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올라가는 길 >
원래 인생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지금 상황이 딱 그랬다. 수한은 죄송하다는 말을 연신 하는 지훈을 보며 괜찮다는 말을 전했다.
"아닙니다. 굳이 이런 방식이 아니어도 지훈 씨는 빛을 보게 될 텐데 제가 너무 성급했나 봅니다."
"제가 더 죄송하죠."
빠르게 올라가는 길이나, 매우 힘든 방법과 느리게 올라가는 길이나, 쉬운 방법. 지훈은 후자를 택하는 사람이었다. 지훈이 선택을 한 이상 수한 또한 그 선택을 강요하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이 기회를 통해 수한도 자신이 조급하게 마음을 먹은 건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래서 이지훈 씨가 오랫동안 무명이었구나.'
수한은 새삼 지훈의 과거가 이해되었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지훈 씨가 옳은 선택을 했습니다."
수한은 지훈에게 다시 괜찮다고 말하며 카페에서 나왔다. 수한은 집으로 가기 전에 사람들이 흩뿌리며 가는 담배 연기에 담배가 당겼다. 은근히 스트레스가 쌓였다.
'그래. 너무 마음을 조급하게 먹지 말자.'
현재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다. 방송국 사람들에게 잘 보여 인맥을 넓히는 것도 잘하고 있고, 배우들 경력 관리도 잘하고 있다. 수한은 마음을 차분하게 먹기 위해 걸어가다가 핸드폰 메시지에 고개를 내렸다.
[새로운 곡을 작곡했어요.]
소원은 재능만큼이나 영감도 넘쳐났다. 수한은 이어폰을 핸드폰에 꽂고 새로운 노래를 들으며 걸어갔다. 수한은 노래를 들으면서 아쉬운 부분을 표시하였다. 처음에는 이게 될까 싶었는데 소원의 손에서 고쳐지는 멜로디로 인해 바뀌는 능력치를 보면서 수한에게도 어느 정도 감이 생겼다.
'이게 대중적인 멜로디구나.'
소원조차 수한에게 놀랄 정도이니 말 다 했다. 수한은 포근하게 위로해주는 소원의 새로운 노래를 들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일찍 들어가서 그런지 오늘따라 바닥에 있는 먼지들이 잘 보였다.
'원래 스트레스를 푸는 일에 청소가 제격이라니까.'
수한은 침대 옆에 쌓여있는 악보집을 보고는 웃음이 나왔다. 어떻게서든 전과 다르게 살겠다고 발버둥 친 결과물이 보였다. 수한은 달력을 보며 다시 차분하게 마음먹었다. 아직 되돌아온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날 수한은 오랜만에 대청소하였다. 덕분에 쌓였던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
멍멍-!
귀엽게 짖는 소리에 수한은 강아지의 머리 위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러자 강아지의 꼬리가 프로펠러처럼 빠르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힐링 되는 게 이런 기분인 것 같았다.
"순돌이는 어째서인지 매니저님을 가장 좋아하는 것 같네요."
강아지 이름은 순돌이가 되었다. 이름이 촌스러울수록 오래 산다는 이야기를 누군가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수한은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부정할 수도 없는 게 촬영 현장에 올 때마다 순돌이가 찰떡처럼 수한에게 달라붙어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누가 보면 순돌이가 암컷인 줄 알겠어요."
수한은 이를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 그래도 강아지가 자기를 좋아한다는데 싫지는 않았다. 게다가 수한은 사람들 몰래 순돌이를 위한 간식까지 챙겨온 사람이었다.
'어떻게 보면 반칙이기는 한데 순돌이를 위해서라면 상관없지.'
물론 간식을 준다고 해서 모두에게 마음을 연 건 아니지만, 순돌이는 사람 볼 줄 알았다.
"매니저님 촬영하는 동안에는 멀리 떨어져 계셔야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수한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지를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수한은 대기실로 돌아가서 두 사람에게 필요한 것들을 챙겨놓았다. 그사이에 촬영은 시작되었다.
"순돌아. 누가 더 좋아?"
