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SSS급 슈퍼스타 >
지훈은 어두운 방 안 구석에 틀어박혔다. 수한이 다녀간 이후부터 괜찮아졌던 마음이 다시 심란해졌다. 수한을 보고 있으면 자신이 무엇이라도 된 것처럼 느껴져서 거부감이 들었다. 지훈은 패자였다. 수한은 이현우처럼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칭찬했지만, 지훈의 생각은 달랐다. 비겁하게 도망친 거였다. 그래서 지훈은 다시 수한에게서부터 도망쳤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걱정은 또 들었다.
'매니저님도 다시 나를 보려고 하지 않겠지?'
수한이 명훈과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두려웠다. 지훈은 우울하게 TV를 보다가 SSS급 슈퍼스타 재방송에 시선을 빼앗겼다. 수한이 지훈을 내보내고 싶었던 방송이다. 지훈은 수한이 말하지 않아도 수한이 자신을 고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훈이 생각하기에는 고평가가 아니라 과대평가지만 말이다.
'부럽다.'
사극풍에 노래까지 고주혁은 소화해냈다. 설마 '사랑스런'이 저런 방식으로 편곡될 줄 몰랐기 때문에 지훈도 처음 무대를 봤을 때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수한의 제안을 들었을 때 더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저렇게 해낼 자신이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저 프로그램에 나가자고 했을 때 거절한 건 정말 잘한 것 같다. 그때 진동하는 핸드폰에 지훈은 시선이 흔들렸다. 수한에게서 온 전화였다.
'받지 말까?'
이제까지 숨어왔던 것처럼 다시 한 번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지훈은 왠지 이 전화는 안 받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안 받으면 정말로 수한과 끝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수한은 잘 모르는 것 같지만,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 외에도 소속되어있는 연예인과 연습생 사이에서도 이름이 나돌고 있었다.
'미다스의 손.'
수한이 도움을 주는 연예인마다 잘 되고 있으니 도는 별명 비스름한 거였다. 지훈은 여전히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수한의 손을 끝내 뿌리칠 수는 없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지훈 씨. 지금은 괜찮으신가요?]
지훈은 쓰게 웃었다. 수한은 이런 식으로 늘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는 성격이었다. 지훈은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으나, 애써 눈물을 참았다.
"네. 죄송해요. 매니저님."
[저 지훈 씨께 다른 제안 드리고 싶어서 연락했습니다.]
"다른 제안이요?"
[네. 들어보시고 아니다 싶으면 말씀해주세요.]
지훈은 차분하게 수한이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말한다면 지훈이 작곡한 노래를 가지고 다음 경연에 나가고 싶다는 뜻이었다. 편곡은 다른 사람이 해도 되니 허락만 해달라는 이야기였다. 그거라면 지훈도 부담감이 없기는 했다. 다만 걱정스러운 건 그 노래로 되겠냐는 거였다.
[그건 대중이 판단할 겁니다.]
내용과 다르게 수한의 자신감이 가득 찬 말에 지훈은 저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 수한이 없는데도 이상하게 그랬다. 묘하게 알 수 없는 긍정적인 힘이 지훈에게 전달되는 기분이었다.
[그럼 허락하신 거로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지훈은 수한의 전화가 끊기고 나서 잠시 멍한 상태로 있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을 정도로 정신이 몽롱하였다. 그러다가 지훈은 자신의 컴퓨터에 저장된 '가을이 너라면' 파일을 열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멜로디에 고주혁의 목소리를 더했다.
'잘 어울린다.'
고주혁에게 빼앗길 뻔한 전적이 있던 노래인 만큼 고주혁에게 굉장히 잘 어울리는 노래였다. 지훈은 수한에게서 느껴지던 자신감이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어쩌면 정말로 이 노래로 고주혁이 좋은 결과를 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훈은 갑자기 떠오르는 악상에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지훈의 입꼬리가 올라가면서 '가을이 너라면'이 펜을 잡은 손에서 새롭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
수한은 갑작스레 지훈에게서 온 메일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러니까 이건 수한이 계산한 일이 아니었다. 소원과는 오늘 따로 만나서 작업하기로 했기 때문에 아직 '가을이 너라면'을 수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수한은 이어폰을 끼고 음악 파일을 열기가 무섭게 들려오는 음악에 소름이 돋았다.
'이걸 이렇게 만들 수 있다고?'
잔잔했던 멜로디가 거칠게 바뀌었지만, 특유의 장점은 다 살려낸 상태였다. 악기가 기타 하나뿐인데도 지훈이 어떻게 편곡을 한 건지 파악이 되었다. 수한은 그뿐만이 아니라 떠오르는 능력치에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을이 너라면- 대중성: SS, 음악성: SS, 최고 순위: 1, 성장 가능성: 0%]
수한은 미쳤다-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수한은 제 앞에 놓인 두 천재에 감탄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만약 소원과 지훈이 만난다면 시너지 효과를 제대로 발휘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수한은 곧바로 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지훈은 무엇을 하는지 수한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수한은 그래서 지훈에게 메시지를 남겨두었다.
[결과로 보답하겠습니다.]
수한은 고주혁이 이 음악을 들으면 어떻게 반응할지 벌써 기대가 되었다. 그래서 당장 고주혁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안타깝게도 수한에게는 약속이 있었다.
"매니저님."
"오셨습니까?"
수한은 오늘도 열심히 얼굴을 가리고 온 소원을 보며 반갑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이 소식을 전해야 해서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네? 이미 만들어졌다고요?"
"여기까지 나오게 했는데 이런 말을 전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혹시 그 음악 저도 들어볼 수 있어요?"
