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 탑스타-31화 (31/186)

< 4. 올라가는 길 >

"누구 들으면 오해하겠습니다."

"네가 오해하지 않으면 됐지."

결과적으로 들어본다면 이번에도 도와달라는 뜻이었다. 수한은 답답해 죽겠다는 듯 한숨만 내쉬는 예진을 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문제가 뭡니까?"

"얼굴을 봐도 하나도 안 설레는데 어떻게 해?"

수한은 상대역의 남자를 떠올리고는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이상형은 사람마다 다른 법이니까. 게다가 예진처럼 깐깐해 보이는 성격은 이상형 기준도 굉장히 높을 것 같았다. 그래도 멜로 연기에 문제가 생긴 거니 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이상형이 어떻게 됩니까?"

"얼굴은 필요 없어."

"네? 당연히 얼굴 볼 줄 알았는데요?"

"이 연예계에 쭉 있어 봐. 얼굴만 볼 만하고 인성은 쓰레기인 놈들이 널려있어."

수한은 순간적으로 자기 소개하냐고 물을 뻔했다. 물론 수한은 명훈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았다.

"그럼 어떤 사람이 좋습니까?"

"내가 신뢰할 수 있는 남자?"

설마 했는데 역시나 눈이 한층 더 높았다. 수한은 테이블 위에 방치되어있는 죽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는데?"

"배 안 고픕니까?"

"하나도 안 고픈데?"

꼬르륵. 말은 거짓말을 할지언정 배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수한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겨우 참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죽을 들고 부엌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예진의 뱃속에서 다시 울리는 꼬르륵 소리에 결국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나 배고프다. 됐어?"

"네. 됐습니다."

죽의 양이 많긴 했지만, 반으로 나눠서 포장했기 때문에 수한은 눈앞에 보이는 그릇에다가 죽을 담아서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일단 먹으면서 다시 이야기합시다."

예진은 촬영장에서 먹었던 것처럼 맛있게 죽을 먹었다. 보기만 해도 배부를 정도여서 수한이 흐뭇하게 웃고 있자 이번에는 예진이 반대로 물었다.

"네 이상형은 어떻게 되는데?"

"착한 사람이요."

예진은 누군가를 떠올린 건지 머릿속이 복잡해 보였다. 수한이 의아해하며 보고 있자 예진은 신경질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거 범죄야."

"네?"

"몰라."

수한이 황당해하건 말건 예진은 그릇을 설거지통에 담가놓고 다시 소파로 와서 앉았다. 확실히 죽을 먹어서 그런지 조금 더 화를 낼 힘이 있어 보였다.

"그래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 사람을 이상형이라 생각하라는 그런 거 아니지?"

"그러라고 하려 했는데 신뢰할 수 있는 남자가 이상형이니 안 되겠네요. 연애는 언제 해봤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나는데?"

설마 이런 쪽으로 문제가 있을 줄 몰랐기 때문에 수한은 깜짝 놀랐다. 물론 예진이 워낙 까탈스러운 성격이라 웬만한 남자와 연애를 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날 정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럼 예전에 설렜던 기억은 있습니까?"

"아니. 기억 안 나는데."

경험에서 감정을 끌어오는 건 틀렸다. 수한은 결국 최근에 한 영화나 드라마를 검색하게 되었다. 옆에서 예진은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 해탈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순순히 수한을 기다려주었다.

[심쿵하게 만드는 드라마 추천! 수상한 보스!]

수한은 조용히 다른 글을 찾았다. 괜히 쓸데없이 보여줬다가는 욕만 먹는다. 오히려 약 올리냐고 면박을 당할 게 뻔했다. 수한은 추천하는 몇 개를 골라서 틀었다. 당연히 예진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팔짱을 끼며 TV 화면을 봤다. 수한은 처음에는 꼼지락거리다가 어느새 집중하는 예진에 살짝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걱정도 되었다.

'이랬는데도 감정을 못 잡으면 어쩔 수 없는 건가?'

그렇다고 누구를 소개해서 연애하게 할 수도 없으니 문제였다. 일정 기간이 지나도 예진이 감정을 못 잡는다면 감독도 결국은 포기하고 넘어갈 거다. 애초에 드라마 전개 속도가 저세상이라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수한은 잔잔하게 흐르는 드라마를 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요즘에 계속 늦게 퇴근해서 그런지 쉽게 잠이 쏟아졌다.

