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올라가는 길 >
"괜찮아요. 더 마실 수 있어요."
혀는 이미 꼬부랑거리는데 더 마실 수 있다고 허세를 부리는 시은을 보며 수한은 속으로 혀를 찼다. 수상한 보스 마지막 화가 방송되는 날이라 드라마 관계자 모두가 모여 마지막 화를 시청하였다. 검색어를 보니 수상한 보스가 온통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즐겁게 술을 마셨다. 그 결과 주연인 시은이 제대로 말도 못 할 정도로 취했다.
"더는 마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에이. 그래도 마지막 날인데요. 매니저님."
"죄송합니다."
성민에게서 시은의 술버릇을 들은 적이 있기에 수한은 시은이 이상한 소리를 하기 전에 재빠르게 시은을 차에 태웠다. 수한이 직접 안전띠를 매주려는데 그 순간 눈이 감겨있던 시은이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술 냄새.'
"저 진짜 안 취했는데요."
"많이 취했습니다."
수한이 안전띠를 매주자 불편하다고 몸을 들썩였지만, 안전띠를 풀지는 않았다. 수한은 그 상태로 숙취제를 시은의 입에 넣어준 뒤 앞자리로 건너가 서둘러 시동을 걸었다.
"저 진짜 괜찮은데!"
수한이 아무 대답 없이 운전하기 시작하자 뒤에서는 미친 사람처럼 웃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나 남자나 술버릇이 안 좋으면 데려다주는 사람이 피곤해진다. 수한이 잔잔한 음악을 틀고 가자 시은은 그제야 조용히 잠들었다.
'다행이네.'
수한은 술에 취하면 과거사가 쏟아져나온다고 했던 성민의 말을 기억하고는 가슴을 쓸었다. 그 자리에서 유성준 이야기가 나왔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안 그래도 스캔들까지 났던 사이인데 시은의 입에서 그를 인정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시은의 이미지에 절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유성준 개새끼."
결국은 집 안에 들어와서 듣는 한 마디였다. 수한은 시은을 무사히 침대 위에 올려다 준 뒤 이불을 잘 덮어주고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쌓여있는 수많은 대본을 보았다.
'저게 다 박시은 씨한테 들어온 작품이라는 거지?'
거의 마지막은 생방송이었기 때문에 바로 작품을 시작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들었지만, 그것 또한 시은의 선택이었다. 수한은 시은을 위해서 대본들을 잠깐 훑어보았다. 그러나 적당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좋은 작품이 나오는 건 쉽지가 않은 일이네.'
수상한 보스가 시기에 맞춰 나온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수한은 흐트러진 대본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나왔다. 바깥은 여전히 어둠이 하늘을 덮고 있다. 수한은 곧장 집으로 가기로 했다. 술을 마시지는 않았지만, 술 냄새가 배어서 샤워라도 해야 했다.
'워낙 냄새에 민감한 분이니까.'
수상한 보스가 끝나갈 때쯤 되어서야 달보드레 촬영이 시작되었다. 수한은 깔끔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뒤에야 달보드레 촬영 현장으로 달려갔다.
짝-!
뺨을 치는 소리가 강하게 들리며 예진이 넘어지는 게 보였다. 컷! 소리가 나기가 무섭게 예진은 조금 전에 맞은 뺨을 만졌다. 촬영 전에도 크게 다치지 않게 합을 맞췄건만 호흡이 살짝 어긋나 뺨을 맞고 말았다.
"예진 씨. 괜찮아요?"
"네. 네. 괜찮아요."
오만하게 턱을 세우며 고양이 같이 굴던 예진은 사라지고, 착하고 순한 예진이 사람들을 향해 괜찮다며 웃어주고 있었다. 수한은 예진이 고생한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지만, 이 정도인지는 몰랐다.
"촬영 이어서 갈게요."
사전 제작 드라마도 아닐뿐더러 드라마의 전개 속도가 미친 듯이 빨랐기 때문에 촬영해야 할 게 넘쳤다. 그래서 예진의 부어오른 뺨을 가라앉힐 시간도 없이 곧바로 촬영에 임했다.
"예진 씨. 건강 상태는 괜찮습니까?"
"전혀 괜찮지 않지."
