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서열은 명확히 >
"명훈 씨. 잠시만 이리로 와보세요."
"명훈 씨. 잠시만요!"
요즘 들어 사무실에서 자주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성민은 졸다가도 한 번씩 들려오는 목소리에 명훈이라는 이름이 이제는 친숙하게 느껴졌다. 성민이 살짝 고개를 내밀자 명훈이 다 죽어가는 얼굴로 수한에게 갔다. 성민이 드라마 관람하듯이 두 사람을 보고 있자 뒤늦게 사무실에 들어온 재원이 슬쩍 질문을 던졌다.
"저 둘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서열 정리 중이지 뭐겠어."
"예?"
재원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을 했다. 그야 당연했다. 재원은 가온 엔터테인먼트에 입사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서열 정리라는 것을 당해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서열이 명확한 회사에 들어오기도 했고, 전체적으로 함께 고생한다는 느낌으로 사무실에서 함께 일했기에 처음 보는 광경에 의아해했다.
"이게 문제가 뭐냐면 최명훈이 김수한의 연극 선배라고 하네?"
"아! 그러면 조금은 이해가 되네요."
"물론 최명훈이 다른 회사에서 이직한 거긴 하지만, 그 정도 경력은 경력으로도 안 치지."
"그런데 회사에서는 왜 뽑은 겁니까?"
"대표님이 마음에 들었나 봐. 그 양반 진짜 사람 보는 눈 드럽게 없어."
자연스럽게 대표 남일의 뒷말로 넘어가는 성민에 재원은 눈 밑에 그림자가 진해졌다. 수한과 마찬가지로 재원 또한 이런 화제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재원은 기본적으로 소심한 성격이었다. 그가 과격해질 때는 예진과 연관되어있을 때뿐이었다.
"근데 수한이 말 들어보면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하던데요. 저야 예진이 일로 좋지 않은 경험을 해서 잘 모르겠지만요."
"눈치 없기는. 말이야 그렇지. 실제로 김수한도 별로 안 좋아할걸?"
"근데 왜 칭찬을 합니까?"
성민은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생각이 단순해서야 어떻게 매니저 일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아니다. 어쩌면 그래서 까다로운 예진의 매니저를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수한이가 최명훈을 보자마자 지은 표정을 기억하거든."
"어땠는데요?"
"정말 싫은데 싫은 척할 수 없구나. 일명 똥 밟았다."
수한이 들었다면 소름 돋을 말이었다. 성민은 열심히 명훈을 굴리는 수한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한은 열정적으로 설명했고, 명훈은 말귀를 못 알아들어 수한의 눈치만 봤다. 제대로 기를 죽이고 있다.
"잘하고 있어."
"그러다가 밑에 들어오는 다른 신입한테도 그러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수한이가 그럴 성격이었으면 나는 쟤를 예뻐하지도 않았어."
"그래도 너무 심하게 굴면 새로운 사람 뽑아야 할 텐데요."
"수한이가 그렇다고 이상한 걸 가르쳐주지는 않으니까 여유 있게 지켜보자고."
그보다 성민이 마음에 걸려 하는 건 대표인 남일이었다. 수한의 성과를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경계하는 게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저 최명훈을 뽑은 게 남일이다.
'대체 김수한이 왜 마음에 안 든다는 거야.'
결과만 보면 남일처럼 오해할 수도 있지만, 성민이 겪은 수한은 기본적으로 선한 성품을 지녔다. 처음 드림즈의 팬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성민은 그렇게 생각했다. 수한은 드림즈의 팬이라고 했지만, 드림즈를 몰라도 너무 몰랐으니까. 오히려 팬이 아닌 사실을 들키지 않은 게 용했다.
'어쨌든 간에 지켜보자고.'
**
['달보드레' 대본리딩 현장 공개]
예진은 여전히 명훈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았다. 덕분에 명훈은 예진의 스케줄에는 따라가지 않아도 됐다.
"그 사람 나중에 뒤통수 칠 것처럼 생기지 않았어?"
