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올라가는 길 >
'벌써 감정 잡는 건가?'
연기자의 정신이 발휘된 것 같아서 수한은 새삼 예진을 다시 봤다. 게다가 순간적으로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수치가 수한의 기대감을 제대로 심어주었다.
[성예진- 스타성: S, 연기력: A, 가창력: D, 춤: D, 인지도: A, 기타: A, 성장 가능성: 52%]
[성예진- 스타성: S, 연기력: B, 가창력: D, 춤: D, 인지도: A, 기타: A, 성장 가능성: 73%]
이런 식으로 반복적으로 수치가 변하는 건 처음 봐서 수한은 제대로 흥미를 느꼈다. 그것과 별개로 재원은 희망적인 얼굴을 했다. 그러나 예진의 저기압은 계속되었다.
"오빠. 어제 드라마 봤어?"
"어? 어. 물론 봤지."
"어땠어?"
"조, 좋았지?"
재원이 어서 도와달라고 눈짓을 보냈다. 회사에 도착해보니 이미 끝난 시간이었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물론 수한은 자기 전에 영상을 내려받아서 봤다.
"네. 다음 화도 시청자들의 흥미를 제대로 끌 것 같습니다."
"수상한 보스는?"
"예?"
"수상한 보스는 어땠는데?"
이 타이밍에 갑자기 수상한 보스가 나올 줄 몰랐기에 수한도 당황했다. 그러다가 예진의 부정적인 감정을 건드린 것이 수상한 보스임을 깨닫고 눈치 없는 사람처럼 말했다.
"올해 들어 손에 꼽는 수작이지요."
"내 생각에도 그렇더라."
잠을 제대로 못 잔 건지 예진의 눈 밑으로 그림자가 내려온 듯했다. 수한은 너무 처음부터 몰입한 게 아닐까 염려되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남이야 먹든 말든."
"예?"
수한이 어리둥절해 하며 재원을 보자 재원이 고개를 저으며 참으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부정적인 감정이 수한이 생각한 방향과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몰라. 잘 거야."
수한은 눈을 감기 전 자신을 제대로 보던 예진의 눈빛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째서 분노의 방향이 그에게 향해있는지 몇 번을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됐다.
도착한 촬영 현장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자극적인 장면을 너무 내보내서 부정적인 기사가 쏟아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가짜인 거 다 아는데 유난이래."
"방통위에서 경고 내리겠죠?"
"어차피 그때쯤이면 종영이야. 괜찮아."
"시청률도 자극적일수록 더 잘 나오니 어쩔 수 없잖아."
수한은 드라마를 한다는 사람들이 저런 태도를 보일 때면 마음이 심란해졌다. 그래도 이왕 내보내는 거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끌어낼 수 있는 걸 찍었으면 했다.
'하지만 그런 걸 찍으려고 했으면 애초에 이 드라마를 추천하지 않았겠지.'
어느 것을 취하는 게 옳으냐 갈등하는 와중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수한의 고개를 돌아가게 했다.
"컷!"
멜로 연기 때 들어본 적이 있던 마음에 안 든다는 감독의 목소리였다. 수한은 어느새 내려간 수치를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성예진- 스타성: S, 연기력: B, 가창력: D, 춤: D, 인지도: A, 기타: A, 성장 가능성: 73%]
예진의 연기력 성장은 눈이 부시게 빨랐지만, 그래서인지 불안정함이 공존했다. 예진도 악을 쓰다가 지쳤는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잠시만 쉬었다가 할게요."
감독이 고개를 거칠게 저으며 자리에서 나오자마자 수한이 물을 들고 예진에게 갔다. 얼마나 악을 열심히 쓴 건지 예진의 얼굴에 땀방울이 맺혔다. 예진은 신경질적으로 자리에 앉으며 물을 마셨다.
"예진아. 많이 힘들지?"
재원이 묻기가 무섭게 예진이 쥔 물통이 살짝 일그러졌다. 다른 건 몰라도 악력은 대단해 보여서 나중에 뺨 때리는 장면이 나오면 상대역이 굉장히 힘들어질 것 같다.
