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 탑스타-35화 (35/186)

< 4. 올라가는 길 >

"일이 그렇게 됐습니다."

수한은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하겠다는 사람에게 하지 말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 예능 프로그램은 무조건 성공하는 프로그램이다. 예진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서도 좋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도 성민의 명을 수행하지 못했으니 면목이 없었다. 그런 수한의 앞에서 성민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너도 예진이 앞에서 어쩔 수 없구나?"

"네. 아무래도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하긴 이미지 좋을 때 이런 예능에 참여하는 것도 좋긴 하지."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시은이다. 수한은 성민의 선택을 기다렸다. 성민은 잠시 기다려보라고 자리로 가서 전화를 걸더니 얼마 안 가 시원한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수한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둘이 한 페어로 해서 내보내지 뭐."

"네?"

"왜? 재미있잖아."

수한은 진심이냐고 몇 번이나 묻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성민은 결정을 내렸는지 어서 이태욱 PD에게 전화 걸라고 독촉하였다.

'이거 예진 씨가 알면 안 한다고 할 것 같은데.'

"가온 엔터테인먼트 김수한입니다."

[네.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린 거로 전화하신 건가요?]

거절할 거라 생각했는지 이태욱의 목소리가 불안정하게 떨렸다. 미래에서는 그렇게도 대담하게 카메라 앞에서 말하더니 아직은 신입 PD인 게 티가 났다.

"잠시만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전화로 대화를 나누기에는 다른 제안을 하고 싶어서요."

[네? 네. 알겠습니다.]

"제가 방송국으로 갈 거니까 방송국에서 만나면 될 것 같습니다."

수한이 전화를 끊고 성민을 보자 성민이 잘했다는 듯이 엄지를 척 들어주었다. 그러나 일이 성사되어도 문제였다.

"근데 방송국에 직접 가려고?"

"네. 가는 김에 지훈 씨 프로필을 다시 뿌리고 오려고요. 스케줄 보니까 남는 시간 있어서요. 그러고 보니 이지훈 씨를 어디로 내보낼지 결정했습니까?"

"아직 프로그램이 시작되려면 시간 있어서 천천히 고르려고 했는데 역시 너는 S급 슈퍼스타야?"

수한이 기억하기로는 S가 더 많았던 거로 기억하지만, 지금 와서야 아무 상관 없었다. 수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하게 자기 생각을 말했다.

"비록 케이블이라고 하지만, 그래서 더 자유롭게 편집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말이 자유로운 편집이지 일명 악마의 편집이었다. 수한은 그래서 SSS급 슈퍼스타가 성공한 프로그램이라는 걸 깨달았다.

'잠깐만, 이게 이지훈 씨에게 좋은 건가?'

"그래? 네가 그렇게 계속 말하니까 나도 조금 더 생각해볼게. 어차피 우리 부에서 민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니까."

"네······."

지훈은 굳이 이 오디션 프로그램이 아니어도 성공할 사람이었다. 수한은 순간 생각이 많아졌다. 이래도 되나 싶었다. 물론 트집 잡힐 게 없이 행동하면 악마의 편집을 안 당할 가능성이 크지만, 수한은 순간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지훈이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서 괜히 나쁜 이미지를 얻게 된다면 수한에게도 그렇고, 지훈에게도 큰 타격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이 많아졌다. 아무래도 이 일은 혼자 결정해서는 안 될 것 같다.

**

"안녕하세요. 이태욱 PD님."

태욱과는 방송국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만났다. 원래 커피는 태욱이 사려고 했으나, 수한이 샀다. 태욱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다. 물론 현재 놓인 입장은 정반대였다. 하지만 우위에 있다고 함부로 갑질을 해서는 안 됐다.

'게다가 상대는 이태욱 PD잖아.'

태욱은 어디 가서 무시를 많이 당한 건지 수한의 접대 아닌 접대에 놀란 듯했다. 하긴 처음 비타민 음료를 줄 때부터 그는 감동했다.

"그래도 바로 새 프로그램에 들어가셔서 다행입니다."

