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올라가는 길 >
수한은 우선 시은의 상태를 살펴보기로 했다. 처음 시은의 집에 방문했을 때 귀신처럼 하고 있던 게 아직도 머릿속에 잊히지 않았다. 오늘은 성민과 함께 시은의 집에 방문했다. 함께 시은을 설득하러 공항에 갔을 때가 생각나서 기분이 묘했다.
"오랜만이에요. 오빠."
거센 예진만 보다가 시은을 보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다고 시은이 만만하다는 건 아니었다. 수한은 유성준과 공개 열애를 하겠다고 말했던 시은을 잊지 않았다.
"시은아. 몸은 어때?"
시은에게 먼저 말을 건 건 성민이었다. 수한은 웬일로 다정한 성민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적응이 안 되네.'
시은의 집에 한두 번 온 게 아닌지 성민은 자연스레 부엌을 뒤적이더니 따뜻한 차를 내왔다. 그사이에 시은은 수한에게 말을 걸었다.
"요즘 예진 언니랑 계속 다녔다면서요? 역시 오빠는 나보단 예진 언니가 더 좋은 거였어."
수한은 황당해서 말이 안 나왔다. 시은과도 촬영 기간에는 계속 함께 있었다. 누가 들으면 시은에게는 정성을 덜 들인 줄 알겠다.
"농담이에요. 그래도 예진 언니가 오빠한테는 잘해준다는데 어때요?"
"잘하기는요. 아주 공평하게 대합니다."
아주 공평하게 못되었다. 수한은 여전히 테이블 위에 쌓여있는 대본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성민의 말을 듣고 시은을 보니 어딘가 우울해 보이긴 했다. 그러다가 수한은 식탁 위에 있는 약 봉투를 발견했다.
"요즘 어디 안 좋습니까?"
"우울증이요. 약을 먹어서 그런지 약간 졸려요."
"병원에서는 뭐래?"
"제가 받은 상처를 제대로 안 살펴서 이제야 문제가 나타난 거래요."
수한은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이 없기에 연애의 여파를 이런 식으로 앓는 시은이 이해가 안 되면서도 안 되어 보였다.
"솔직히 진짜 많이 화났거든요?"
"당연히 그래야지."
성민은 유성준을 생각하면 아주 이가 갈리는지 타온 차를 한 번 들이키다가 뜨거워서 뱉었다. 사람을 위로하러 온 건지 아니면 일을 만들러 온 건지 아주 난장판이었다. 그러나 시은은 뜻밖에도 이런 걸 좋아하는 듯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었다.
"근데 드라마 끝났더니 좋은 기억이 아직 남아있는 거예요. 제가 그놈을 많이 좋아하긴 했나 봐요."
"그래서 새 작품에 바로 들어가고 싶다는 거야."
"네. 맞아요."
수한이 보기에도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왜 성민이 걱정을 하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이렇다 할 작품이 없어 보였다. 아무거나 골라서 들어가기에는 수한은 시은의 필모그래피를 신경 썼다.
수한은 차라리 시은이 수상한 보스가 아닌 달보드레에 들어갔으면 그 여한을 다 풀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실제로 예진은 복수할 때 본인이 받은 스트레스를 상대 배우에게 풀기도 했다.
'작품을 적절하게 추천하지 않은 내 잘못도 있는 건가?'
"집에서 주로 그럼 작품 선택하면서 시간을 보내십니까?"
"아니요. 주로 자요."
"약이 조금 세긴 하지?"
"네. 그런 것 같아요. 잠 조절이 쉽게 안 되네요."
수한은 자신에게 조용히 눈짓을 보내는 성민을 보았다. 어떠냐는 뜻이었다. 수한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이 상태로는 작품을 선택하는 것도 위험했다.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성민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많이 걱정되십니까?"
"저런 일이 한 번도 있던 적이 없어서 그렇지."
"그래도 더 늦기 전에 병원에 가서 다행입니다."
"하긴 연예인 상당수가 우울증을 앓는다고 하니까. 혹시나 해서 데려갔지."
"유성준은 요즘 어떻게 지낸답니까?"