예진과 시은 사이에서 묘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촬영할 때만큼은 친한 척을 열심히 했던 두 사람인데 그 질문 하나에 본래 성격이 드러났다. 특히나 예진은 순돌이에게 잘해주었던 만큼 기대감도 컸다.
"그럼 순돌이를 앞에 두고 두 사람 중에 누구에게 오나 확인해볼까요?"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쓰이는 레퍼토리였다. 누군가는 또 이런 걸 하느냐고 지겨워할지도 모르겠지만, 클리셰가 달리 클리셰가 아니었다. 모두가 좋아하니 클리셰다. 특히나 '댕댕이를 부탁해'를 통해 두 사람의 이미지가 호감으로 상승 중이어서 순돌이에게 이입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았다.
"자! 그럼 놓겠습니다."
순돌이를 바닥에 두자 두 사람은 서로 순돌이를 유혹하기 위해 장난감 및 간식을 흔들었다. 그러나 순돌이는 바닥에 놓기가 무섭게 두 사람이 아닌 다른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빠르게 달려가는 순돌이 때문에 촬영팀은 당황했지만, 그러면서도 순돌이를 놓치지 않고 찍었다.
"어?"
순돌이를 따라간 두 배우는 황당하다는 듯이 웃었다. 순돌이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수한이었다. 수한은 제 앞에 들이 내민 카메라에 당황하면서도 달려온 순돌이를 외면하지 않고 끌어안았다.
"순돌이가 왜 여기로 온 거죠?"
대기실에 있었기에 상황 파악을 전혀 하지 못한 수한이 질문을 던지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장면을 자르려고 했던 PD는 이 장면을 그대로 내보내기로 했다.
"그럼 잠시 휴식하겠습니다."
PD의 말에 다들 장비를 내려놓으며 편하게 휴식을 했다. 물론 이 시간이 매니저에게는 가장 바쁜 시간이었다. 수한은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순돌이를 보며 생각이 많아졌다.
'우리 집에 데려가서 키우고 싶다.'
그러나 수한이 키우기에는 매니저 일이 녹록지 않았다. 워낙 불규칙한 생활 방식이라 홀로 외롭게 집에 있을 게 뻔했다. 게다가 순돌이는 유기견이기 때문에 더욱더 그런 식으로 내버려 둬서는 안 됐다. 상처받은 아이인 만큼 정성으로 보살펴야 했다.
"순돌아. 너 너무한다."
평소 같았으면 휴게실로 가서 쉬었을 예진인데 수한에게 매달려있는 순돌을 보며 진심으로 서운해하는 듯했다. 그건 옆에 있는 시은도 마찬가지였다. 예진처럼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섭섭해하는 기색이 있었다.
"김수한. 너 우리 몰래 간식 주지?"
예진의 날카로운 지적에 수한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 때문에 의심의 눈초리가 진해졌다.
"오빠. 진짜예요? 근데 저도 간식 들었는데?"
"사람 보는 눈이 있나 보지."
예진의 농담 섞인 말에 시은이 활짝 웃었다. 예진은 엉겨 붙는 시은에게 질려 도망갔고, 수한은 두 사람이 예능 촬영하면서 많이 친해진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예진은 과연 정이 많은 타입이었다.
[김수한. 사무실에 들어와라.]
성민이 보낸 메시지에 수한은 재원에게 먼저 사무실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건네고 순돌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안녕. 순돌아."
"수한 씨! 잠시만 이야기할 게 있어서요."
수한은 갑자기 자신을 붙잡는 이태욱 PD에게 어서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방송에 얼굴 나가도 되나요?"
"네. 상관없습니다."
"출연료는 조금이긴 하지만, 따로 드릴게요."
"네. 그러시죠."
굳이 주겠다는 돈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수한은 그 돈으로 순돌이 간식이나 더 사다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인사하고 나갔다.
수한이 가고 나자 순돌이가 끙끙 앓자 예진이 순돌이를 들었다. 수한만큼은 아니어도 두 사람도 좋아하기에 순돌이가 꼬리를 세차게 흔들자 웃음이 나왔다. 예진은 보면 볼수록 순돌이가 마음에 들어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순돌이. 꼭 입양 보내야 해? 내가 키우면 안 되나?"