"많이 다친 건 아니죠?"

"네. 그건 아니······."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순간 알 수 없는 공기가 흐르면서 두 사람의 흔들리는 눈빛이 보였다. 손가락만 부딪쳤을 뿐인데도 긴장감이 흐르는 분위기에도 예진은 턱을 괴며 지루하다는 의미로 하품을 했다.

"대체 언제까지 이걸 보고 있어야 하는 거야?"

예진은 수한을 나무라듯이 말하다가 어느새 소파에 기대 잠이 든 수한을 발견했다. 도와 달랐더니 잠이나 자는 모습에 예진은 혀를 찼다. 이래서야 아무 성과 없이 내일 현장에 돌아가게 생겼다. 예진은 수한을 대놓고 깨우려다가 얼마 전에 소원에게서 온 문자를 떠올렸다.

'한소원의 매니저로 간다고 했지?'

솔직히 말해 수한을 처음부터 마음에 들어 한 건 아니었다. 첫날부터 여자 아이돌에게 눈이 팔렸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마땅치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봐도 웃긴 건 그때 그 한눈 팔렸던 여자 아이돌이 한소원이라는 거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일관성 있는 인간이었다. 게다가 이상형이 착한 여자라니.

‘누가 봐도 한소원이 이상형이잖아?’

예진이 봐도 소원은 너무 착하고 순한 애였다. 이 연예계와 어울리지 않게.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 인간은 신뢰가 된단 말이지?'

이제까지 말을 허투루 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묘하게 믿음이 가는 면이 있었다. 게다가 예진이 도와달라고 하면 지금처럼 열심히 시간을 내어주니 싫어하려고 해도 싫어지지 않았다. 특히나 좋은 댓글만 골라서 읽어주는 걸 보면 자기 일처럼 예진의 일을 기뻐해 주는 것 같아서 예진도 내심 기분이 좋았다.

"좀만 더 보다가 깨우지 뭐."

예진은 수한이 자는 모습을 힐끔거리며 다시 드라마를 봤다. 아주 조금이지만, TV 속 여자 주인공의 간질거리는 감정 정도는 이입이 되었다.

**

"잠잘 거면 집에 가서 자."

퉁명스러운 말투의 목소리가 수한이 기억하는 마지막 예진의 모습이었다. 수한은 결국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어 한숨만 내쉬었다. 재원 또한 수한과 비슷한 걱정을 하기에 연속 한숨 쉬기에 참여했다.

"아무래도 흑화에 모든 걸 걸어야겠지?"

"아무래도요."

얼마나 마음이 불안한 건지 재원은 같은 말만 반복했다. 물론 수한도 조금 전처럼 반복해서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예진이는 독기 있는 거 잘하니까 괜찮을 거야."

수한은 새벽부터 촬영하는 스케줄의 빡빡함을 느끼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예진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오늘의 예진은 화장기 전혀 없는 얼굴로 나타났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여배우를 하려면 민낯도 저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다. 예진은 카메라를 아래에 대고 찍어도 굴욕적인 장면이 찍히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미인이었다.

"예진아. 뭐 먹었어?"

"어제 김수한이 사 온 죽 먹고 왔어."

어제 잠을 못 잤는지 얼굴을 하얗게 질려있는데 또 표정은 밝아서 재원은 살짝 놀란 눈으로 수한을 봤다. 어제 무슨 성과가 있었냐고 묻는 얼굴이었는데 수한이 기억하는 건 어제 자다가 쫓겨난 것밖에 없었다.

"아!"

"왜? 뭐 놓고 왔어?"

"그냥 아! 한 건데요."

언제 기분이 좋았다는 듯이 싸늘한 표정을 짓는 예진 때문에 수한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말을 얼버무렸다.

'난 또 어제 봤던 드라마가 도움이 됐나 했지.'

저 모습을 보면 또 아닌 것 같아서 긴가민가했다. 촬영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메이크업을 받는 예진을 뒤로하고 수한은 촬영 분위기를 살폈다. 예진 때문에 촬영할 게 밀려서 어제보다는 분위기가 차분했다. 수한은 오늘도 잘 부탁한다며 스태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사를 하며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 도왔다.

"저 매니저는 매번 볼 때마다 저러네요. 사람이 되게 좋은 것 같아요."

예진의 메이크업을 살피던 재원에게 하는 말이라 재원은 자기 일처럼 뿌듯해했다. 잘 이끌어주면 앞으로도 잘할 것 같았다.

