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올라가는 길 >
"안녕하세요. 가온 엔터테인먼트에서 나왔습니다."
수한은 지훈의 프로필을 돌리며 방송국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중에는 시큰둥하게 프로필을 받아보는 사람도 있고, 흥미를 느끼며 수한을 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수한이 비타민 음료를 함께 건네자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가온에서 가수도 키워요?"
"네. 그렇습니다. 이번에 제대로 밀어주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일단 노래 나오면 잘 들어볼게요."
"네. 감사합니다. 프로필 보고 괜찮다 싶으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수한은 서글서글 웃으며 돌아다니다가 어디선가 나는 큰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소리가 나는 쪽은 회의실이었다.
"이걸 아이디어라고! 이러면 우리 프로그램 얼마 안 가 폐지되는 거 몰라?"
"하지만 아무리 쥐어짜도 아이디어가 안 나오는 걸 어떻게 합니까?"
수한이 회의실 앞을 보자 '스케치'라는 프로그램의 제목이 붙어있었다. 머릿속에 남은 기억이 없으니 들리는 내용처럼 시청률이 안 나와 폐지된 프로그램이었다. 어차피 지훈이 나갈 프로그램은 아니어서 수한은 관심을 끄고 걸어가다가 회의실에서 우르르 나오는 사람들에 구석으로 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에게 이상하게 시선이 갔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어? 왜 낯이 익지?'
물론 인사하면서 낯익은 얼굴을 여럿 마주치기는 했다. 그중에는 수한과 친하게 지내던 사람도 있었고.
'근데 저 사람은 그런 종류가 아닌데?'
어딘가 실물보다는 TV에서 더 많이 본 듯한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연예인이라 하기에는 수한의 눈에는 아무것도 잡힌 게 없었다. 수한은 본능적으로 그 사람을 붙잡았다.
"뭐, 뭐예요?"
"안녕하세요. 가온 엔터테인먼트에서 나왔습니다. 저는 김수한이라 합니다."
"네?"
수한은 빠르게 이지훈의 프로필을 그에게 내밀었다. 다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다가 수한이 남자에게 프로필을 내놓자 피식 웃어버렸다. 어차피 곧 폐지될 프로그램인데 프로필을 줘서 뭐하나 싶은 생각이었다.
"보시고 괜찮다고 생각하면 연락 주십시오."
"아? 아. 네."
수한이 명함까지 내밀자 남자는 긴가민가해 하며 받았다. 수한은 비타민 음료까지 남자의 손에 쥐여주었다.
"오늘 하루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남자의 글썽거리는 눈에 수한은 힘내라고 한 번 더 응원한 뒤 걸어갔다. 원래 힘든 시기에는 사소한 말 한마디에 감동하기가 좋았다. 수한이 기억하기로도 저 남자는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고맙습니다. 연락드릴게요.”
이태욱 PD. 그야말로 공중파 가릴 것 없이 케이블까지 정복한 PD였다. 지훈의 프로필을 꼭 쥐며 가는 뒷모습만을 본 것만으로도 방송국에 온 보람이 있었다.
**
"이런 식으로 바꿔보면 어떨까요?"
잔잔한 기타 소리가 울리면서 멜로디가 순식간에 통통 튀었다. 수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악보에 고친 것을 표시했다. 바꾸기가 무섭게 올라가는 수치에 수한은 소름이 돋았다.
[처음처럼- 대중성: B, 음악성: A, 최고 순위: 90, 성장 가능성: 73%]
혼자 공부해서는 답이 없어서 수한이 소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소원은 수한의 제안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는지 흔쾌히 제안을 수락했다.
"이러니까 장난치고 노는 것 같네요."
가온 엔터테인먼트 안에서 연습할 공간을 따로 마련했다. 남일에게 갈 것도 없이 성민의 선에서 허락이 떨어져 수한은 최대한 소원에게 분위기를 맞춰주었다. 그래서인지 소원은 편하게 멜로디를 가지고 놀았다.
"그래도 재미있죠?"
"네. 멤버들이랑 활동할 때도 이렇게 여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안타깝게도 소원은 아직 슬픈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소원이 기쁜 노래를 부를 때도 왠지 모르게 쓸쓸한 감정이 들게 했다.