"아주 개판이야. 얼마나 발을 걸치고 다닌 건지 연예부 기자도 손 뗐대. 계속 캐낸다고 해서 뭐 건질 것도 없다고."
유성준은 수한이 기억하는 대로 몰락하였다. 수한은 차에 시동을 걸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굳이 꼭 드라마에 들어가야 하는 걸까?
"예능은 어떻습니까?"
"어?"
"관찰 예능이 대세잖아요. 이미 한 번 나간 적이 있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하는데 어떠세요?"
"예능이라고?"
수한은 성민의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는 얼굴에 살짝 긴장되었다. 그동안 수한의 의견을 잘 수용해온 성민이라서 걱정은 안 되지만, 그래도 혹시나 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그렇죠?"
"그래. 괜히 아무 작품이나 했다가는 필모그래피만 망치니까."
성민은 좋은 생각이라며 몇 번이나 수한에게 칭찬을 얹어주었다. 그리고 수한은 특명을 받게 되었다. 어느 예능에 출연해야 시은에게 좋을지 골라오라는 명령이었다.
수한은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이 적어두었던 예능 목록을 쭉 보았다. 그리고 앞으로 시작할 예능까지 쭉 훑어보았다.
시작할 예능 중에서 수한의 눈에 딱 띄는 게 있었다. 목록에도 있는 이름이었다.
[댕댕이를 부탁해]
유기견을 키우는 예능이었다. 방송국에서 이런 인터넷 용어를 함부로 써도 되는가 잠시 생각이 되었지만, 후에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덜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SSS급 슈퍼스타도 떴는걸.'
수한은 제작진 목록을 살펴보다가 눈에 띄는 이름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스케치가 폐지되면서 새로 만들어지는 예능이었다.
지이이잉-.
수한은 갑작스럽게 울리는 핸드폰에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먹인 비타민 음료가 헛되지 않았다.
"가온 엔터테인먼트에 김수한입니다."
[네. 저 이태욱 PD인데 섭외 문의를 하고 싶어서요. 그래도 안면이라도 튼 사이라서 연락드렸습니다.]
"네.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제가 듣기로는 여배우들과도 일을 같이한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수한은 생각보다 자신에 대해 알아본 듯한 태욱의 말투에 좋은 반응이라 여겼다. 애초에 수한이 노린 것도 이런 거였다. 수한은 가온 엔터테인먼트를 위해서도 일하지만, 자신의 입지를 넓히기 위해서도 일했다.
"네. 말씀하세요."
[성예진 씨 많이 바쁜가요?]
설마 여기서 예진의 이름이 나올 줄 몰랐기에 매우 놀랐다. 아니다. 그러고 보면 최근에 수한의 스케줄이 온통 예진이었므로 예진의 이름이 나올 만했다.
"네. 아직 드라마 촬영이 한창이라서요."
[아. 그럴 것 같았어요.]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에 수한은 입안이 썼다. 수한이 말한 게 있음에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무슨 예능인지부터 설명하지 않으셨는데요?"
[아! 그랬죠. 유기견을 데려와서 키우며 함께 생활하는 관찰 예능입니다.]
프로그램 이야기가 나오니 태욱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자기 자식을 자랑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얼마나 재미있을지 열심히 설명해주는데 수한은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벌써 흥미가 생겼다.
'애초에 잘 되는 프로그램이기도 하고.'
"네. 그래서 여배우가 한 명이 필요하다는 거군요."
[네. 이왕이면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나와서 활동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특히나 성예진 씨 성격은 재미있기로 유명하니까 나오면 분명 반응이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수한은 성격 더러운 걸 이제는 재미있다고도 표현하나 싶어서 웃음이 나왔다. 수한은 더 이야기를 듣다가 회의를 해보고 연락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유기견을 키우는 프로그램이라고?"
"네.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문제는······."
"예진이를 섭외하고 싶다고?"
"네. 그렇습니다."
원래 이런 문제는 연예인에게까지 전달하지 않고 회사 선에서 자르는 경우가 많았다. 원래라면 시은을 추천해야 했지만, 수한은 '수상한 보스'의 일이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 특히나 현장에서 예진이 고생하는 걸 보고 있으니 더 미안한 마음도 들고 그랬다. 그것과 별개로 시청률은 20%를 훌쩍 넘어서 30%를 바라보고 있지만 말이다.