"언니가 키우려고?"
"나야 일할 때 빼면 집에 있으니까."
예진은 말귀를 알아들은 것처럼 손바닥을 핥는 순돌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내가 언니네 집에 매일 가야겠다."
"뭐? 안 돼. 오지 마."
촬영하면서 내적 친밀감이 생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갑작스럽게 쑥 치고 들어오는 시은 때문에 예진은 크게 당황했다.
친한 척 연기인 건지 아니면 진심인 건지 잘 가늠이 안 가 예진이 혼란스러워하자 시은이 혼자 속으로 웃었다. 당연히 진심이었다. 처음부터 두 사람의 관계에서 시은을 일방적으로 싫어한 건 예진뿐이었다. 시은은 예진을 싫어하지 않았다.
원래 의도는 순돌이를 통해서 함께 힐링하는 거였지만, 예진을 괴롭힘으로써 시은은 힐링하였다.
**
"다녀왔습니다."
"김수한이. 로또 번호 좀 불러봐라. 1등 하면 백만 원 정도는 떼어줄게."
수한은 설마 이러려고 부른 건가 싶어서 대놓고 정색했다. 당연히 성민은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오히려 법인카드를 흔들며 수한을 유혹하였다. 수한은 비싼 커피 아니, 비싼 공짜 커피를 좋아하므로 성민을 따라갔다.
"촬영은 잘하고 있어?"
"네."
"진짜 너 타율 대박이야. 쳤다 하면 기본이 안타네."
"올라갈 사람은 올라가는 법이죠."
성민은 질렸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일에 관해서는 겸손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수한이 선택한 예능까지 대박 날 줄 몰랐기에 사람들의 눈이 이전과 확실히 달라졌다.
"근데 무슨 말을 하려고 또 법인카드까지 가져오셨습니까?"
"아니, 그게 말이야. 네가 들으면 실망할 이야기를 하려고 그렇지."
"이지훈 씨를 스타로드에 내보내는 거 말입니까?"
"어떻게 알았어?"
"감이 잡혔습니다. 그리고 저는 찬성입니다."
"뭐? 왜?"
수한은 힘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수한을 설득하려고 와놓고서 막상 그러자고 하니 왜라니? 성민도 자신의 모순적인 행동을 인식했는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사실 방송국에서 어떤 PD님이랑 같이 서 있는 걸 봤거든요. 그때 느낌이 딱 왔습니다."
"아직 우리가 중소 기획사라 힘이 없어서 그래. 방송국에 맞춰야지 어떻게 하겠냐? 네가 열심히 홍보한 덕분에 우리 회사에서 적극적으로 가수 키우려는 것도 소문나서 어쩔 수 없었어."
"결국, 열심히 홍보한 제 탓이라는 거네요?"
수한이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말하자 성민은 안도하며 다음에 좋은 기회가 있을 거라며 수한을 다독여주었다. 어차피 SSS급 슈퍼스타는 지훈이 나가고 싶지 않다고 했으니 수한도 밀어붙일 수 없었다. 수한은 커피를 쪽 빨며 성민과 함께 걸어가다가 누군가 앞을 막아선 것을 발견했다.
"어? 고주혁 씨?"
매니저끼리 있을 때는 이름을 막 불러대던 성민이지만, 당사자 앞에서는 성민도 예의를 차렸다. 수한은 성민에게 볼일이 있는 건가 싶어서 인사를 하며 지나치려다가 어느새 제 앞을 막아선 고주혁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저 김수한 매니저님께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기다렸습니다."
수한은 고주혁이 말을 하기도 전에 바뀐 그의 성장 능력치에 미소를 지었다. 이전에 성장 능력치가 0%였다면 지금은······.
[고주혁- 스타성: A, 연기력: S, 가창력: A, 춤: A, 인지도: F, 기타: S, 성장 가능성: 60%]
< 4. 올라가는 길 > 끝
ⓒ 엔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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