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 탑스타-32화 (32/186)

< 4. 올라가는 길 >

수한은 멜로디를 변형해 온 소원의 노래를 들으며 신중하게 고민하였다. 어떻게 손을 대면 댈수록 더욱 좋은 노래가 나오는지 신기하였다. 확실히 소원은 작곡에 재능이 있었다. 달리 기타에 S가 나온 게 아니었다. 수한은 나중에 탑스타가 되어있을 소원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흐뭇한 미소가 그려졌다.

"뭘 그렇게 들어?"

예진의 촬영이 한창 이루어져 가 있는 가운데 소원이 보낸 곡을 듣고 있던 거라서 수한은 이어폰을 뺐다. 예진은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수한을 봤다.

'왜 지난번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지?'

상대만 달라진 기분이다. 물론 서운한 표정을 지었던 시은과 다르게 예진은 대놓고 탐탁지 않아 했다. 애초에 두 사람의 성격이 너무 극과 극이었다.

"그냥 한소원 씨가 보내준 노래 듣습니다."

"나도 들어볼래."

지난번에 소원과 만난 이후로 지속해서 연락을 주고받는지 수한은 소원에게서 예진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신기했다. 특히나 예진이 너무 잘해준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자신이 동명이인을 소개했나 자꾸만 의심하게 되었다.

수한은 자신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이어폰을 가져간 예진의 모습에 어쩔 수 없다는 듯 핸드폰에 담긴 음악을 틀어주었다.

'이제 이런 것도 너무 익숙해져 버렸네.'

예진은 조금 더 집중해서 듣고 싶었는지 눈을 감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곡은 리듬감이 있는 곡이었다. 그러고 보니 예진은 아이돌 노래도 안 좋아하는 것 같던데 소원의 노래는 꽤 기분 좋게 듣는 것 같아서 신기했다.

"목소리 진짜 예쁘다."

"예진 씨도 목소리는 예쁩니다."

"예진 씨도 목소리는? 목소리만?"

단번에 날카로워지는 눈초리에 수한은 당황하지 않은 척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얼굴은 당연하니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

예진이 안 예쁜 건 성격밖에 없었다. 이런 말을 자주 들었을 텐데도 예진은 흡족하게 웃으며 그렇지? 하며 좋아했다. 어떻게 보면 사람이 참 까탈스러운데 어떻게 보면 또 단순하기도 했다. 오히려 이런 스타일이 더 대하기 쉬운 걸지도 모르겠다. 예진은 노래를 다 듣고 나서 기분 좋게 웃었다.

"이거 소원이가 작곡한 거라고?"

"예."

"대단한 재능이네. 그래서 네가 맡는 거구나?"

"한소원 씨가 그런 것까지 이야기했습니까?"

"어······ 그랬지."

둘이 많이 친해진 것 같아서 흐뭇하게 웃는데 그것과 별개로 예진은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지 고개만 까딱거리고 더는 말을 이어나가지 않았다. 수한은 괜히 예진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 핸드폰을 옆에다가 가지런히 정리해놓고 촬영 현장을 살폈다.

'오늘도 어지간하게 난리겠구나.'

아무리 막장 드라마라고 하지만, 너무 자극적이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보는 거겠지만, 그래도 염려는 되었다. 시청자들의 반응을 보니 안 그래도 그에 관해 반발이 조금씩 나오던 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오늘은 예진이 당하는 날이 아니었다. 고구마 회차가 있다면 사이다 회차가 있는 날이 있다. 오늘이 사이다 회차가 나오는 날이었다.

"그래도 작가님이 글을 잘 쓰는 분이긴 한 것 같아요."

"그렇지? 걍약 조절이 쉬운 편이 아니니까."

오늘은 자기가 당하는 날이 아니라고 신났다. 감정 표현이 참 솔직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나온 대본에 예진은 또 죽을 것처럼 시무룩해졌다. 뒤에서 대본을 함께 보고 있었기에 수한은 오늘은 또 얼마나 울게 될지 걱정되었다.

"정말 평생 흘릴 눈물 여기다가 다 쏟는 것 같아."

"그래도 예진 씨가 금방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라 다행입니다."