"일단 오늘 기분 안 좋을 때 가서 말해 봐."
수한은 성민의 작전에 웃음이 나왔다. 기분 안 좋을 때 가서 말하면 분명 거절할 테니까 어떻게서든 거절을 받아오라는 소리이기도 했다.
"예진 씨가 동물 안 좋아합니까?"
"아니. 근데 눈으로 보는 것만 좋아해."
하긴 그 성격에 동물을 좋아한다고 해도 열심히 돌봐주는 건 상상이 되지 않았다. 수한은 알겠다는 말을 한 뒤 스케줄을 확인하고 다시 예진이 있는 방송국 현장으로 달려갔다.
짝-!
뺨 때리는 소리가 찰지게 들리면서 수한은 붉게 물들어진 예진의 뺨을 보고 초조하게 입술만 달싹거렸다. 사이다 장면이기는 한데 예진의 부어오른 뺨을 보니 너무 아파 보였다. 서로 호흡이 맞지 않아서 맞은 거였다.
'아니, 애초에 호흡이 맞는 게 가능은 한가?'
그래서인지 예진의 독기가 더욱 진해졌다. 저건 연기가 아니라 실제 감정이 올라오는 거라서 수한은 소름이 돋았다. 수한은 눈앞에 뜨는 수치를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성예진- 스타성: S, 연기력: A, 가창력: D, 춤: D, 인지도: A, 기타: A, 성장 가능성: 52%]
이제는 독한 연기가 무르익었다.
"컷!"
수한은 준비되어있던 얼음주머니를 들고 예진에게 갔다. 맞은 게 어지간히 아프긴 한지 예진은 굉장히 열 받은 얼굴이었다. 물론 상대 배우도 만만치 않은 얼굴이라 수한은 예진이 일부러 뺨을 때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대체 뭘까.'
이런 식으로 스타성의 의미를 알고 싶지는 않았다. 수한이 뺨에 얼음주머니를 대주자 예진은 아프다고 하면서 가만히 있었다.
"저분이랑 사이가 안 좋습니까?"
"아니. 나쁘지 않은데?"
"네?"
"응?"
아니, 조금 전에 서로 노려보지 않았던가? 수한은 자신의 기억이 잘못된 건지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냥 서로 잠시 화난 것뿐이야. 금방 풀려."
"아. 네······."
"뭐야. 그 반응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수한은 여전히 얼음주머니를 대고 있는 예진을 지켜보다가 기분이 안 좋을 때 물어보라고 했던 성민의 말이 떠올랐다. 진짜 어떻게 보면 굉장히 약은 사람이었다.
"예진 씨. 오늘 제가 사무실에 들렀을 때 전화가 왔는데요. 이번에 새로 만들어진 예능 프로그램에서 예진 씨를 섭외하고 싶다고 합니다."
"무슨 예능인데?"
"댕댕이를 부탁해라는 예능 프로그램입니다. 유기견을 데려다가 치료하면서 함께 생활하는 관찰 예능 프로그램입니다."
"유기견?"
어쩐지 관심이 많아 보이는 반응이라 수한은 당황스러워 얼른 말을 붙였다. 어떻게서든 예진이 거절하게 해야 한다.
"네. 유기견을 돌보는 건 무척이나 힘든 일입니다. 상처받은 아이를 치료하는 거니까요."
"하긴 그렇긴 하지. 유기견이면 평범한 개보다는 더 힘들 테니."
"네. 게다가 몸도 아파서 아무래도 돌보기 힘들 거라 생각합니다."
막상 설명하다 보니 유기견들이 너무 안타까웠다. 수한도 어린 시절에 아무것도 모르고 개를 키운 적이 있었기 때문에 괜히 이입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런 수한을 예진이 눈치챈 게 문제였다.
"좋아. 할게."
"네?"
"한다고. 좋은 일이잖아. 촬영은 드라마 끝나고 하는 거지?"
수한은 순간적으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 4. 올라가는 길 > 끝
ⓒ 엔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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