"예진 씨. 지금 웃으시면 안 돼요."

"네. 알고 있어요."

가수들처럼 무대에 서는 것도 아니기에 메이크업은 금방 끝났다. 이제 문제는 연기였다.

"예진아. 기분 괜찮아?"

"안 괜찮아도 해야지."

여전히 말은 밉게 했지만, 어쩐지 수한은 감이 좋았다.

"그럼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어제 멈춘 장면에서부터 다시 촬영이 시작되었다. 찍을 장면은 남자친구를 위해 온갖 희생을 다 하면서도 남자친구만 믿고 살아가는 여자 주인공의 모습이었다.

"저는 철수 씨만 있으면 괜찮아요."

예진이 대사를 치면서 간절하게 상대 남자를 보았다. 아직 여자 주인공의 뒤통수를 치기 전이라서 남자는 최대한 달콤한 말로 여자 주인공을 다독여주었다. 조금 더 그에게 이용당하기를 바라며.

'지금 내 눈이 잘못됐나?'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수한은 어딘가 달라진 예진의 눈빛에 깜짝 놀랐다. 연기는 어제와 비슷해서 겉으로만 보면 별 차이를 못 느낄 수 있는데 눈빛이 확실히 달라졌다. 물론 대본에는 그 한 사람밖에 안 보인다는 듯 조금 더 애절하게 보라고 쓰여있었지만, 수한은 조금의 변화라도 보인 것에 희망을 느꼈다. 그건 감독도 마찬가지였는지 기분 좋게 컷 소리를 냈다.

"예진 씨 좋아요! 다음에는 감정을 더 깊이 가줬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도 좋습니다."

수한은 어제 예진에게 보여주었던 드라마 목록을 확인했다. 이런 식으로 주입식으로라도 계속해서 보여주면 언젠가 빛을 발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적인 결론이 났다. 한 번 밀렸던 촬영이 빠르게 진행되자 다시 촬영장 분위기가 좋아졌다. 수한은 한 사람의 연기로 변한 현장 분위기에 감탄하다가 다음 쉬는 시간이 머지않은 것을 인식했다.

"수한아. 아까 들었는데 예진이가 건강 주스가 마시고 싶대."

"네? 건강 주스요?"

"어. 요즘 체력이 안 좋은 것 같다고 그런 거 마시거든."

"네. 그럼 제가 지금 얼른 가서 사 오겠습니다."

역시 예진은 주스 하나도 평범한 걸 마시지 않았다. 나중에 예진이 연애를 하게 되면 남자가 꽉 잡혀서 살 게 뻔했다.

'상대가 성예진 씨면 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수한은 방송국 근처에 있다는 건강 주스 판매장을 찾다가 오늘도 힘없이 방송국으로 걸어가는 이태욱 PD를 발견했다. 수한의 목표는 그의 눈도장을 찍는 것이기에 챙겨온 비타민 음료를 들고 그의 앞에 다가갔다.

"오늘 또 여기서 뵙네요."

"네······ 요즘 자주 보는 것 같네요."

"요즘 제 배우가 드라마 촬영 중이거든요."

"제 배우······."

"아! 아니! 제가 담당한 배우는 아닌데······."

"아니요. 어감이 듣기 좋아서요. 저도 제 프로그램이라는 말을 좋아하거든요."

"묘한 곳에서 닮은 구석이 있네요. 피곤해 보이시는데 비타민 음료라도 드시겠습니까?"

수한이 챙겨온 비타민 음료를 내놓자 태욱은 생각이 많아 보였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수한이 건네주는 비타민 음료를 받아 마셨다. 음료만 마셨을 뿐인데도 퀭했던 눈이 조금은 총명하게 빛나는 듯했다. 그러나 총명함도 잠시였다. 피곤이 금세 그 총명함을 잡아먹었다.

"그럼 오늘도 힘내십시오."

"네······."

수한은 이런 식으로 매일 만나면 없던 정도 생기지 않을까 기대하며 무사히 건강 주스를 구해 촬영 현장으로 갔다. 마침 쉬는 시간이었는지 예진이 자리에 앉아있었으나, 건강 주스답게 설탕을 넣지 않아 맛이 더럽게 없었는지 수한은 예진에게 맛에 대한 불평, 불만을 듣게 되었다.

< 4. 올라가는 길 > 끝

ⓒ 엔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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