이것 또한 어떻게 보면 뜻밖에 모습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우는 것만큼은 예쁘게 잘 울었다. 안약의 도움이 필요 없이 1분 안에 눈물을 뚝 떨어뜨리니 대단했다.

"무슨 생각을 하면 그렇게 눈물이 잘 나는 겁니까?"

"신인 배우한테 광고 모델 빼앗겼을 때?"

"예?"

수한이 농담하는 거냐고 재원에게 눈짓을 보내자 재원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었다.

"그때 정말 자존심 상했었지. 심지어 걔가 나보다 연기도 잘해. 그러고 보니 박시은 걔도 비슷한 경우잖아?"

예진은 지금도 그 당시를 떠올리면 화가 나는지 눈에 힘을 팍 주었다. 눈물을 흘리는 이유도 딱 예진다워서 수한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래도 이제 얼마 안 가 흑화하겠군요."

대본 끝을 보니 여자 주인공이 진실을 다 알게 되는 장면이 나왔다. 그다음 화부터는 본격적으로 복수를 다짐하며 사이다를 안겨줄 시간이었다. 여기서부터 정말로 예진의 연기력이 드러나게 되어있었다. 이 연기를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서 앞으로 예진에게 쏟아질 평가가 달라진다.

'시청률도 계속 상승 중이니 그 정도가 더 심하겠지.'

사무실 내에서는 30%까지 가는 거 아니냐고 기대하였다. 물론 주말 드라마가 아니어서 그 정도까지 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주말 드라마와 같은 속도에다가 비슷한 흥미를 제공하니 어떻게 보면 가능한 일일 수도 있겠다.

'그러고 보니 이 작가는 내가 매니저 일을 할 때도 승승장구했지?'

미래에서도 막장 드라마의 대가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이니 수한은 괜히 소름이 돋았다. 수한은 새삼 미래 일이 떠오르는 현재를 신기해하면서도 카메라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예진을 지켜봤다. 재원이 고대했던 순간인 만큼 흑화 장면이 더 잘 살게 예진은 처절하게 울며 괴로워했다.

**

"예진아. 내일 잘할 수 있지?"

"몰라."

예진은 몇 번이나 부담감을 안겨주는 재원 때문에 짜증이 났다. 언제부터 자신한테 연기를 기대했다고 요즘 들어 변한 재원 때문에 스트레스가 밀려 들어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부담감을 만들어낸 게 자신이라는 걸 알아서 한숨이 나왔다.

'괜찮은 척하느라 죽겠네.'

아직 미숙하기는 하지만, 멜로 연기가 나아졌다는 것에 모든 사람이 의미를 느꼈다. 예진 또한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아서 연기가 재미있으면서도 욕심이 생겨 더욱더 연기를 잘하고 싶었다. 예진은 집에 가기 전까지 부담감을 주던 재원과 다르게 옆에서 담담하게 서 있던 수한이 떠올랐다.

'오히려 그게 더 신경 쓰이잖아.'

예진이 조금 더 열정을 가지고 연기를 할 수 있게 한 사람이 수한이라서 예진은 수한을 신경 안 쓸 수가 없었다. 예진이 집에 도착하자 딩동 소리가 들리면서 문자 메시지가 들어왔다.

[편하게 마음먹고 주무시면 될 겁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그저 문자일 뿐인데도 수한의 목소리가 읽히는 건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다. 내일 예진은 최대한 안 좋은 생각을 품고 촬영 현장에 갈 생각이었다. 그래야 감정이 잘 올라올 것 같았다.

'박시은은 순간적으로 감정 끌어올리는 거 잘하던데.'

예진은 자기 전에 시은이 주연으로 활약한 '수상한 보스'를 보고 자기로 했다. 수한이 일부러 보여주지 않았건만 부정적인 감정을 쌓기 위해서 그리하였다.

"뭐야. 짜증 나게 재미있네."

대결에서 진 게 당연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시은은 연기를 매우 잘했다. 왜 박시은이 요즘 많이 언급되는지 이해가 될 정도로 캐릭터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대결에서 진 당일에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실제로 드라마로 들어가니 완전히 패배했다. 그런데 웃긴 건 다음이었다.

