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서열은 명확히 >
고주혁은 대한민국이 낳은 글로벌 스타 중 하나였다. 초반에는 무명으로 지내다가 '가을이 너라면'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고주혁은 그룹이 아닌 혼자인데도 불구하고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며 팬들을 모았다. 무엇보다 많은 사람이 고주혁을 사랑한 이유는 그가 싱어송라이터이자 대중적인 음악만 했기 때문이다.
음악 스타일은 지훈과 정반대의 노선이었다. 고주혁은 힙합, 일렉트로니카 등 전자 음악을 선호했다. 워낙 스타일이 달라서 고주혁의 이름을 알리게 한 '가을이 너라면'이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가을이 너라면을 고주혁이 작곡했다고 했지?'
왜 이 순간에 그 기억이 선명하게 나는지 수한도 의문이었다. 다만 지훈이 녹음하러 온 이곳에 고주혁이 있는 게 왠지 우연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빼앗긴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다. 지훈이 있는데 왜 굳이 노래를 고주혁에게 넘기겠는가? 수한은 떠오르는 사실을 부정하며 건물 위로 올라갔다. 초라해 보이는 건물의 모습과 다르게 녹음실 안은 최첨단 설비로 구성되어 노래 부르기 좋은 환경이었다. 수한은 벌써 부스 안에 들어가 있는 지훈을 보고 웃었다. 지훈은 열심히 목을 풀더니 옆에 놓여있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럼 녹음 시작하겠습니다."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지훈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놀이터에서 들은 흥얼거렸던 것과 다르게 지훈은 진지하게 녹음에 임했다. 수한은 새삼 스윗걸즈가 처음 녹음할 때가 떠오르면서 흐뭇하게 지훈을 지켜봤다.
"네. 좋습니다."
"저 한 번만 다시 부르면 안 될까요?"
수한이 듣기에는 좋기만 했지만, 부르는 사람으로서는 다른지 지훈은 몇 번이나 같은 부분을 반복해서 불렀다. 수한은 그사이에 소원에게서 온 메일을 받고는 미소를 지었다.
[노래 한 곡 더 만들어봤는데 메일로 보내드릴까요?]
노래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수한은 보내달라고 메시지를 보낸 뒤 지켜보다가 물을 찾는 지훈의 모습에 서둘러 물을 가져다주었다.
"목 상태 봐가면서 하시는 거 맞죠?"
"네. 당연하죠. 아직 신인이기는 해도 가수인걸요."
수한은 힘내라는 의미로 등을 두드려준 뒤 부스 밖으로 나왔다. 지훈이 다시 녹음하기 시작할 때 녹음실 안으로 한 사람이 들어왔다.
'고주혁.'
인지도가 F라는 걸 말해주는 것처럼 고주혁은 굉장히 부럽다는 얼굴로 지훈을 보았다. 수한이 고주혁을 보고 있자 고주혁도 그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건네왔다.
"저는 여기 스태프입니다."
"아! 저는 너무 잘생겨서 가수인 줄 알았네요."
"굳이 따지자면 지망생이긴 한데 여기서는 스태프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소속사가 없는 모양인지 고주혁은 살짝 기대하는 얼굴로 수한을 봤다. 그래 봤자 매니저이기 때문에 수한이 할 수 있는 건 없었지만, 가수 지망생이 그를 자세히 알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수한이 고주혁에게 흥미가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많으면 많았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건 역시 '가을이 너라면'이었다.
'이것만 매끄럽게 설명이 된다면 실장님께 말씀드려 보는 건데.'
이러다가 매니저가 아닌 탑스타 스카우터가 되게 생겼다. 수한은 가지고 있는 명함이라도 건네줄까 싶어 명함을 찾아보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너무 가온의 몸집만 불려주는 거 아닌가?'
위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도 중요하긴 했지만, 나중을 생각하면 생각이 많아진다. 수한은 가온 엔터테인먼트 안에만 있을 생각이 없었다.
"매니저님."
수한은 자신을 부르는 건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가 현장 매니저가 따로 있다는 걸 인식하고는 가만히 있었다.