수한은 예진의 사람 보는 눈에 소름 돋으며 예진에게 예지 능력이 있나 진지하게 고민해봤다. 물론 그런 능력이 있다면 처음에 수한을 그리 막 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한은 전반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이 나쁘지 않아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보다 기대했던 것보다 대본리딩 영상 반응이 좋았다.
- 발연기 할 줄 알았는데 그사이에 연기 늘었네
ㄴ그래 봤자 성예진이지 난 기대 안 함
ㄴ그래도 믿고 거름
ㄴ거를 거면 이 영상도 거르지 그랬냐
물론 여전히 악플은 많아서 예진이 보면 또 한바탕 화를 낼 거라 예상되었다. 사실 악플을 보고 화 안 낼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김수한."
사무실로 들어가기도 전에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명훈이 서 있었다. 수한은 아까 일로 명훈이 말을 꺼내려는 건가 싶어 먼저 웃으면서 말했다.
"네. 저 부르셨습니까?"
"너 요즘 나한테 왜 그러냐?"
"예?"
"자꾸 날 가르치려 들잖아."
설마 이런 식으로 돌직구로 말할 줄 몰랐기에 수한은 깜짝 놀랐다. 수한은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살펴보았다. 다른 부서 사람이 힐끔거리는 게 보여 수한은 최대한 예의를 차렸다.
"잠시만요. 여기는 직장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기다린 거잖아."
명훈은 참다 참다 못 참겠는지 대놓고 분노한 감정을 드러냈다. 수한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다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고의가 없었음을 알려주는 행동이었다.
"처음에 찍힌 걸 만회해드리려고 그런 건데 제 생각이 짧았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요즘 너무 심했던 아냐?"
수한의 이유가 그럴듯하다고 느꼈는지 명훈의 분노가 줄어들었다. 수한은 그런 명훈을 달래듯이 말했다.
"아시다시피 여기 일이 워낙 많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른 시일 안에 제가 아는 걸 알려드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마음이 급했습니다. 지금도 스케줄 다녀오느라 밥 한 끼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그래?"
"네. 그런 의미에서 말인데 오늘도 알려드리고 싶은 게 많습니다."
오기 전에 시은이 식사할 시간을 줘서 먹고 오기는 했지만, 그건 동현과 시은만 아는 사실이었다. 수한은 굳이 사실을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수한은 제 말에 안색이 하얗게 질리는 명훈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일단 들어가시죠. 그리고 여기는 직장이니 반말은 조금 더 익숙해진 다음에 해주셨으면 합니다."
수한은 오늘도 명훈을 철저하게 부릴 준비가 되어있었다. 성민은 수한이 명훈에게 도움이 될 만한 걸 가르친다고 착각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쉽게 가르쳐도 될 일을 빙빙 돌려서 어렵게 알려주고 있었다. 물론 이를 알아채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성민에게 언질을 받았기에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다. 게다가 명훈이 한 사람의 몫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개인에게 할당된 일의 양이 여전히 많았다. 서로 다른 사람을 챙길 처지가 아녔다. 그나마 수한이 붙어서 명훈이 조금이라도 사람이 되었으니 다행이었다.
'누가 보면 쪼잔하다고 하겠지만, 원래 쪼잔한 게 가장 사람 기분을 더럽게 하는 거지.'
수한은 대학로에서 직접 당한 괴롭힘을 잘 활용하였다. 당하는 사람은 기분이 나쁘나,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당한 사람이 예민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 어차피 명훈이 철저하게 수한을 선배 대접할 때까지만 할 생각이었으므로 양심이 찔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실 이쯤 되면 사직서를 낼만 한데 명훈은 잘 버텨냈다.
'게다가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정식으로 받아줬단 말이지?'
그만큼 사람이 급한 걸 수도 있으나, 수한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께름칙함을 느꼈다. 무언가 한 가지를 놓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김수한!"
