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 6. 평범하지 않은 일상
"제 팬들이 와 있다고요?"
최대한 청순하게 해 달라는 요구에 맞춰서 소원에게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혔다. 인터뷰 때에 비하면 무대 화장이기 때문에 짙게 하긴 했지만, 청순미가 돋보였다. 그러면서도 아이돌다움을 놓치지 않아서 수한은 새삼 신기해했다. 고주혁 때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네, 그렇습니다. 원하시면 잠깐 나가서 인사하셔도 됩니다."
아직 무대를 설치 중이기 때문에 시간은 있었다. 그러나 소원은 고개를 저었다. 소원의 표정에서 왠지 모를 두려움이 느껴졌다. 지난번에 학교에서 본 여학생들처럼 소원을 원망하는 팬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두려움이었다.
소원은 외부 사람들에게도 원망을 받았지만, 팬들에게도 원망을 받았다. 홀로 살아남은 것에 대한 대가는 생각보다 더 참혹했다.
"소원 씨, 잊지 않으셨죠?"
"네? 네."
수한이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소원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가장 가까운 그녀의 팬이 바로 앞에 있으니 무서워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제 나가셔도 됩니다."
"네, 잠시만요."
수한은 나가기 전에 소원이 숨을 여러 번 쉴 수 있게 시간을 벌었다. 소원은 수한의 호흡에 맞춰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고는 안내에 따라 밖으로 나갔다. 소원이 모습을 보이기가 무섭게 환호성 소리가 들렸다. SSS급 슈퍼스타에서 들었던 소리와 크기는 달랐지만, 가진 열정은 비슷해 보였다.
"안녕하세요."
소원은 하나같이 반가워하는 반응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함박웃음을 보이며 팬들에게 인사했다. 그 웃음이 예뻐서 그런지 환호성 소리가 더 커졌다. 소원은 스태프에게 건네받은 마이크를 톡톡 두드리며 목소리가 잘 나오는지 확인하였다.
"일단 한번 불러 볼게요."
"네."
소원이 긴장한 표정을 짓자 서 있던 팬들도 마찬가지로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첫 솔로 활동이다 보니 팬들도 함께 긴장했다. 수한은 왠지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다가 들려오는 소원의 목소리를 조용히 감상했다.
'목소리가 좋네.'
소원의 노래는 소원이 소화할 수 있는 수준에 노래들로 준비하였다. 자신의 노래 실력은 소원이 가장 잘 알아서 자기가 낼 수 있는 음역에서 최선을 다했다.
"모니터 확인할게요."
"네!"
임호경 PD의 말에 아래로 내려가 모니터링을 하니 시선 처리가 조금 불안했다. 원래 아이돌은 카메라를 잡아먹어야 하는 직업이라 했다. 그러나 긴장해서인지 소원은 아직은 부족한 감이 있었다.
"소원 씨, 우리 다시 올라가기 전에 어딜 봐야 할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가시죠."
"네, 알겠어요. 오빠."
수한의 말에 소원은 카메라 위치를 다시 확인했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겠다는 다짐마저 얼굴에 보여서 귀여웠다.
"그럼 다시 가서 해 봅시다."
"네!"
소원이 다시 무대 위에 올라가자 팬들의 환호성 소리가 들렸다. 잠깐 음향을 확인하는 동안 소원은 어색하게 팬들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 눈빛에서는 애정이 가득해서 팬들도 큰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혼자라도 이렇게 나와 줘서 고맙다는 얼굴들이었다.
'팬들이 대단하기는 하네.'
고주혁 때도 느꼈지만, 소원을 응원하는 팬들을 보고 있자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수한은 뭉클한 감정에 잠시 팬들에게 시선을 빼앗겼다가 다시 시작되는 녹음에 소원의 모습을 열심히 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선 처리가 불안했던 소원은 어느새 자신을 잡는 카메라의 위치에 맞춰 시선을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노래는 잘 불러서 수한을 감탄하게 했다. 수한은 이만하면 됐다는 임호경 PD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가서 대기하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쉬워하는 팬들이 보였다. 소원도 마음 같아서는 무대에서 내려가 와 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현장이 매우 급하게 돌아가는 만큼 그럴 수 없었다. 소원이 열심히 인사를 하고 들어가자 발 빠르게 스튜디오를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따로 만날 수는 없겠죠?"