'왜 화가 나지 않지?'

오히려 좋은 패배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속이 시원하였다. 게다가 예진도 수한과 함께 최선을 다해 연기에 임해서 아쉬움이 전혀 없었다. 본래 의도와 다르게 감정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게 아닌데?'

멜로 연기가 시급할 때 느꼈던 설레는 감정이 왜 피어오르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예진 자신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왔다. 예진은 다시 한 번 수한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생각해보니까 막상 그날도 도움이 안 됐잖아?'

그런데도 이상하게 연락하고 싶은 마음이 왜 드는지는 모르겠다. 드라마 속 시은의 감정에 동화가 된 건지 예진도 이해가 잘 안 갔다. 예진은 수한에게 연락하기 위해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갑작스럽게 온 메시지에 화들짝 놀랐다.

"뭐야. 소원이잖아."

드라마 잘 보고 있다는 메시지였다. 예진은 시간을 확인하고 피식 웃었다. 드라마가 딱 끝날 시간이었다. 원래 본방송을 보려고 일찍 들여 보내준 거였는데 내일 있을 촬영 걱정하느라 결국 본방송을 보지 못했다.

[매니저님한테 들었어요. 제 곡 듣고 좋다고 말해줬다면서요? 고마워요. 언니.]

예진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분명 고맙다고 인사를 받은 건데 왜 들떴던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기분이 나빠지는 건지 이해가 안 되었다. 그보다 집에 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소원에게 그 말을 전달했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뭐야. 한소원이 진짜 이상형이라서 이 시간에 연락한 거야?'

왠지 모르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

"김수한이! 오랜만이다!"

"네. 실장님."

수한은 어제 늦게 끝난 촬영 때문에 사무실에서 잤다. 예진을 집에 데려다주니 집에 가기도 모호해져서 재원과 함께 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벌써 아침이라 당황스러웠다. 수한은 제 몸에 덮여있는 담요를 거둬내며 화장실로 걸어가 거울로 얼굴을 확인했다. 얼굴이 퉁퉁 부었다. 수한은 거울 너머로 서 있는 성민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깜짝 놀라 죽는 줄 알았다.

"오늘 또 가봐야 하나?"

"네. 죽겠습니다."

"그래도 잘하고 있다고 재원이가 칭찬 엄청 하던데."

"저보다는 선배님이 더 고생이죠."

"그러게. 이 드라마가 이렇게 빡빡할 줄은 우리도 몰랐지. 그래도 예진이가 연기를 잘하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이야."

"그래도 아직은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촬영할 부분이 흑화하는 장면이었다. 부담감을 줄까 봐 문자 하나만 보냈다. 워낙 옆에서 재원이 부담감을 심어주었기에 예진의 미간이 깊어지는 게 보였다.

재원은 정작 눈치를 봐야 할 때 제대로 보지 않았다.

"그렇긴 하더라. 재원이가 아주 불안해해."

"그러고 보니 선배님은요?"

"사우나 갔어."

수한은 생각하면 할수록 재원이 치사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갈 거면 같이 좀 데려가지. 사우나라고 하니까 괜히 몸이 찝찝한 것 같고 그랬다.

수한은 대충 얼굴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사무실에 놔둔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갖춰둔 향수를 뿌리니 어제 사무실에서 잔 사람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예진이가 향에 민감하긴 하지."

"그런 것도 맞춰야 하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수한은 앞으로 나오라는 재원의 메시지를 받고 서둘러 사무실에서 나왔다. 출근 시간대라 조금 더 서두르게 움직여야 했다. 수한이 지름길로 빠르게 운전하니 재원은 몇 번이나 감탄했다.

"나도 지름길 좀 알려줘라."

"나중에 여유 있을 때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보다 선배님. 사우나 갈 때는 저도 좀 데려가십시오."

"아! 피곤해 보여서 조금 더 자라고 그런 거였지."

누가 봐도 그런 게 아니었다. 수한은 그 변명을 애써 받아들이며 주차장에 들어서다가 아침부터 저기압인 예진을 발견했다.

< 4. 올라가는 길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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