그러나 오늘은 이쯤으로 끝내야 했다. 수한은 성민의 부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오늘 무슨 스케줄이 있는지 수한도 잘 알았다. 이지훈의 노래 녹음 날이었다. 지훈을 녹음실까지 데려다주는 게 수한의 임무였지만, 성민은 특별하게 조금만 지켜보고 와도 된다고 허락하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수한은 문을 닫기 전에 안색이 돌아온 명훈을 보며 다음에는 어떻게 굴릴지 고민하였다. 스스로 이런 악취미가 있는 줄 몰랐는데 은근한 쾌감을 안겨주었다. 아직은 이지훈 전용의 차가 마련되지 않아 이전에 몰았던 차를 끌고 가게 되었다. 지훈은 이전과 다를 것 없이 공원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가을이 너라면- 대중성: A, 음악성: S, 최고 순위: 1, 성장 가능성: 76%]
즐거우면서도 가벼운 멜로디가 부드럽게 튀었다. 무언가 씁쓸함을 안겨주면서도 리듬을 타게 하는 게 가만히 듣기만 해도 좋았다.
"이번에 녹음할 노래가 그 노래입니까?"
"어? 오셨어요?"
지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수한을 맞이했다. 수한과는 지난번에 보고 처음 보는 것이기에 지나치게 반가워하는 게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었다.
"노래 어때요?"
"잠깐 들은 것만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벌써 음이 흥얼거려지네요."
마치 어디서 많이 들어본 노래인 것처럼 벌써 음이 입에 붙었다. 좋은 노래들은 원래 이런가 싶어서 수한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차에 올라탔다.
"가을이 너라면 낙엽 위에 편지를 쓸 거야."
"어? 그 가사 어떻게 알았어요?"
"네?"
수한이 백미러로 지훈을 보자 지훈은 정말 신기한가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수한을 봤다.
"저 방금 부른 부분, 그 부분 아니거든요. 가사 보신 거예요?"
수한은 천진난만하게 물어보는 지훈을 보다가 확실히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 이 노래가 이렇게 입에 붙는 걸까? 수한은 지훈이 말한 것과 다르게 지훈이 보낸 가사를 보지 않았다. 그렇다는 말은 원래부터 수한이 알고 있는 노래라는 말이었다.
"왜요? 무슨 문제 있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일단 출발하겠습니다."
수한은 네비게이션으로 찍어놓은 녹음실 주소를 다시 확인하고 출발하였다. 남일은 이왕 하는 거 제대로 밀어줘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가온 엔터테인먼트 안에 있는 녹음실이 아닌 다른 녹음실을 예약해두었다. 그 때문인지 지훈은 긴장한 듯하면서도 굉장히 즐거워 보였다.
'그보다 문제는 왜 내가 이 노래를 알고 있느냐는 건데······.'
수한은 운전하는 동안 지훈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나 부르면 부를수록 지훈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간절하고 애절한 지훈의 목소리와 상반되게 대충 부르는 듯하면서도 끈적이는 분위기를 내는 목소리가 들렸다. 지훈처럼 기타와 잘 어울리는 목소리여서 수한은 그 주인공을 떠올려보고자 부단히도 애썼다.
"매니저님."
수한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백미러를 봤다. 그러자 얼마 안 가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딴생각을 했네요. 먼저 올라가시면 다른 분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같이 안 올라가고요?"
"저는 주차하고 올라가겠습니다."
지훈은 그래도 불안한지 연신 수한을 바라보다가 어서 올라가라는 수한의 손짓에 기어가듯이 천천히 걸어갔다. 수한은 주차하고 걸어가다가 문신을 한 남자를 발견했다. 머리는 짧게 깎아서 밤톨 같았는데 이상하게 얼굴이 익숙했다. 물론 수한의 눈은 수한을 배신하지 않았다.
[고주혁- 스타성: S, 연기력: S, 가창력: A, 춤: A, 인지도: F, 기타: S, 성장 가능성: 0%]
고주혁의 이름이 뜬 순간 수한은 깨달았다. 수한이 알고 있는 본래 '가을이 너라면'의 주인을 찾았다. 고주혁이었다.
< 3. 서열은 명확히 > 끝
ⓒ 엔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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