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 탑스타-30화 (30/186)

< 4. 올라가는 길 >

새벽부터 촬영 현장은 훈훈했다. 다음 날 시청률이 잘 나왔기 때문이다.

['달보드레' 9.4%로 첫 화부터 시청률 1위]

막장 드라마는 어느 세대든 통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좋은 시작이었다. 대본리딩에 이어 1화에서도 예진은 좋은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그 반응은 당연히 즉각적으로 인터넷을 통해 나타났다.

성예진 악마한테 영혼 판 거 아님?

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ㅇㅈ

그러나 아직 성예진의 연기력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여전했다.

아직 더 기다려봐야 함. 저러다가 무너진 적 한두 번이 아님

ㄴ2222222 특히 멜로 들어가면 존나 못함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과거에 돌아오기 전부터 궁금했었다. 그냥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하기에는 배우만 집요하게 공격하니 안티인가 의심도 되었다.

"드라마 덕후들이야. 원래 그래. 세상이 힘드니 그렇게 화풀이하는 거지. 그래도 악플러보다는 낫잖아."

수한이 보기에는 어떨 때는 악플러보다 더 나쁜 데가 있었다. 악플러는 자신이 악플러라는 사실을 알기라도 하지, 이건 때때로 자각도 없다.

"예진이 잘하고 있으니까 앞으로만 쭉 잘하면 그런 사람들도 사라질 거야."

수한은 과연 그럴까 싶었다. 수한이 과거에 키우던 연기자들도 하나같이 연기를 잘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이런 식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늘 붙었다. 수한은 새삼 연기의 길을 포기해서 다행이라 여겼다.

'내 정신에는 이런 걸 보고도 모른 척하기 힘들지.'

"그보다 멜로 연기를 못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거 사실인가요?"

수한은 농담으로 가볍게 말하다가 어? 하는 재원의 반응에 웃음을 지워냈다. 설마 진짜라고?

"사실 멜로 연기 이전에 예진이가 연기도 못한 건 사실이잖아."

"근데 이 드라마는 멜로씬이 진하지 않습니까?"

막장 드라마라서 그런지 전개도 빠른 편이었다. 수한은 새로 나왔다던 달보드레 대본을 가져와 읽어보기 시작했다. 촬영 현장에 나와 있는지라 대본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달보드레- 대중성: S, 화제성: S, 평균 시청률: 32%, 성장 가능성: 82%]

다른 대본을 봐도 능력치는 여전했다. 그건 둘째치고, 수한은 내용을 읽고 나서 크게 안도하였다.

'아직은 이렇다 할 전개가 시작되지는 않는구나.'

여자 주인공이 악인에게 당하면서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니 아직은 당하는 장면들만 보였다. 수한은 새삼 이 대본을 추천한 게 또 미안해졌다. 안 우는 장면이 없을 정도로 여자 주인공은 울고 또 울었다.

'그래서 살이 빠진 건가?'

수한은 먹을 거라도 챙겨가야 하나 고민하다가 예진의 입맛이 없을 수도 있을 것을 대비하여 죽을 사 오기로 했다. 수한이 재원의 허락을 받고 현장에서 빠져나오자 벌써 해가 떠 있었다. 나오기 전만 해도 컴컴했기에 수한은 새삼 시간이 빨리 간다는 생각에 뿌듯하게 웃었다.

'피곤하긴 해도 보람차단 말이지.'

방송국 근처에 있는 죽집으로 가니 방송국 근처라서 그런지 사람이 많았다. 워낙 밤낮이 없는 곳이라 수한은 하나같이 피곤해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에 쓰게 웃었다.

'나도 딱 저 사람들처럼 보이겠지?'

수한은 재원에게서 예진이 좋아하는 죽을 들어왔기에 자신 있게 죽을 주문하다가 앞에서 반쯤 죽어가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결국은 수한이 거절하는 전화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태욱 PD였다.

"안녕하십니까."

수한은 일부러 밝게 인사를 하며 이태욱 앞에 앉았다. 전날에 밤샌 건지 태욱은 비몽사몽 한 얼굴로 수한을 쳐다봤다.

"제가 연락 달라고 했는데 반대로 거절하게 되어서 죄송했습니다."

