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 6. 평범하지 않은 일상
메리블랙은 무대를 잘하는 편이었다. 건성건성 추는 것 같아도 각이 딱딱 맞는 게 팬들 시점에서 본다면 굉장히 멋있게 보이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음악까지 웅장하게 깔아 주니 멋있는 퍼포먼스가 그려졌다.
'남자 아이돌은 이런 맛으로 좋아하는구나.'
외모로 따진다면 배우 쪽이 훨씬 나았기에 수한은 남자 아이돌을 좋아하는 여자 팬들을 살짝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 무대를 보면서 이해하게 되었다. 신인일수록 더 춤의 각이 맞아서 멋있었다. 솔직히 말해 남자 아이돌의 퍼포먼스에 반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수한은 그가 키우고 싶은 연예인 직업군에 남자 아이돌도 넣기로 했다.
'하긴 가온 엔터테인먼트가 대형 기획사가 되는 데 한몫한 게 남자 아이돌이니까.'
나중에 제대로 기획해서 키우면 재미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때까지 이 회사에 있을지는 수한도 의문이라서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메리블랙 팬들을 지켜봤다. 멤버 이름 하나 틀리지 않고, 특정 구간에 제대로 소리를 질렀다.
'저게 응원법이구나. 대단하다.'
아이돌 그룹은 가수와 다르게 노래 사이에 팬들이 따라 할 수 있는 응원법이 있다. 아이돌 가수의 이름이라거나 특유의 구호 같은 걸 음악의 빈 곳에 채우는 방식이었다. 아니면 후렴 부분을 함께 부른다든가.
맨 처음에는 팬들이 알아서 만들어 외쳤지만, 기획사를 비하하는 내용이 담기면서 기획사에서 직접 응원법을 만들어 팬들에게 나눠 주게 되었다고 한다.
메리블랙은 무대를 총 세 번 했다. 처음에는 목소리만 따고, 그다음에는 춤만 췄다. 마지막에는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렀다.
'라이브인 것 같으면서도 라이브가 아니네.'
무대를 마친 메리블랙은 마이크가 꺼진 것을 확인한 뒤 내려가면서 자기들끼리 속닥거렸다.
"웃겨 죽는 줄 알았네."
"저 오글거리는 걸 왜 저렇게 열심히 해?"
그 대화를 이해 못 하고 수한이 어리둥절하게 서 있자 옆에 있던 임호경 PD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것처럼 말하였다.
"저거 응원법 말하는 거예요. 응원법 오글거린다고요."
"응원법이요?"
수한은 살짝 충격받았다. 솔직히 수한은 그 열정적인 모습을 보고 감동했다. 그러나 그걸 보고 저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다. 물론 삼자의 측면에서 볼 때는 오글거릴 수 있는 문구들이긴 했지만, 그 응원을 받는 대상이 그리 생각한다니 충격이었다.
"저런 게 팬들 귀에 들어가야 하는데 마이크 확인까지 철저히 하고 가는 거 봐 봐요."
다른 매니저를 통해서도 듣긴 했지만, 메리블랙은 스태프들 사이에서도 평이 나쁜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섭외하는 이유는 인기가 많아서였다. 들어 보니 오늘 1위도 메리블랙이라고 한다.
'기분이 참 이상하네.'
스윗걸즈를 음악 방송에 내보낼 때만 해도 갑질을 당하는 건 기획사와 가수였다. 신인이었고, 인지도가 없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름값이 생기면 갑과 을이 바뀌었다.
밑에서부터 올라온 연예인들은 특히나 그 차이를 기억한다고 한다. 방송가가 얼마나 자본 위주로 돌아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조금 있다가 본방송 시작하면 무대 위에 서긴 할 거예요."
"네, 알고 있습니다."
"사전 녹화한 내용이 나가긴 할 거지만, 알아 두시라고요."
굳이 아는 내용을 또 한 번 친절하게 이야기해 주는 이유는 역시 이태욱 PD 때문이었다. 수한은 감사하다고 인사를 한 뒤 소원이 있는 대기실로 돌아갔다. 대기실로 가자 아까 인사했던 다른 아이돌 그룹 멤버가 소원과 함께 있었다.
"오빠, 오셨어요?"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십니까?"