"조금 더 해볼까요?"
"좋아요."
지루하다 싶은 부분을 건드리니 다시 수치가 바뀌었다. 수한은 여러 가지 방향으로 바뀌는 멜로디를 듣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공부가 되는 듯싶어서 어느새 소원 못지않게 열정적이게 되었다. 수한은 나오기 전에 나온 곡의 결과물에 흡족하게 미소를 지었다.
[처음처럼- 대중성: A, 음악성: A, 최고 순위: 43, 성장 가능성: 52%]
'조금만 더 하면 대중성을 올릴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한데······.'
그러나 잘못했다가는 소원의 재능을 쥐어짜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어 수한은 조심하기로 했다. 사실 이런 식으로 수치를 바꾼 것도 소원이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엄마가 데리러 오기로 했어요."
"아! 그러면 알겠습니다."
소원은 얼굴이 보이지 않게 모자챙을 아래로 내리며 복도를 함께 걸었다. 그러다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소리의 방향을 들어보니 연습생들이 공유하며 연습하는 연습실이었다. 수한은 시원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목소리의 주인을 금세 알아챘다.
'고주혁이구나.'
역시 가수로서의 재능이 엄청났다. 수한은 뿌듯하게 웃다가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을 한 소원을 발견했다.
"누구인지 궁금합니까?"
"네!"
너무 즉각적인 대답이라 수한이 다 민망하였다. 수한은 만나게 할까 고민하다가 갑자기 고개를 젓는 소원의 행동을 의아하게 봤다.
"아니에요. 그냥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네. 괜히 민폐만 끼칠 것 같고 그래요."
어딘가 풀이 죽은 듯한 모습에 수한은 몇 번이나 칭찬을 해주며 소원을 보냈다. 소원을 보내고 나니 수한 또한 고주혁이 계속 신경이 쓰이긴 했다.
수한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니 지쳐있는 얼굴들이 보였다. 다들 피로 축적이 대단해 보였다. 수한은 자리에 앉자마자 핸드폰을 확인했다. 전화 온 흔적과 함께 문자가 남겨져 있었다.
[예능 섭외를 문의드리려고 연락드렸습니다. ]
수한은 왠지 모르겠지만, 문자를 본 순간 이태욱 PD가 떠올랐다. 그래서 바로 전화를 걸었다. 얼마 안 가 신호음이 잡히더니 전화를 받는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가온 엔터테인먼트의 김수한입니다."
[아! 네! 저는 스케치의 이태욱 PD입니다. 이지훈 씨를 섭외하고 싶어서 연락을 드렸는데요.]
수한의 예상대로였다. 자세하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스케치에 지훈을 섭외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지난번에 회의실에서 심각하게 이야기하더니 아직 폐지 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제가 당장 결정할 권한은 없어서요. 일단 윗분들께 말씀드리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기운 없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수한은 씁쓸하게 웃었다. 아무리 미래에 잘 나가는 PD여도 폐지 직전에 있는 프로그램에 들어가 있으면 기운이 없을 수밖에 없다. 수한이 전화를 끊고 성민에게 가자 성민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전화 내용 대충 들었는데 안 돼."
"역시 그렇습니까?"
안될 거라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 말을 들으니 아쉬웠다. 어쩌면 이번 기회가 이태욱 PD와 친분 쌓기 좋은 기회였을지도 모르니까. 아니, 실제로도 쌓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민은 끝까지 냉정하게 말했다.
"이왕이면 화제성이 있는 곳에 나가야 의미가 있지."
수한은 두 가지 기획안을 펼치는 성민의 모습에 의문을 그렸다. 두 기획안을 자세히 보니 두 방송국에서 펼쳐지는 오디션 프로그램 기획안이었다. 하나는 공중파 방송, 하나는 케이블 방송이었다.
"이지훈은 여기에 나간다."
"하지만 이미 데뷔는 하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빨리 데뷔했다고 해도 인지도가 낮으면 데뷔라고 쳐주지 않지."