이미 지훈이 부른 버전을 소원에게 건네주었기 때문에 소원이 눈에 유난히 반짝거렸다. 처음 듣자마자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이다. 소원은 편곡 버전을 듣더니 입이 쩍 벌어졌다. 아이돌답지 않은 털털한 모습이었으나, 그래서 더 귀여웠다.
'아이돌도 계속했으면 좋았겠는데?'
아직 상큼한 모습이 남아있어서 아쉬웠다. 소원은 이어폰을 빼고는 그 상태로 손뼉을 쳤다. 더 손댈 곳 없이 완벽하다.
"이런 분이 있는데 어째서 그동안 저한테 맡긴 거예요?"
수한은 지훈의 재능을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소원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지금 업계에서는 작곡가 에이치가 누구인지 궁금해서 난리인데 정작 본인은 남을 부러워하고 있으니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왜 웃어요?"
"천재가 천재를 부러워하니까요."
"저 솔직히 매니저님이 하는 말 다 믿었거든요."
"그런데요?"
"근데 이제는 못 믿겠어요. 이런 사람이 있는데 제가 어떻게 천재예요?"
수한은 말문이 턱 막혔다. 이런 말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수한이 어쩌지 못하고 볼만 긁적이자 소원도 자기가 한 말이 기가 막혔는지 어색하게 웃었다.
"이제 할 것도 없는데 어떻게 해요? 다시 돌아갈까요?"
"빌린 시간이 아까우니 놉시다."
"네?"
"한소원 씨가 좋아하는 피아노가 앞에 있으니까 마음껏 노세요."
소원은 어이없다는 듯이 수한을 쳐다봤다. 이게 어떻게 노는 거냐는 뜻이었다. 그러나 수한은 그 시선에도 개의치 않고, 구석에 있는 소파에 누운 채 눈을 감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휴식을 제대로 취하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소원은 황당하게 수한을 보다가 그 말대로 피아노로 놀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많이 편해졌나 봐.'
소원은 처음에 팬이라고 했던 수한을 기억하기에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이제는 가수와 팬보다는 한배를 탄 편한 동료가 된 기분이라서. 음악을 함께 하면서 많이 편해지긴 했지만, 섭섭한 마음이 안 들 수는 없었다.
소원은 너무하다는 생각에 일부러 경쾌한 멜로디를 쳤다. 수한의 잠을 깨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하이든의 놀람 교향곡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수한은 오히려 푹 자면 잤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재미없어.'
집에서 혼자 놀면 모를까 낯선 공간에서 혼자 노니까 재미가 없었다. 소원이 피아노 치는 것을 관두고 멍하니 앉아있자 수한에게서 목소리가 들렸다.
"재미없습니까?"
"자는 거 아니었어요?"
"자지 말라고 항의하는 게 들려서요."
수한이 소파에서 일어나자 소원이 대놓고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살짝 장난친 것뿐인데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소원에 수한은 웃으면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직접 치시게요?"
"네."
수한이 피아노를 치기가 무섭게 뚱땅거리는 멜로디가 들려왔다. 누가 들어도 이건 피아노를 처음 치는 사람이 내는 소리였다. 소원이 옆에서 살짝 알려주는데도 못 치는 걸 보면 재능이 아예 없었다.
"이런 사람도 있으니 한소원 씨가 천재인 겁니다."
수한은 자존심 상해하는 소원의 얼굴을 보고 머쓱하게 웃었다. 비교 점을 수한으로 두면 누구든 천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한은 괜히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내기는 한소원 씨가 이겼는데 소원 생각해둔 게 있습니까?"
"나중에 빌래요."
"왜요? 당장은 생각해둔 게 없나요?"
"그렇다기보다는 나중에 더 쓸만한 소원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수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피아노를 쳤다. 재능이 없다 못해 바닥을 파고들 지경이라서 소원은 웃음을 참기가 정말 힘들었다.
**
"잘할 수 있을 겁니다."
"네. 그래야죠."
무대에 나서기 전에 고주혁은 비장한 모습이었다. 다른 사람의 노래도 아닌 지훈의 노래이니 첫 무대보다 더 큰 긴장을 하였다. 그러나 수한은 알았다. 고주혁은 긴장하면 할수록 그 긴장을 무대로 풀어놓는 천상 무대 체질의 가수였다. 수한은 다른 것보다 지금까지도 청심환을 먹지 않는 고주혁의 정신력에 크게 감탄했다.
'이러면 더는 청심환을 살 필요가 없겠는데.'
수한은 노래를 부르기도 전에 바뀐 고주혁의 능력치를 확인하였다.
[고주혁- 스타성: S, 연기력: S, 가창력: A, 춤: A, 인지도: A, 기타: S, 성장 가능성: 0%]
성장 가능성이 다시 0으로 돌아갔지만, 대신 스타성과 인지도가 올라갔다. 결국, 이 노래는 고주혁에게 다른 형태로 돌아오게 되었다.
고주혁은 무대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기에 앞서 차분하게 말문을 열었다.
"이 곡은 제가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분이 직접 작곡하고, 편곡까지 한 곡입니다."
고주혁의 말을 시작으로 잔잔하게 밴드 음향이 울리기 시작했다. 다들 처음 듣는 노래이기에 어리둥절해 하며 노래를 듣다가 얼마 안 가 온몸에 소름이 쫙 돌았다. 이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전에도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놓았지만, 이건 완전히 영혼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카메라를 들고 있던 스태프들까지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이니 말 다 했다.
이 순간 누구도 고주혁의 우승을 확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경연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무조건 우승은 고주혁이었다. 가장 강력하게 그 생각을 한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닌 이재성 PD였다.
< 5. SSS급 슈퍼스타 > 끝
ⓒ 엔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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