"네, 소원 씨의 안전을 위해서요."
아직은 팬들이 안전하다는 확신을 갖지 못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겁 없이 팬들에게 다가가는 고주혁이 이상한 거다.
'아직 안티팬을 겪어 보지 못해서 그런 것 같지만.'
SSS급 슈퍼스타와 맞물려서 수한이 안전하게 닦아 놓은 길 때문에 고주혁은 아직 그런 경험이 없었다.
"본방송 때까지 이렇게 기다려야 하죠?"
"네. 하지만 저와 따로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수한이 가지고 온 캠코더를 들이대자 소원은 무슨 의미인지 깨닫고 웃었다. 따로 찾아가서 인사를 할 수는 없으니 영상으로라도 감사 인사를 전하라는 거였다.
"오빠, 진짜 제 팬 맞나 봐요."
"그럼 아닌 줄 아셨습니까?"
물론 처음에는 거짓말을 한 거였지만, 지금은 정말로 소원의 팬이었다. 소원은 수한이 캠코더를 켜기가 무섭게 미리 준비해 온 사람처럼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소원입니다. 오늘 첫 방송인데요. 굉장히 떨렸음에도 불구하고, 저를 응원해 주시는 팬분들 덕분에 잘 소화해 냈어요. 정말 감사드려요. 앞으로 더 열심히 하는 소원이 되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형식적이었지만, 그런 소원을 정면으로 본 수한은 그 모든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소원의 팬이라면 그 진심을 알아 줄 거라 수한은 믿었다.
수한이 캠코더를 집어넣자 소원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본방송과 별개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소원입니다."
소원은 막 발매한 따끈따끈한 앨범을 가지고 돌아다녔다. 물론 그 앨범 안에는 사인과 함께 짧은 편지글을 썼다. 소원이 인사한 사람 중에는 신인도 있었고, 선배도 있었다. 수한은 오늘 나오는 가수 명단을 미리 받아 봤기 때문에 소원이 인사를 하면 뒤에서 앨범을 챙겨 주는 역할을 했다.
"잠시만요."
일단 대기실 명패를 먼저 보게 되었다. 메리블랙. 어느 정도 팬을 가진 남자 아이돌 그룹이었다. 수한이 매니저 일을 할 때도 존재했던 남자 아이돌이다. 해외 투어도 돌 정도였으니 탑 급은 아니어도 잘 나가는 아이돌 그룹이었다. 수한은 문을 두드리려다가 명패를 보고 멈칫하는 소원을 발견했다.
"저, 혹시 아는 사이입니까?"
이제까지 만난 가수들은 웬만해서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기에 수한은 살짝 반가워했다. 소원은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으나, 표정이 좋지는 않았다.
"이 사람들은 건너뛸까요?"
"아니에요. 평생 안 볼 수는 없잖아요."
사이가 좋지 않은 건 확실해 보여 수한은 경계하기로 했다. 수한이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수한은 소원이 들어가기 전에 먼저 안으로 들어가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가온 엔터테인먼트 김수한입니다. 소원 씨가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해서요."
누가 남자 아이돌 그룹 아니랄까 봐 검정 계통에 화려하면서도 반짝이는 옷을 입은 남자들이 보였다. 무대 화장을 해 놓은 상태였기에 인상이 진하게 보였으나, 하나같이 잘생겼다. 그러나 소원이라는 이름에 그들이 하나같이 인상을 찌푸려 수한은 의아해했다.
"안녕하세요, 소원입니다."
소원이 인사를 건네자 몇몇은 어색하게 인사를 받아 주었고, 몇몇은 대놓고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가 무언가 탁 떨어지는 소리에 수한의 고개가 돌아갔다. 소원의 앨범이 떨어졌다. 그 순간, 수한은 앨범을 밟는 검정 구두에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어이쿠, 실수."
"세형아, 잘 좀 보고 다니지 그랬어."