재원이 걱정하는 얼굴로 예진을 봤다. 열정도 열정 나름이지 주연이라고 분량도 엄청난 데다가 초반에는 저런 식으로 당하는 경우가 많아 거의 만신창이가 되었다.
'일일 드라마가 아닌데 일일 드라마 호흡으로 가니 힘든 거구나.'
그래도 다른 건 몰라도 연기로 욕먹지는 않을 것 같았다. 예진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처연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안아줘야 할 것 같고, 보호해야 할 것 같은 연약한 모습으로 예진은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였다. 저 모습만 본다면 누구든 예진에게 이입하지 않을 사람이 없어 보였다.
"그보다 수상한 보스 종방연 다녀온다고 하지 않았어? 술 냄새가 전혀 안 나네."
"씻고 왔습니다."
"너도 참 부지런하다. 마음 같아서는 최명훈을 불러오고 싶었는데 그놈은 예진이가 싫어하니."
물론 재원도 최명훈을 싫어하는 티를 냈다. 명훈이 남일에게 제안한 내용이 회사 전체에 퍼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소문을 낸 사람은 성민이었다. 수한은 앞에서는 편을 못 들어주었지만, 뒤에서는 편을 들어준 성민에게 아주 약간은 감동했다. 덕분에 회사 내에서 수한의 편이 많이 생겼다.
'그래서 대표가 지훈 씨를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건가?'
이해가 안 되었던 게 돌아오는 결과물을 보니 이해가 되었다. 수한은 만약 남일이 그 정도로 머리를 굴릴 줄 아는 사람이라면 굉장히 경계해야 한다고 봤다.
'그래. 사람 좋은 것만으로도 어떻게 중소 기획사가 대형 기획사가 되겠어.'
한 회사 대표의 이중적인 면을 본 것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근데 그 최명훈이 데려온 가수 지망생 말이야. 버릴 것 같다던데. 이건 기획팀에 아는 사람한테 들은 내용이야."
"계약하려고 데려온 거 아니었습니까?"
"노래는 잘하는데 싱어송라이터 가수 컨셉에는 맞지 않잖아. 최명훈이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했는데 작곡에 재능이 없다고 하네."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이럴 때 보면 참 씁쓸했다. 철저히 상품으로만 보니 버리는 것도, 다시 줍는 것도 자유로웠다. 수한은 부스 안에서 필사적으로 노래를 불렀던 고주혁을 떠올려보고는 입맛을 다셨다. 솔직히 철저하게 가수로만 본다면 탐나는 인재이긴 했다.
"꺄악!"
이번에는 물을 맞는 장면에 수한은 재원과 함께 서둘러 수건을 가지고 갔다. 수한은 물을 맞았는데도 청순하게 예쁜 예진을 보며 아무래도 연예인은 다른 종족의 사람이 아닐까 다시 한 번 의심하게 되었다.
**
['수상한 보스' 자체 최고 시청률 22%, 유종의 미를 거두다]
주말 드라마를 제외한 드라마 중에서 가장 높은 시청률을 받았다. 시은에게 광고 촬영 제안이 쉴 새 없이 들어옴과 동시에 작품 제안도 쏟아져 내렸다.
"이게 다 뭡니까?"
"뭐겠어. 시은이한테 쏟아진 작품들이지."
시은의 집에서 본 대본들이 다가 아니었다. 수한이 흥미를 느끼며 대본들을 살펴보자 성민이 기대하는 얼굴로 팔짱을 꼈다. 그러나 시은의 집에서 본 것처럼 괜찮은 대본이 없었다. 수한이 고개를 저으며 성민을 올려다보자 성민은 아쉽다는 듯이 대본들을 챙기다가 멈칫했다.
"아니, 내가 언제부터 널 이렇게 의지한 거지? 대본 정도는 내가 골라볼 수 있잖아."
"그러게 말입니다. 저를 너무 의지하지 마십시오. 제가 사라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수한이 웃으면서 일어나자 성민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수한을 쳐다봤다.
"네가 고른 게 다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는데 말이야."
"지금까지의 타율은 그래도 괜찮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딱히 반박할 말도 없는지 성민은 콧방귀를 뀌며 자리로 가 앉았다. 그러고 나서 메신저로 온 게 프로필 파일이었다. 수한이 파일을 열어보니 지훈의 프로필이 자세하게 쓰여있었다. 수한은 무슨 의미인지 알고는 기분 좋게 웃었다.