슬슬 점심시간이었다. 현장을 둘러보니 배달해서 먹는 곳이 많다고 하였다. 그러나 소원은 고개를 저으며 점심을 거절하였다.
"오랜만에 나와서 그런지 너무 긴장했나 봐요. 별로 음식 생각이 없어요. 아! 죽은 좋아요. 죽은 소화 잘 될 것 같아요."
안 그래도 죽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수한은 깜짝 놀랐다. 수한이 어떻게 알았냐고 쳐다보자 소원이 웃으면서 말했다.
"예진 언니가 말해 줬거든요."
대체 어디까지 소원에게 말해 준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수한이 예진에게 못한 건 아니니까 수한이 꺼릴 필요가 없었다.
"그럼 죽 사 오겠습니다."
"감사해요. 오빠."
"아닙니다."
소원은 예진만큼이나 죽을 잘 먹었다. 처음에 남길 것 같다고 소원이 죽 1인분을 말끔하게 해치우자 수한은 뿌듯하게 웃었다.
수한은 대기실에서 대기하는 동안,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각 매니저와 친분을 쌓으면서 연예계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같이 못마땅해하는 사실에 수한 또한 공감했다. 그건 오늘 1위가 메리블랙이라는 것이었다.
"이번 주 1위는 메리블랙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수한은 차게 식은 눈으로 이번 주 1위 상을 받는 메리블랙을 지켜봤다. 수한이 고개를 살짝 돌리자 구석에서 손뼉을 치는 소원이 보였다. 메리블랙이 소원을 무시한 것과 별개로 소원은 진심으로 축하했다. 수한은 소원이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소원을 챙겼다.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빠도요."
"오랜만에 음악 방송에 참여해 보니까 어떻습니까?"
"좋았어요."
소원의 눈앞에 응원하는 팬들이 그려지는 듯싶었다. 수한은 다음 주 일정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저, 예능은 안 나가요?"
"네. 회사에서도 신중하게 고민해 봤는데 안 나가는 거로 결정했습니다."
보통 노래 홍보를 하기 위해서 예능 프로그램에 내보내는 거였다. 소원은 오늘도 음원 순위 1위를 차지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예능 프로그램에 굳이 나갈 필요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메리블랙은 몇 위를 하는지 모르겠네.'
수한은 음원 순위를 보다가 메리블랙의 순위를 보고 웃었다. 메리블랙은 50위권 밖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그리 대한 걸지도 모르겠군.'
오늘 1위 상을 받는 것도 팬들이 팔아 준 앨범 때문이라고 하였다. 수한은 생각보다 더 쉽게 다음 주 상을 빼앗아 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예능은 다음 앨범 때 나가는 게 어떻습니까?"
"좋아요. 내일 있을 방송이랑 팬 사인회 생각만 할래요."
"좋은 생각입니다."
수한이 칭찬하자 소원이 따뜻하게 웃었다. 그 따뜻함이 수한은 팬들에게도 전달되기를 바랐다.
***
"저 이상하지 않아요?"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몇 번을 말해도 소원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 같지만, 그래도 수한은 여러 번 말해 주었다. 소원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귀엽게 예뻐서 눈이 자꾸 갔다.
"지금 안에 기다리고 있어요?"
"네, 백 명 꽉 찼다고 합니다."
백 명이라는 말에 소원의 안색이 더 하얘졌다. 수한은 진정하라는 의미로 소원의 어깨를 잡은 채 시선을 마주했다. 눈이 마주치자 흔들렸던 소원의 시선이 그제야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반대로 뺨은 붉어져서 수한은 살짝 민망한 상태로 물러섰다.
"이제 나가도 된다고 합니다."
"네. 오빠."
대기실에 있다가 천천히 나가니 팬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백 명인데도 일당백을 하는 것처럼 큰 목소리였다. 소원은 강단 위에 홀로 놓인 책상과 의자에 미소를 지었다. 이런 식으로 혼자 팬 사인회를 하는 건 처음이라 어색했다.
책상 위에는 사인할 펜과 목을 축일 물이 함께 있었다. 물병에 꽂힌 빨대에 소원은 물 한 모금 마시고 준비됐다는 신호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수한은 팬들이 건네주는 선물을 받아서 상자에 놓는 역할을 했다. 선물은 편지부터 시작해서 인형까지 다양하게 들어왔다. 소원은 어느 선물을 받든 똑같이 감사해 하며 악수를 했다. 요즘 열심히 손 관리를 하더니 직접 팬의 손을 잡고 싶어서였나 보다.