"기계에 이상이 생긴 것 같아서요. 오늘 녹음 더 못하겠는데요."
"그럼 다른 날로 녹음을 미루는 건가요?"
"네. 따로 연락드릴 테니 날짜를 다시 맞춰보시죠."
지훈도 안에서 상황을 대충 들었는지 부스 안에서 나왔다. 상기되어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있었다. 그의 소심한 성격이 여기서 드러났다.
"그동안 지훈 씨는 목 관리 잘하시고요."
"그럼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수한에게 쉽게 말을 놓은 매니저가 있는가 하면 앞에 있는 현장 매니저 김승택에게는 말을 놓지 않았다. 존댓말이 입에 붙어서이기도 했고, 수한과 아직 친하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수한은 승택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지훈을 데리고 건물 아래로 내려갔다.
"녹음해보니까 어떻습니까?"
"제가 만든 노래로 녹음한다니까 꿈 같아서 사실 제대로 기억도 안 나요."
수한은 어떤 기분인지는 대충 짐작하였다. 수한이 키우는 연예인들이 높은 자리에 서게 됐을까 느낄 감정이 그러하지 않을까 싶었다.
"지훈 씨.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만약 지훈 씨 노래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라고 하면 넘길 수 있겠습니까?"
그냥 궁금해서 질문한 것뿐인데도 지훈은 눈에 띄게 안색이 하얘져서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누가 들으면 벌써 뺏어간 줄로 오해할 만한 반응이었다. 수한은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지훈의 얼굴에 다급하게 말을 붙였다.
"그런다는 게 아니라 만약에 그런 일이 생기면 가능할 것 같은지 궁금해서요."
"아마도······."
"아마도?"
"못 줄 것 같아요. 아뇨. 절대 못 줘요."
그럴 줄 알았다. 수한도 명훈에게 제 새끼들을 빼앗겨서 얼마나 분했는지 모른다. 그때 느꼈던 분노에 비하면 지금 명훈을 괴롭히는 건 백 분의 일도 안 되었다. 그나마 수한이 정도를 아는 인간이라 그런 거지 다른 인간이었으면 명훈은 벌써 이 바닥에 있지도 못했다.
"그런데 정말 빼앗아가려는 건 아니죠?"
"물론이죠. 지훈 씨 노래인데 저희가 왜 뺏어가겠어요."
다만 그 노래를 왜 고주혁이 부르게 된 건지가 궁금해진 것뿐이었다. 수한은 왠지 모르게 드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 보내며 지훈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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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파 1위, '수상한 보스' 시청률+화제성 다 잡았다]
사무실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수한이 봤던 능력치대로 드라마는 아주 잘 되어갔다. 물론 여자 주인공인 시은의 연기가 크게 한몫했다. 외모도 외모인데 무슨 옷을 입어도 잘 어울리니 시은이 드라마에서 입은 옷은 그날로 품절 되었다. 시청률이 상승하면서 광고도 완판되고 뒤늦게 PPL로 들어온 업체도 많았기에 수상한 보스가 벌어들인 수익은 벌써 엄청났다.
"예진이가 이 상황 알면 아주 난리가 나겠는데?"
멀리서 재원이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라며 정색했다. 그 모습에 수한은 부디 예진이 잘 되기를 바랐다. 원래 예진이 있어야 할 자리가 시은의 자리였기 때문에 수한은 예진에게 평소에도 잘해왔지만, 다음번에 만나면 더 잘하기로 했다.
"김수한이."
"네. 실장님."
"가자. 커피 사주마."
수한은 주저하지 않고 바로 따라나섰다. 수한이 일부러 비싼 걸 마셔도 성민은 특별하게 딴지 걸지 않았다. 아무래도 시은의 드라마 성공이 성민에게 과감함을 안겨준 것 같다. 그 예상대로 성민은 예뻐죽겠다는 듯이 수한을 봤다.
"너 진짜 대박이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좀 있지."
"인정합니다."
"이제는 겸손하게 굴지도 않네. 아니, 애초에 네가 겸손하게 군 적이 있던가?"