"아니에요. 뭐. 이런 일 한두 번도 아닌데."

말을 섞기도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젓는 모습에 수한은 혹시나 해서 가지고 다녔던 비타민 음료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제야 수한이 눈에 들어오는지 태욱의 눈이 껌뻑거렸다.

"다음에 새 프로그램 하게 되면 다시 연락 주세요. 그때는 제가 어떻게서든 허락을 받아내겠습니다."

수한은 주문한 죽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쪽으로 들어가 죽을 받아왔다. 수한은 태욱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 서둘러 현장으로 돌아갔다. 현장으로 가자 담요를 꽁꽁 싸맨 채 몸을 바르르 떨고 있는 예진이 보였다. 잠시 대기였다.

"예진아. 뭐라도 먹을래? 아침 안 먹고 바로 왔잖아."

"됐어. 입맛 없어. 그리고 바로 촬영이잖아."

여자 주인공이 나오는 장면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대기 시간이 길어지면 다른 장소에 가서라도 대기를 할 텐데 얼마 안 가 다시 촬영해야 해서 예진은 현장에서도 벗어나지 못했다. 수한은 창백해진 예진이 걱정되어 막 사 온 죽을 꺼냈다.

"제가 죽을 사 왔습니다."

"죽?"

수한이 웃으면서 죽을 내밀자 예진은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어서 내놓으라고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누가 보면 버릇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수한은 힘이 없어 최소한으로 움직인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사실 이렇게 촬영이 많으면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수한이 직접 숟가락에 죽을 떠서 건네주자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는 듯 예진이 숟가락을 뺏어서 죽을 먹었다.

"맛있네."

죽이 한 번 입에 들어가자 입맛을 당겼는지 쉴 새 없이 들어갔다. 수한은 나중에 너튜브가 제대로 활성화되면 브이 로그 중 먹방으로 진출해도 되지 않을까 잠시 생각해보았다. 그만큼 예진은 맛있게 죽을 먹었다. 어느새 바닥까지 싹싹 긁고 있어서 재원이 조심스레 물었다.

"죽 더 사 올까?"

"됐어. 배불러."

뭐라도 먹어서 그런지 예진의 안색이 어느 정도 활기를 되찾았다. 게다가 미소까지 짓고 있어서 평소보다 더 예뻐 보였다. 촬영 준비 다 되었냐고 묻는 스태프에 예진은 먹은 흔적을 말끔하게 지운 후 다시 카메라 앞에 섰다. 그 앞에서 언제 웃었다는 듯이 예진은 눈물을 쏟아내었다. 연기자란 정말로 극한 직업이었다. 그래도 이대로만 나간다면 대중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을 것 같아 수한은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세상은 원하는 대로만 돌아가지 않았다.

"컷! 잠시만요. 예진 씨. 감정 조금만 잡고 상대방 좀 보세요."

수한은 뒤에서 예진에게 챙겨줄 것을 찾다가 몇 번이나 컷을 외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절대 그 컷 소리는 촬영이 잘되어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예진 씨. 사랑이 담긴 눈빛이요."

그러나 그게 잘 안되는지 예진은 묵묵하게 상대방만 봤다. 그 눈빛 안에서는 여전히 상대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지 않았다. 멜로 연기에 약하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수한은 감독이 어떻게 할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봤다. 대충대충 넘어가는 스타일이면 그대로 진행할 거고, 그게 아니라면······.

"일단 이 부분 넘어가고 다음 장면부터 찍겠습니다. 예진 씨는 가서 감정부터 다시 잡으세요."

다행스럽게 대충 넘어가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연기자 입장에서는 대충 넘어가는 스타일이 나을 수도 있겠으나, 지금 예진에게 필요한 건 섬세하게 연기를 잡아줄 사람이었다.

'그래야 이번 작품으로 완전히 인정받을 수 있을 테니까.'

예진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심각한 얼굴로 자리로 돌아왔다. 자신도 분했는지 입술을 깨무는데 옆에서 조심해달라는 말에 결국 신경질적으로 앞에 있는 핸드폰만 노려봤다. 그나마 촬영 현장이라고 성질을 죽여서 다행이었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많았습니까?"