"난 쓰레기 밟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세형이 비꼬기 시작을 하자 비웃음이 가득해졌다. 그 안에서 안색이 하얗게 질린 소원의 모습에 수한은 재빠르게 앨범을 주워 털어 냈다. 그리고 그 앨범을 세형에게 건네주었다. 거의 강제적으로 받은 덕분에 세형의 인상이 구겨졌다.
"쓰레기 아니고, 소원 씨의 앨범입니다. 이 앨범의 가치는 굳이 당신이 알 필요는 없지만, 대중은 알아주겠죠."
수한이 그 말을 하고 소원에게 가자고 손짓을 하자 소원이 먼저 나갔다. 안에서는 저 자식 뭐냐고 욕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런 소리는 수한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무조건 소원이 우선이었다.
"원하시면 대기실로 가셔도 됩니다. 나머지는 제가 돌리겠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할게요. 이런 일은 저도 할 수 있어요."
의지로 빛나는 소원의 눈빛에 수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원이 하고 싶다는데 말리고 싶지 않았다. 다만 메리블랙이라는 명패를 다시 한번 볼 뿐이었다. 소원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두고 봐야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소원은 말한 대로 말끔하게 다 돌았다. 다행히 남은 가수 중에는 소원과 친분이 있던 걸그룹도 있어서 위로도 받았다. 소원이 대기실로 돌아오자 수한은 보온병을 흔들고는 그 안에 있는 차를 건네주었다.
"고생하셨어요."
"고생은 무슨요. 오빠에 비하면 전 아무것도 안 한걸요."
"그래도 고생하셨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통한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싶을 정도로 뭉클한 감정이 들었다. 그러나 메리블랙에 대해서는 들을 필요가 있었다.
"메리블랙에 드림즈 멤버 중 한 명이랑 사귄 사람이 있어요."
"아! 그렇군요."
눈치를 보니 누구인지는 밝힐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고인에 대한 예의로 그런 것 같아 수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원의 말을 계속해서 들었다.
"그게 소문이 잘못 돌아서 저로 오해한 팬들도 있는데 아무튼 둘의 연애가 잘 안 됐어요. 그거로만 끝나면 괜찮았는데 그쪽에서 앙심을 품은 모양이에요. 무슨 오해를 한 건지는 몰라도 바람을 피워서 헤어졌다고 생각한 건지 멤버에 대해 나쁜 소문을 내기 시작했어요. 그게 돌고 돌아서 저희 드림즈 전체가 남자들을 가지고 논다는 이상한 소문으로 부풀었죠. 당연히 저희는 억울해서 헤어진 이유에 대해 친한 사람들에게 말했는데 그걸로 사이가 완전히 나빠졌어요."
수한은 황당해서 말이 안 나왔다. 그걸로 아직도 꽁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더군다나 소원에게는 큰일이 있었는데 그런 게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고 불쌍하게 봐 달라는 말은 아니지만…….'
수한은 그 거만한 얼굴들이 떠올라 불쾌감이 먼저 들었다. 그들에 대해서 다른 방향으로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저, 잠시만 나갔다 오겠습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 주세요."
"네, 오빠."
수한은 자연스럽게 잠시 나와 있는 다른 기획사의 매니저에게 접근했다. 대기실을 돌아다니면서 서로 인사를 했기에 안면은 튼 상태였다.
"서로 고생이 많네요."
하나같이 눈이 퀭한 게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한 얼굴들이었다. 수한은 가지고 온 비타민 음료를 내밀면서 친근하게 굴었다. 대충 방송사 갑질에 관해서 이야기하다 보니 금세 친해졌다.
"그러고 보니 메리블랙 친구들이 조금 까칠하던데 오늘 기분이 안 좋은가 봐요?"
"아! 걔들 지금 스타병 제대로 걸렸어요. 늘 싸가지 없으니까 굳이 접근할 필요 없어요."
"그렇습니까?"
인제 보니 소원에게만 그런 게 아니었다. 갈수록 말이 많아지는 매니저에 수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다가 눈을 반짝였다.
"다음 주 상도 자기들이 받을 거라 확신하던데 누가 그 상을 콱 물어갔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