"짜증 나."
촬영장에서 처음으로 나온 부정적인 말이었다. 물론 그 방향은 감독이 아니라 예진 자신이었다. 부정적인 감정을 쏟아내고 있긴 한데 그 종류가 달랐다.
수한은 대놓고 힘들어하는 예진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직접 나서기로 했다.
"예진 씨."
"왜?"
예진은 고개를 돌리다가 막상 수한과 거리가 가까워지자 살짝 당황했다. 예진이 마주친 시선을 피하자 수한은 제법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정이 틀렸습니다. 여기서 예진 씨가 느껴야 할 감정은 질투가 아닙니다."
수한은 수상한 보스를 봤다고 말한 예진의 말에서 단서를 얻어 그리 말한 거지만, 예진은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기에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를 이용하고 버린 남자에 대한 분노입니다. 그 차이를 잘 모르시는 것 같아서요."
수한도 연기해본 사람이기에 진지하게 말할 수 있었다. 예진은 잠시 생각에 젖은 듯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진이 성격이 못되어서 그렇지 머리가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알겠어.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나를 이용하고 버린 남자에 대한 분노."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며 감정 조절하는 예진을 보며 수한은 크게 안도하였다. 물론 가끔 자신과 눈이 마주쳤을 때 보내는 눈빛은 무서웠지만, 어쩐지 느낌이 좋았다.
"다시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이번에도 비슷한 연기를 했으나, 조금 더 처절함이 느껴졌다. 이글거리는 눈빛에 담긴 독기에 수한은 옆에서 입을 벌리는 재원을 보며 함께 웃었다.
[성예진- 스타성: S, 연기력: A, 가창력: D, 춤: D, 인지도: A, 기타: A, 성장 가능성: 52%]
[성예진- 스타성: S, 연기력: B, 가창력: D, 춤: D, 인지도: A, 기타: A, 성장 가능성: 73%]
여전히 수치는 오르락내리락했지만, 수한은 이번에는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였다. 예진의 연기력은 이전보다 더 좋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촬영이 끝났을 때 수한은 예진의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뿌듯하게 웃었다.
"김수한 오늘 끝나고 죽 사줄게."
"예진아. 나는?"
"오빠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수한은 왜 하필 죽을 사주냐고 묻고 싶었지만, 요새 계속해서 예진에게 죽을 사줬던 게 떠올라서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수한은 죽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
['달보드레' 화제성, 시청률 다 잡았다!]
미친듯한 드라마 속도와 더불어 예진의 연기력까지 물이 오르니 시청률이 계속해서 올라갔다. 수한은 사무실 내에서도 올해 예진의 연기상을 기대하는 것을 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좋아하는 건 촬영 현장에 있는 재원이었다.
"김수한. 너 연기 선생 출신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수한은 대놓고 놀리는 성민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요새 계속해서 예진의 스케줄만 나갔더니 죽겠다.
"농담 아니고 진짜야."
"예?"
"예진이가 연기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잖아. 네가 붙으니까 확실히 뭔가 달라졌던데?"
"저는 그냥 예진 씨가 가지고 있던 연기의 열정이 되짚어준 거뿐입니다."
수한조차 예진의 연기 열정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 그에 따른 결과가 더 큰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너 매니저가 천성인가 보다. 예진이처럼 자존심 높은 사람에게 그런 열정을 심어주는 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 어쨌든 간에 이거 소문 더 커지면 너한테 연기 지도받고 싶다는 배우들 늘어나겠어. 게다가 네가 워낙 대본도 잘 보니까."
"이미 예진 씨만으로도 충분하니 그만 소문내십시오. 소문낸 거 실장님인 거 다 압니다."
"나 진짜로 아니래도?"
수한은 이번 일뿐만이 아니라 지난번 시은과 연기 대결을 했던 때까지 포함해서 소문이 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그 소문을 들은 명훈은 뒤에서 어이없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수한과 대학로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기에 저 소문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알기 때문에 나온 비웃음이었다.
