것처럼 더 빨개졌다. 처음에는 분노로 인한 것이라 생각했으나, 최민희 작가의 당당한 태도에 설마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유지아 작가도 그런 오해를 살까 염려했는지 재빠르게 말했다.
"아니에요. 표절한 건 저쪽이에요. 제가 아니에요."
수한은 주먹을 꽉 쥔 유지아 작가를 발견했다. 분해 죽겠다는 표정이 진심으로 보여 헷갈렸다. 성민은 곤란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두 분 다 우연의 일치로는 보지 않는 거죠?"
"네."
"물론이죠."
서로가 단호해도 너무 단호했다. 수한이 성민을 쳐다보자 성민도 헷갈리는지 눈동자가 여러 번 돌아갔다. 이래서는 합의점을 찾기는커녕 누가 진짜인지 싸우게 생겼다. 그 순간, 최민희 작가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무언가 생각난 모양이었다.
"저 실은 말한 시기보다 더 이전에 이 작품을 쓴 적이 있어요."
"그게 정말입니까?"
최민희 작가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더니 한 커뮤니티 카페를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작년보다 더 오래인 재작년에 적힌 글이 등록되어 있었다. 그 글의 제목은 '연애의 역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