"네. 담당 PD님한테 잘 보였거든요. 어차피 여기는 누가 오래 살아남느냐에 따라 위치가 바뀌니까 위로 올라갈 때까지 열심히 할 생각이에요."

몸은 지쳐있지만, 눈빛은 좋았다. 수한은 새삼 이런 사람이 성공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근데 왜 저를 따로 보자고 한 건지?"

"원래라면 전화로 나눠도 되는 내용이지만, PD님과 친해지고 싶어서요."

"네?"

"제가 이제까지 준 비타민 음료가 뇌물이란 거 몰랐습니까?"

수한은 진심으로 말한 거였으나, 태욱은 농담처럼 받아들였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비타민 음료를 뇌물이라고 주겠는가? 비타민 음료 상자 안에 돈이 있으면 모를까.

"저랑 친해지고 싶은 의사도 정확히 전달되었네요. 저도 매니저님이 싫지는 않아요. 수상한 보스나 달보드레 스태프들한테도 평이 좋더라고요. 인사도 잘하고, 일도 잘 도와준다고."

"서로 힘든 현장에서 일하는데 당연히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수한은 또 한 번 감동한 태욱의 얼굴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면 이 방법을 가르쳐준 게 명훈이기도 해서 기분이 묘해졌다.

"그보다 제안할 게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

"네. PD님께서는 예진 씨를 섭외 요청했지만, 또 한 명을 더 프로그램에 들이고 싶습니다."

"네? 누구를요?"

"박시은 씨를 성예진 씨와 한 페어로 프로그램에 넣고 싶습니다."

수한은 어째서인지 제안을 듣자마자 당장에라도 수용할 것 같은 태욱의 모습에 살짝 놀랐다. 그의 눈가가 어느새 촉촉해졌다. 수한은 그 반응에 이 프로그램이 방송국 내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땜빵 용 프로그램이구나.'

태욱의 섭외 제안은 도움이 되어주겠다는 수한의 말을 믿고 무작정 던져본 수였다. 물론 그래서 기대를 안 했기도 했다. 수한은 그 사실을 알아챘지만, 오히려 이 기회를 좋게 여겼다. 제대로 태욱의 눈에 들었기 때문이다.

**

"뭐? 박시은이랑? 한 페어라고?"

"네. 어떠십니까?"

거의 정해진 답에 예진은 인상부터 찌푸렸다. 물론 말을 전하는 수한도 괴롭기는 매한가지였다. 예진이 어떤 독설을 던질지 몰라 조마조마했다. 각오는 했지만, 실제로 듣는 것과 아닌 것은 다르니까.

"그보다 식사는 잘······."

"죽 먹었어."

수한이 고개를 돌리자 재원이 자기가 했다고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예진이 연기할 때 힘들 때면 재원보다는 수한을 의지하기 때문에 재원이 존재감을 살짝 잊어버렸다. 사실 수한보다 재원이 예진의 건강을 더 끔찍하게 챙겼다.

"이거 다 이 실장 소행이지?"

"네?"

수한이 예진에게 말했냐고 재원을 쳐다보자 재원이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수한의 행동이 더 성민의 짓이라는 확신을 더욱더 주게 되었다. 그보다 수한은 성민을 이 실장이라고 부르는 예진의 패기에 놀랐다.

'대표님도 막 부르는 건 아니겠지?'

"애초에 나한테 들어온 프로그램이라며? 박시은은 왜 껴?"

"그게 말입니다."

"하여튼 간에 다들 자기 새끼 못 끼워서 안달이지."

"실장님이 한때 시은 씨 담당인 거 아셨습니까?"

"가온에 매니저가 얼마나 된다고 그걸 모르겠어?"

맞는 말이었다. 수한만 해도 여러 연예인의 대리 매니저를 하고 있으니 이해가 되었다. 가온 엔터테인먼트는 중소 기획사치고 너무 많은 연예인을 데리고 있었다. 물론 대부분이 배우라 특정 기간에만 바빠서 다행이기는 했다.

'그래서 가수는 안 키웠나?'

"그래서 너도 이 실장 말에 동의한 거야? 하긴 그러니까 나한테 말을 전하는 거겠지?"