"방송국에 가서 영업 뛰고 오라는 건데 왜 웃어?"
"이건 매니저로서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애초에 인지도 있는 분들만 상대해서 경험이 부족하다고 느끼던 중이었습니다."
방송국에 다녀오면서 얼굴을 새로 익히는 게 나쁘지는 않았다. 게다가 수한은 쭉 가온 엔터테인먼트에만 있을 게 아니라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두는 쪽도 생각해두고 있었다. 수한이 콧노래를 부르며 당장에라도 나갈 준비를 하자 성민이 못마땅하게 수한을 봤다.
"이래서 네가 마음에 안 들어."
"언제는 제 방패막이가······."
수한은 말을 완전히 끝내기도 전에 자신의 입을 막는 성민을 보며 웃었다. 물론 너무 세게 막아서 숨이 갑갑했지만 말이다. 수한은 가방에 지훈의 프로필 출력본을 가득 담은 채로 사무실에서 나섰다.
'이러니까 초심으로 돌아간 기분이네.'
수한은 들뜬 상태로 나가다가 세상 살기 싫다는 얼굴로 걸어가는 고주혁을 발견했다. 사실 처음에는 어깨가 너무 구부정해서 못 알아봤지만, 수한의 눈이 한몫하였다.
[고주혁- 스타성: A, 연기력: S, 가창력: A, 춤: A, 인지도: F, 기타: S, 성장 가능성: 0%]
시간이 조금 지났는데도 스타성이 떨어지지 않는 걸 보면 언젠가 뜨긴 뜰 거라는 소리였다. 수한은 고주혁의 옆을 지나가다가 깊은 한숨 소리를 들었다. 막상 힘들어하는 고주혁을 마주하자 마음이 안 좋았지만, 그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가수로서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굳이 최명훈이 데려온 사람을 수한의 손으로 키워낼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나중에 업계에서 다시 만날지도 모르는데 수한은 안 좋게 끝을 맺고 싶지 않아 영업용으로 들어온 비타민 음료를 가방에서 꺼냈다.
옆에서 대놓고 부스럭거리는데도 고주혁은 자기만의 세상에 빠졌는지 고개를 숙인 채 앞으로만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 고주혁을 수한이 강하게 불렀다.
"고주혁 씨."
"네?"
고주혁은 그제야 눈앞에 벽이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자신을 부른 수한을 봤다. 당연히 수한을 발견한 고주혁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명훈을 통해 그의 데뷔 계획을 망친 게 수한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스타가 될 겁니다."
고주혁은 자신을 놀리는 건가 싶어 수한을 봤지만, 수한은 매우 진지하게 고주혁을 보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눈앞이 깜깜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중을 생각하면 이렇게 무너진 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겁니다. 당신은 스타가 될 거니까요."
"아니, 지금 무슨 소리를······."
"스타의 자리에 올랐을 때 당신의 밑에 다른 사람의 피눈물이 있는지 아니면 자신의 피와 땀이 있을지 떠올려보십시오. 그러면 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거라 생각합니다."
수한은 고주혁의 손에 비타민 음료를 쥐여주었다. 이 정도가 수한이 해줄 수 있는 말이었다. 수한은 그가 자신의 말을 개소리라 알아듣고 넘긴다면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선택은 본인의 몫이니까.
수한이 가고 나자 로비에는 고주혁만이 서 있었다. 고주혁은 수한이 한 말을 솔직히 말해서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스타가 될 거라는 수한의 확신에 찬 말이 머리에 박히면서 그 말들이 이해가 되었다.
'어차피 스타가 될 거니 오를 거면 정정당당하게 오르라는 거네.'
고주혁도 처음부터 명훈의 제안을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스타가 될 수만 있다면 그 정도 수단은 괜찮지 않을까 싶어 유혹에 넘어가 버렸다. 그러나 수한이 말한 대로 굳이 그런 수단을 쓰지 않고 위로 올라갈 수 있다면 고주혁은 조금 힘든 길을 선택하기로 했다. 수한의 말대로 남의 피눈물을 깔고 올라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훗날 수한의 말처럼 고주혁은 그날 무너진 걸 다행이라 여기며 수한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 4. 올라가는 길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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