수한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커피를 마셨다. 역시 비싼 커피 값했다. 수한은 마찬가지로 달달한 커피를 마시는 성민을 보다가 문득 의문이 생겼다.
"그런데 실장님은 담배 안 피우십니까?"
"나야 피웠는데 끊었어. 아버지가 폐암으로 돌아가셨거든."
"그런 사정 처음 듣습니다."
"당연히 처음 이야기하니까 처음 듣지."
수한은 앞에 놓여있어야 하는 게 커피가 아니라 소주잔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성민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커피로 짠하며 말했다.
"좀 여유 생기면 술 한잔하자. 술도 내가 사마."
"네. 좋습니다. 잘 얻어 마시겠습니다."
"아! 오늘 이지훈 재녹음 하는 거 최명훈 보냈어."
"아······ 네."
이번에도 당연히 자신을 보낼 줄 알았기에 수한은 조금 아쉬웠다. 아직 고주혁에 관해서도 의문이 해결된 게 없어서 고민이 많았다.
"너 걔 싫어하는 거 완전 티 나더라."
"그렇습니까?"
"그래. 재원이 같이 눈치 없는 애들 빼고는 다 눈치챘어."
그 말은 명훈도 눈치챘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지금으로써는 명훈이 뭘 할 수 있는 게 없어 수한은 별로 걱정이 안 됐지만, 수한은 성민이 괜히 이 말을 꺼낸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대표님이 이상하게 최명훈을 마음에 들어 하더라."
"그렇습니까? 하긴 다른 사람들한테 잘하지 않습니까?"
수한의 가르침 덕분인지 실수하는 일이 확실히 줄어들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잘하는 것이 조금씩 까였던 점수를 회복하고 있었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예?"
"대표님이 최명훈을 뽑았다고."
수한은 께름칙함의 원인이 이거였나 싶어 진지하게 자세를 고쳤다. 성민은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실 대표님이 널 좀 마음에 안 들어 하더라고."
"어째서인지 실장님은 아십니까?"
"그러니까 말이다. 나도 이해가 안 가서 몇 번 물어봤거든? 이유로 뭐라 뭐라 하긴 하는데 나로서는 도통 이해가 안 되는 거야."
수한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 없는 미움. 이런 미움을 받은 경험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 기억은 여전히 선명했다. 그래, 대학로에서 이미 충분히 경험하다 못해 질렸다. 설마 남일이 그런 식으로 자신을 생각할 줄 몰라 수한은 살짝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저한테 요즘 잘해주시는 거군요?"
"뭐. 겸사겸사야. 전에도 말했다시피 그 양반이 사람 보는 눈이 좀 없거든. 근데 거기서 끝나면 되는데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거지. 그럴 일이 만약 생긴다면 내가 네 방패막이 정도는 해주마."
수한이 감동하여 열렬하게 쳐다보자 성민은 괜히 민망해져 헛기침을 몇 번 했다. 물론 말로만 좋게 이야기해주는 걸 수도 있겠지만,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달리 나온 게 아니었다. 수한은 사람들이 성민을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믿겠습니다. 실장님."
"그렇다고 너무 믿지는 말고."
"그런데 진짜 아무 이유 없이 제가 싫어서랍니까?"
"사실 한 가지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한데······."
"그게 뭡니까?"
"확실해지면 알려줄게. 만약 그 이유라면 우리 대표님이 너무 쓰레기 같아서 말이야. 그러지 않기를 바라야겠지."
말하지 못할 깊은 사연이라도 있는지 성민은 당장에라도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싶어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나 그의 입에 물린 건 검은색 빨대였다. 은근 안 어울리는 듯하면서도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수한은 성민과 함께 회사 건물로 들어가다가 걸음을 멈췄다. 성민이 해준 말이 사실이라는 걸 말해주는 것처럼 떡하니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게 보였다.
"또 저 친구랑 같이 계시네."
대표인 남일과 명훈이 무슨 대화를 주고받는지 훈훈하게 웃고 있었다.
< 3. 서열은 명확히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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