"예진아. 수한이가 매니저 일 오래 한 것 같아도 회사에 들어온 지 1년도 안 됐어."

"뭐? 진짜?"

분명 신입 매니저라고 인사했는데 왜 그걸 기억 못 하는 건지 수한은 이해가 되면서도 안 되었다. 수한이 신입치고는 너무 많은 걸 알고 행동하기는 했다. 수한은 위아래로 자신을 훑어보는 예진의 시선에 불쾌하다는 의미를 담아서 헛기침했다. 다행히 예진은 그 뜻을 알아들었다.

"신입이라는 말이 하도 신기해서 봤어."

당연히 예진은 사과 비슷한 말은 하지 않았다.

"어쨌든 간에 알겠어. 일개 신입이 실장한테 대들 수는 없다는 거지?"

"그렇지."

수한은 예상외로 자신을 챙겨주는 재원에게 놀랐다. 수한이 고맙다는 뜻으로 눈인사를 건네자 재원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 내가 이 실장한테 직접 따지면 되는 거지?"

"네? 그건······."

그러나 수한이 말리기도 전에 예진은 이미 전화를 걸었다. 수한은 예진이 어떤 식으로 화낼지 몰라 고민하다가 마지막 화 대본을 공손하게 들었다. 이제 마지막 화까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예진은 전화하면서 살짝 언성을 높이더니 결국은 인상을 찌푸리며 전화를 끊었다.

"실장님이 뭐라 하십니까?"

"알 거 없어. 하여튼 간에 왜 이상한 놈을 만나서 청승이야."

수한은 제 품에 있던 마지막 화 대본을 뺏어가는 예진을 조용히 살폈다. 어느새 집중하는 모습을 보니 안심해도 좋을 것 같다. 수한이 다시 한 번 도와줘서 감사하다고 재원에게 눈인사를 건네자 재원은 별 것 아니라는 식으로 비타민 음료만 흔들었다. 그 비타민 음료는 얼마 안 가 재원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

수한은 '댕댕이를 부탁해'에 나오는 출연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전에 이야기 나왔던 연예인들보다 더 급이 높은 연예인들이 출연하기로 했다.

"시은이와 예진이가 합류한다니까 방송국에서 생각이 바뀐 거지."

과연 일리 있는 말이었다. 시은만 해도 좋은 시청률로 드라마를 끝냈고, 예진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달보드레는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어떻게 끝날지 모른다는 긴장감에 시청률이 계속해서 상승 중이었다. 시청률 30%를 넘은 지는 오래였다. 그런 핫한 드라마의 배우들이 출연한다고 하니 화제성은 이미 보장되었다.

"지난번에 예진 씨랑 통화할 때는 시은 씨 이야기를 한 거죠?"

"그래. 네가 못하니까 내가 한 거 아니야. 예진이가 성격은 세 보여도 여린 구석이 있거든."

어떻게 보면 약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설득의 기술이기도 했다. 약아 보여도 언젠가는 꼭 쓰일 방법이라 수한은 이날을 잘 기억해두기로 했다.

"시은 씨 반응은 어떱니까?"

"예진이가 허락했냐면서 놀라워하던데?"

"시은 씨는 예진 씨가 어렵지 않은가 봅니다."

"시은이가 그런 대담한 면이 있긴 있지. 그 성격 때문에 나는 더 크게 클 거라 생각한다."

어차피 시은의 스타성은 능력치로 봤기 때문에 수한은 적극적으로 동의하였다. 새삼스럽지만, 시은이 유성준을 끊어낸 건 잘한 일이었다. 그 후유증 때문에 현재 고생 중이지만.

"오히려 시은이가 예진이 천적이 될 수도 있을걸?"

"네? 천적까지요?"

"예진이가 시은이 싫어하는 거 느껴지지 않아?"

"그렇긴 한데······."

"두고 보면 알게 될 거야."

성민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즐겁게 웃었다. 수한은 악마 같은 미소라는 게 딱 저런 게 아닌가 싶었다. 수한은 예진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 많이 들어 다음 촬영장에는 더 많은 것들을 챙겨가기로 했다.

< 4. 올라가는 길 > 끝

ⓒ 엔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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