"어. 많았어. 근데 그때도 이렇게 답답하지는 않았는데."

수한은 처음 달보드레 대본을 잡았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여자 주인공한테 몰입하지 못해서 발연기를 했다. 지금도 발연기까지는 아니지만, 수한이 봐도 목석같은 모습이라 난감했다. 아무리 봐도 사랑에 빠진 여자는 아니었다. 예진은 충분히 휴식을 가진 뒤에 나가서 다시 연기했다. 그러나 안 잡히는 게 열심히 한다고 잡힐 리가 없었다. 결국, 보다 못한 재원이 나섰다.

"일단 오늘 촬영은 감정 없는 거 위주로 하기로 했어. 그리고 오늘은 일찍 가보래."

당연히 예진의 기분 또한 좋을 리가 없기에 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예진아. 들어가기 전에 뭐라도 사줄까?"

"됐어. 이 상황에 무슨 밥이야."

"하지만 식사를 다 거르지 않았습니까?"

빵조각 몇 개 먹은 게 다였다. 가장 중요한 감정이 안 잡히니 스트레스를 받아서 음식이 넘어갈 리가 없었다. 수한이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 예진은 힘없이 걸어갔다. 재원이 당연하다는 듯이 그 뒤를 따르자 예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오늘은 혼자 있을 거야."

"아! 그래. 그럼 조금 있다가 연락할게."

예진의 앞에만 서면 쪼그라드는 재원의 모습을 수한은 안타깝게 보다가 예진의 축 처진 어깨를 보게 되었다. 늘 자신감이 넘치던 사람이 저러니 굉장히 신경 쓰였다. 게다가 입맛도 없다고 하니까 저러다가 쓰러지지 않을지 걱정도 되고.

“저 잠시 죽만 사 오겠습니다.”

“뭐? 예진이가 싫어할 텐데?”

“제가 감당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선배님.”

"나 실장님 만나 뵙고 따로 할 말이 있어서 바로 가봐야 해. 수한아."

수한은 차에 올라타려는 재원에게 차 키를 건네주었다.

"그럼 먼저 가세요. 사무실까지 따로 가겠습니다."

"그래. 알았다. 예진이가 욕하면 한 귀로 듣고 무시하고."

“예. 사무실에서 뵙겠습니다.”

수한은 주차장 입구로 빠져나가는 차를 보다가 핸드폰을 뒤적여서 근처에 있는 죽집을 검색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오지랖이라는 건 알지만······.'

워낙 마른 체질에 예진이라 뭐라도 챙겨주고 싶은 매니저의 마음이다. 수한은 새삼 매니저라는 일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다행히 죽집에는 손님이 없어 금방 사 올 수 있었다.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는 알기에 수한은 살짝 긴장한 상태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도 그럴 것이 재원의 말대로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예진에게 한 소리를 들을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명훈에게 했다던 욕설을 현실감 있게 재원에게 전해 들었기 때문에 수한은 바짝 조여오는 긴장감에 괜한 짓을 하는 건가 싶어 후회도 했다.

수한은 목적지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최대한 조용히 숨을 죽이며 예진의 집 현관문 앞에 섰다. 그래도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수한은 용기를 내서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조용한 복도 가운데서 울리는 초인종 소리는 얼마 안 가 누구냐는 예진의 목소리를 들리게 하였다.

"저 김수한입니다. 식사를 전혀 못 하실 것 같아서 죽을 사 왔습니다."

당연히 뭐라고 할 줄 알았기에 긴장하고 있던 수한은 갑자기 열리는 현관문에 놀라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예진은 그사이에 씻은 건지 머리카락이 촉촉이 젖어있었다. 수한이 죽이 든 종이봉투를 흔들자 예진은 살짝 고민하는 듯싶더니 수한의 손에 있던 죽을 뺏어갔다.

"잘 먹을게. 이만 가봐."

"네. 그럼 편히 쉬세요."

목표를 달성했으니 그만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수한의 옷자락이 붙잡혔다. 수한이 고개를 돌리자 어딘가 간절해 보이는 예진의 눈빛이 보였다.

"잠깐 시간 돼?"

< 4. 올라가는 길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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