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평범하지 않은 일상 >
"안녕하세요. 고주혁이라 합니다."
수한의 주도하에 인사가 이루어졌다. 고주혁은 만나는 사람마다 다 친근하게 자신을 대해줘서 기뻤다. 고주혁은 수한이 말한 대로 사람마다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그러다가 예진의 앞에 섰을 때 긴장하게 되었다.
"반가워요. 성예진이에요."
"네. 고주혁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굳이 잘 부탁할 필요는 없고."
고주혁이 수한의 눈치를 보자 수한은 괜찮다는 듯이 웃어주었다. 주변 반응을 보니 평온한 게 늘 이런 모양이었다. 예진과 다르게 시은은 반갑게 고주혁을 맞이해주었다.
"오늘 부탁드려요."
"네. 선배님. 잘 부탁드립니다."
각자 대기 공간이 따로 있지만, 시은과 예진은 함께 있었다. 예진은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보였지만, 시은은 개의치 않고 순돌이와 놀았다. 이런 광경을 처음 보는 고주혁은 이대로 괜찮은가 많은 생각이 들었다.
"청심환 드릴까요?"
수한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고주혁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당연히 수한은 깜짝 놀랐다.
"진짜로 드려요?"
"네. 주세요."
혹시 몰라서 하나 준비해오길 잘했다. 수한은 가방 안에서 청심환을 꺼낸 뒤 고주혁에게 건네주었다. 고주혁은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청심환을 입안에 넣었다. 경연 때도 안 먹은 것을 지금 먹은 거로 보아서 예진이 대단한 역할을 하였다.
"생각한 것보다 까칠하죠?"
"네. 그렇네요."
"친해지면 좋은 분이에요."
그 친해지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수한의 생각은 그랬다. 시간이 지나도 고주혁을 대하는 예진의 태도는 크게 바뀐 게 없었다. 그래도 카메라 안에 담길 때는 조금 친근하게 대했는데 쉬는 시간만 되면 찬 바람이 불었다. 그녀와 다르게 순돌이는 고주혁을 좋아했지만 말이다.
고주혁이 순돌이와 놀고 있자 시은이 옆으로 다가왔다. 고주혁이 거의 허리를 접을 것처럼 인사하자 시은이 피식 웃으면서 예진이 있는 쪽을 보며 말했다.
"그냥 언니가 질투가 많아서 그래요."
"네?"
"수한 오빠가 고주혁 씨만 챙기니까. 질투하는 거라고요."
"네?"
고주혁이 이해 안 간다는 표정을 짓자 시은이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매니저 하나로 저렇게 질투를 한다고? 고주혁은 어느새 친근하게 수한에게 다가간 예진을 발견하고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여전히 예진은 강아지 옷 사진을 수한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저도 솔직히 언니가 수한 오빠 독점할 때 질투 좀 했는데 언니는 모르더라고요. 워낙 자기만 아는 사람이라서 그런가?"
까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애정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고주혁은 만약 수한이 자신의 손을 놓고 이지훈에게 가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리 생각하자 예진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오늘만 그럴 거니까 잘 참으라고 얘기해주는 거예요. 욱해서 사고 칠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조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아니에요. 그럼 남은 촬영 즐겁게 하자고요."
예진에게 붙잡혔던 수한이 어느새 다시 고주혁에게 왔다. 멀리서 다시 한 번 노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예진이 조언한 보람이 있게 고주혁은 괜찮아졌다. 오히려 수한을 독점하고 있는 이때를 즐기기로 했다. 그 즐김이 화면 속에서도 전해진 건지 그날 시청률은 눈에 띄게 상승하였다.
**
수한은 신중한 얼굴로 마우스를 움직였다. 누가 보면 별일 아니라고 하지만, 수한에게는 별일이었다. 수한은 '한소원'이라는 이름으로 검색되는 내용을 찾아보았다.
'모호하네.'
초반에는 자세한 상황을 몰라서 비판을 가장한 악플이 달린 글이 있었고, 어떤 글은 소원을 동정하는 글이 있었다. 최근으로 올수록 줄어든 언급에 수한은 턱을 매만졌다. 그래도 최근 글일수록 소원을 동정하는 글이 훨씬 많았다. 다만 날짜에 비례하여 댓글 등 반응은 저조했다.