당연히 그런 명훈을 수한은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수한은 오랜만에 자리에 앉아있는 명훈을 향해 웃어주었다.
"명훈 씨가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수한은 자질구레한 건 다 명훈에게 넘겨주었다. 물론 하나같이 영양가 없는 일만 골라서. 명훈으로서는 이가 갈릴 상황이지만, 애초부터 먼저 수한을 건드린 게 명훈이었다. 수한은 명훈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는 걸 확인한 후에야 자리로 돌아왔다.
"악마 같은 놈. 쟤 그만두면 다 네 탓이다."
"누구 말하는 겁니까? 접니까?"
"그래. 너다."
수한이 무슨 소리냐고 어깨를 들썩이자 성민은 종이컵에 담긴 믹스커피를 빨대로 저으며 혀를 찼다. 막상 수한의 그러한 행동을 봐주고 있는 게 성민이면서 말이다. 수한은 계속해서 예진에게 보여줄 댓글을 추리다가 한 기사를 발견하고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
['스케치' 기대를 채우지 못한 종영, 공중파 예능에 몰락]
볼 때마다 안색이 어둡더니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다. 수한은 다음에 만나면 위로의 말이라도 전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았다. 놀랍게도 댓글 하나 달리지 않았다. 정말로 무관심 속에서 종영되었다.
'원래 이 세계가 이렇게 냉정했지.'
수한은 자신도 모르게 명훈을 쳐다보게 되었다. 명훈은 눈은 모니터에 집중하면서도 입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수한은 굳이 소리를 내지 않아도 그 입에서 뭔가 나오는지 알았다. 수한을 향한 원망이었다.
수한은 요즘은 얌전한 대표 남일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대표가 한낱 신입 매니저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다음에 또 그런다면 나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지.'
저번 일로 성민이 방패까지는 되어줄 수 있으나, 크게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은 알게 되었으니 결국 남에게 의지해서는 안 됐다.
수한은 이태욱 PD를 만난 이후로 꾸준히 과거에 흥했던 프로그램들을 적어두기 시작했다. 이태욱만큼이나 대중에게 이름을 널리 알린 PD가 없으므로 잘 나가는 프로그램 전체를 그냥 머릿속에 박아두기로 했다. 그러나 막상 적어도 지금 당장은 이용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대학로에서 너무 오래 연극을 했어.'
그 순간이 이리도 후회가 될 줄은 몰랐다. 그나마 희망적인 건 성민이 보여준 두 개의 오디션 공고였다. 아직 어디로 확정했다는 말이 없었기에 수한은 차분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어차피 현재 이지훈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은 수한이니 적어도 수한에게는 결과를 말해줄 것이다.
'아니지. 괜히 기다렸다가 뒤통수라도 맞으면 큰일이지. 언제부터 내가 수동적인 사람이었다고.'
수한이 성민의 자리로 가자 수없이 많이 쌓인 대본이 보였다. 수한은 전에도 본 적이 있던 대본들에 그게 다 시은에게 온 대본이라는 걸 알았다. 여전히 그중에는 건질만 한 게 없었다. 수한은 새삼 실장의 자리에 있는데도 일일이 시은을 챙기는 성민의 열정에 감탄했다.
"나는 네가 대단하던데. 어떻게 다 챙기고 다니냐?"
"그렇습니까?"
"하긴 신입이면 그 정도 열정은 가져야지. 그래도 적당히 해야지. 안 그러면 몸에 먼저 이상 온다?"
마치 경험담인 것처럼 이야기해서 수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근데 작품을 이렇게 빨리 고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게 말이야. 시은이 상태가 또 이상해."
"예?"
"드라마에 집중하느라 신경 쓰지 감정의 폭풍이 다시 휘몰아치고 있어."
수한은 도와달라는 말을 이렇게 돌려서 하는 건 처음 봐서 쓰게 웃었다.
< 4. 올라가는 길 > 끝
ⓒ 엔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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