'생각보다 성비가 비슷하네.'
드림즈만 해도 여자 팬보다는 남자 팬이 월등하게 많았던 거로 알아서 신기했다. 이번 앨범으로 팬이 된 여자 팬이 많은 모양이었다. 물론 팬 사인회에 당첨된 사람 중에 일반인도 꽤 있었다. 응원하는 마음으로 사서 당첨된 사람들이었다.
"안녕하세요,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수한은 여자 팬이 주는 화관을 보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소원을 발견했다. 그래서 주저 없이 앞으로 나가서 화관을 소원의 머리에 씌웠다. 이런 일을 대비해서 다른 아이돌 팬 사인회 현장을 공부한 게 있었다. 그러자 팬석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수한은 그 환호성이 잘했다는 칭찬이라는 걸 알아서 씩 웃었다.
"저 괜찮아요?"
소원이 여자 팬에게 묻자 여자 팬이 넋 나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원은 고맙다며 인사를 하고 마지막으로 악수를 청하였다. 보기만 해도 매우 훈훈한 광경이었다.
"저기 장미요!"
수한은 떨리는 남자 팬의 손을 보고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떨어도 너무 떨어서 웃겼다. 소원은 그 모습이 웃겼는지 환하게 웃으면서 장미를 받았다.
수한은 그 장미의 모양새를 보고 소원을 살짝 건드렸다. 소원이 고개를 돌리자 수한이 장미를 입술 근처에 가져갔다. 소원도 의미를 알았는지 장미를 입술로 물었다.
"와."
수한은 자신을 향해 엄지를 척 드는 남자 팬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 남자 팬뿐만이 아니라 그 현장에 있는 팬들은 모두 수한을 향해 엄지를 들었다. 그래도 다음 순서에는 말을 해야 했기에 얼마 안 가 소원에게 금세 장미를 받아 선물 상자 안에 넣었다.
수한은 다음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소원에게 다가오기도 전에 울컥한 여자 팬을 발견했다. 소원도 방금 발견했는지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안녕하세요, 이름이 김지현 님?"
소원은 이름을 보고 팬을 알아봤는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소원의 앞에 서자 눈물을 왈칵 쏟아내는 게 범상치 않아 수한은 근처에 있던 관계자를 통해 휴지를 가져오게 했다. 그러나 휴지는 팬과 소원 둘 다 사용하게 되었다.
"오랜만이에요."
소원의 인사로 수한은 저 팬이 드림즈 시절부터 함께 해온 팬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소원이 울기 시작하자 팬 석에서도 함께 공감하는 사람들도 눈물을 조용히 훌쩍였다. 소원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와 주셔서 감사해요."
"아니에요. 저야말로 살아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그 말이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팬들에게도 들려서 함께 눈물을 훔쳤다. 소원은 자꾸만 나오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어서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우는 팬에게 다가가 안아주었다.
"저야말로 감사해요. 잊지 않아 줘서."
수한까지 눈가에 눈물이 살짝 고였다. 원래 이렇게 감정적인 사람이 아닌데 소원과 함께 있으면 이렇게 된다. 수한은 등을 돌려 눈물을 닦아 낸 뒤 충분히 시간을 준 뒤 팬을 내려보냈다. 그러나 이미 한번 눈물이 터져서인지 오는 팬마다 눈물을 흘려서 순식간에 팬 사인회장이 눈물바다가 되었다.
'그래도 이 눈물이 힘이 되는 것 같네.'
아까 긴장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소원이 환하게 웃었다. 수한은 팬 사인회 일정을 조금 더 잡기로 했다. 소원에게는 이런 시간이 더 필요했다.
수한은 그러면서도 들고 오는 모자라든가, 머리띠라든가 다 소원에게 씌웠다. 하나같이 반응이 좋은지라 수한은 앞으로 소원의 머리 스타일도 더 신경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소원의 팬 사인회 후기에는 눈물바다와 함께 센스 있는 매니저 수한의 이야기가 꾸준히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