"아무래도 지금 시기가 좋겠죠?"
"그렇지. 너무 오래 가면 대중에게 잊힐 테니까. 불쌍한 것도 한두 번이지. 대중은 처음 자극에만 민감하게 구니까."
냉정하게도 그랬다. 수한은 씁쓸한 미소가 나왔다. 그래도 이 말을 성민과 둘이 해서 다행이었다. 만약 소원이 듣는다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곡은 준비됐어?"
"녹음해야 합니다."
"그러면 미리 말해둬. 스튜디오는 내가 따로 섭외할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SSS급 슈퍼스타 이후로 얼굴을 통 못 봤기에 수한은 소원과 직접 얼굴을 보기로 했다. 물론 매운맛을 꾸준히 단련해두었기에 지금은 매운 음식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 수한은 소원과 약속한 시각을 확인하고, 다시 소원에 대한 반응을 살피다가 이상한 글을 하나 발견했다.
- 나 오늘 보육원 봉사 활동 갔다가 한소원 비슷하게 생긴 사람 봄!
ㄴ 비슷한 사람이겠지.
ㄴ 한소원 솔직히 연예인치고 흔한 얼굴임. 비슷한 사람일 거임ㅇㅇ
수한은 마지막 댓글을 보고 괜히 울컥했지만, 냉정하게 본다면 소원은 연예인 중에서도 예쁜 축에 못 속했다. 매력 있는 얼굴까지는 맞지만. 그러나 일반인과 비교하면 달랐다. 일반인과 함께 걸어가면 자신도 모르게 뒤돌아서 보게 되는 게 소원의 얼굴이었다.
'그보다 봉사 활동이라고?'
소원에게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없기에 수한은 의아해하면서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다. 소원의 성품이라면 봉사 활동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니까. 수한은 오늘 만나게 되면 물어보기로 했다. 물론 가기 전에 매운맛으로 유명한 맛집을 검색해보고 가는 건 필수였다.
"안녕하세요."
"얼굴이 좋아 보입니다."
"그래요?"
소원은 어색하게 인사를 하면서도 주변을 살폈다. 오늘은 사람이 없는 카페에서 만났다. 자주 오던 장소지만, 소원은 모자를 쓰고 나오는 걸 잊지 않았다. 수한은 소원에게 메뉴를 물어본 뒤 커피를 가지고 소원의 앞에 앉았다.
"저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습니다."
"네? 뭔데요?"
"요즘 봉사 활동하고 다니시나요?"
수한은 어떻게 알았냐는 듯 깜짝 놀라는 소원의 반응에 웃었다. 수한이 인터넷에서 목격담 이야기를 하자 소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멤버들 생각이 날 때 가서 봉사 활동하고 와요."
요즘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 싶었더니 그래서였나 보다. 수한은 어떻게서든 우울한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소원의 모습에 감동하였다. 게다가 그 감정을 안 좋은 방법이 아닌 좋은 방법으로 풀어내니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었다.
"다음에 갈 때는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매니저님도요?"
"네. 혼자 가는 것보다 둘이 가는 게 더 낫지 않습니까?"
"좋아요. 그럼 날짜 맞춰서 같이 가요. 애들이 보면 좋아할 거예요."
벌써 친해진 아이들이 있는지 소원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수한은 왠지 모르게 그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져서 흐뭇하게 웃었다. 누군가 성공을 해야 한다면 이런 사람이 성공했으면 좋겠다. 수한의 개인적인 바람이었다.
"제가 지난번에 연락드렸죠?"
"네. 앨범 준비를 했으면 한다고 하셨죠."
이번 달이면 지금 있는 기획사와 계약이 끝나니 딱 시기가 좋았다. 그동안 소원이 작곡한 곡들도 많이 쌓여서 그중에 몇 개를 고르고, 회사에서 산 음악들을 수록곡으로 넣으면 좋을 것 같았다. 물론 회사에서 산 곡은 소원의 손을 걸쳐서 재탄생하게 할 생각이었다.
'이왕이면 앨범 자체가 명 앨범인 게 좋으니까.'