오늘따라 입에 칼이라도 문 건지 냉정하기 짝이 없었다. 수한은 한 번 봐보라는 성민의 말에 두 기획안을 살폈다. 안타깝게도 대본과 음악과 다르게 아무런 정보도 눈앞에 뜨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굳이 그 능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 프로그램이 이 시기쯤에 했었나?'
국민이 직접 투표하고 뽑아서 슈퍼스타를 만들어낼 뿐만이 아니라 그 이후로도 계속 오디션 열풍을 돌게 한 그 프로그램 기획안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SSS급 슈퍼스타]
누군가는 프로그램명을 왜 저렇게 지었냐고 했지만, 어그로만큼은 제대로 끈 프로그램 제목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처음 들어보는 제목이었다. 성민은 그 기획안을 펄럭이며 말했다.
"나는 이게 더 잘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실장님."
"응?"
"앞으로 로또 하지 마세요."
**
딩동. 초인종을 누르자 맑은 종소리가 몇 번이 나더니 문이 열렸다. 수한은 과자를 들어 올리며 예진에게 인사를 건넸다.
"사 오라고 한 것들 다 사 왔습니다."
"그래. 들어와."
거실로 가니 이미 재원이 소파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수한은 그사이에 볼살이 싹 빠진 예진이 걱정되었으나, 예진은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수한이 사 온 과자 하나를 쏙 빼서 입에 넣었다.
와그작. 와그작. 과자 씹는 소리가 맛있게 들리면서 예진의 시선은 온통 TV에 가 있었다. 수한은 이럴 거면 왜 자신을 불렀나 싶었지만, 그래도 함께 1화를 시청할 수 있는 영광을 줘서 기쁘게 생각하기로 했다.
"광고 무지 기네."
"광고가 길면 좋은 거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떨리잖아."
달보드레는 벌써 관계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났다. 워낙 대본도 잘 빠진 데다가 발연기를 할 줄 알았던 예진이 뜻밖에 연기력을 보여준 탓에 처음부터 광고가 잘 붙었다. 수한은 잔뜩 긴장한 예진의 모습에 웃음을 참으며 재원을 봤다. 재원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웃음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시작한다!"
과자를 씹던 소리는 어느새 사라지고 드라마 소리만 거실에서 울려 퍼졌다. 소리를 꽤 크게 틀어놨기 때문에 층간소음이 조금 걱정은 됐지만, 어차피 1시간이면 끝나니 수한은 아무 말 없이 얌전히 드라마만 보기로 했다. 그리고 어느새 수한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다음 편 예고가 나오고 있었다.
"나쁜 놈들······."
수한도 공감하는 바였다. 어떻게 사람들이 저렇게 악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악행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그에 비해 여자 주인공은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착할 수 있을까 싶어서 안쓰러운 마음을 끌어냈다. 보고만 있어도 부성애를 일으켰다.
"어땠어?"
예고편이 끝나고 광고가 나오기 시작하자 예진이 두 사람의 눈치를 봤다. 평소 예진답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드라마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예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고생이 많았다며 위로의 의미로 내민 손이었지만, 예진은 그 정도까지는 봐주지 않았다.
탁-.
매섭게 손등을 때리는 바람에 두 사람 다 정신을 차렸다. 어이없다는 듯 예진을 보는 두 사람을 예진은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 정도면 대답으로 충분하네. 드라마 끝났으니까 얼른 가. 내일 일찍 촬영 있으니까 얼른 자야 해."
집에 가려면 몇 시간이나 걸리는 재원과 그 스케줄에 같이 참여해야 하는 수한은 예진의 내침에 황당했지만, 그래도 드라마가 잘 빠진 것 같아서 안심되었다. 특히나 수한은 예진에게 마음의 짐이 있었기에 그 짐을 홀가분히 털어버렸다.
"우리 아무래도 사무실에서 자야 할 것 같죠?"
"그런 게 뭐 한두 번이냐."
"원하시면 우리 집에서 주무셔도 됩니다."
"이제는 사무실이 내 집 같고 그래."
수한 또한 마찬가지라 사이좋게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시청률은 9.4%로 순조롭게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 4. 올라가는 길 > 끝
ⓒ 엔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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