여자 솔로로는 앨범이 크게 팔리지 않겠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좋은 곡을 내고 싶었다. 여건이 안 되면 모를까 여건이 충분히 되는 상황이니까 최대한 밀어주고 싶었다.
"예명은 소원 그대로 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좋아요. 아! 맞아! 매니저님이 TV에 나온 거 봤어요!"
이제는 만나는 사람마다 말하니 수한은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게다가 상대가 성민도 아니고, 소원이다. 놀리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아서 수한은 재잘거리는 소원을 보며 웃었다.
"소원 씨도 동물 좋아하십니까?"
"좋아는 하는 데 엄마가 반대하세요. 자기가 책임질 수 없는 동물은 함부로 들이는 게 아니래요."
어느 집이나 똑같이 말하는 것 같다. 무책임하게 데려와 놓고 버리는 집이 많았기에 차라리 저런 식으로 신중한 게 낫다. 수한은 순돌이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수한보다 소원이 가진 사진이 더 많았다.
"예진 언니한테 받았거든요!"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을 연결해준 게 나였지?'
정신없이 바쁘게 생활하다 보니 사소한 것도 잊게 되는 요즘이었다. 수한은 자신이 고른 강아지 옷이 핸드폰 사진에도 담긴 것을 발견했다.
"옷은 안 입혔답니까?"
"매니저님이 와야 입힐 수 있다는데요? 옷 입히는 걸 안 좋아한대요. 그러고 보니까 TV에서는 매니저님이 잘 갈아입히던데 그래서 그런가 봐요."
"아! 그래서 저 보고 골라달라고 한 거군요. 그게 저 보고 직접 갈아입히라는 의미였군요."
그날 유난히 붙잡더니 그런 이유였다. 수한은 언제 한 번 예진이 집에 제대로 부를 것 같아서 소름이 돋았다. 그래도 사진을 보니 순돌이와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뿌듯했다.
"나중에 언니가 유기견 보호소 같은데도 같이 가자는데 차라리 거기에 가는 게 어때요?"
"네?"
나쁘지 않은 생각이긴 했지만, 문제는 예진이었다. 수한은 아직도 고주혁에게 까칠하게 대한 예진을 잊지 못했다. 물론 그게 예진의 본래 모습이긴 하지만, 그래도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으로는 실망한 그런 상태였다.
'내가 기대를 하긴 했나 보네.'
수한이 그날 일을 떠올리며 표정 관리를 전혀 못 하자 소원이 웃음을 터트렸다. 덕분에 수한의 머리마저 개운해졌다.
"언니랑은 나중에 가요."
"네. 그러죠."
이야기를 다 하고 나니 슬슬 배가 고플 시간이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소원이 먹고 싶은 음식은 냉면이었다. 그냥 냉면도 아니고, 매운 냉면이라서 수한도 살짝 긴장하였다. 다행히 한산한 시간대에 가서 사람이 별로 없었다.
"괜찮겠어요?"
수한이 데려온 냉면집은 처음부터 양념이 얹어서 나오는 형태였다. 양념을 덜어내면서 자기가 알아서 매움을 조절하는 집이었다. 소원은 아무렇지 않게 양념 하나 덜어내지 않고 비볐다. 비빔냉면이라 그런지 새빨간 양념이 돋보였다. 수한은 잠시 고민하다가 남자답게 덜어내지 않고 먹기로 했다.
소원은 다 비빈 후 한 젓가락을 후루룩 먹더니 크게 감탄하였다.
"맛있어요!"
수한은 그 말을 믿고 한 입 먹었다. 생각한 것보다 맵지 않은 게 맛있다. 역시 매운맛도 혀가 적응하면 괜찮은 모양이다. 그렇게 수한은 다시 한 젓가락을 먹었다.
소원은 빠르게 떨리는 수한의 다리를 보고 웃음이 터질 뻔했다. 소원은 예진에게 보낼 사진을 위해 핸드폰을 들고 눈물을 흘리는 수한을 찍었다. 훈련한 보람이 없게 수한은 지금의 매움을 결국 견디지 못했다.
< 6. 평범하지 않은 일상 > 끝
ⓒ 엔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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