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서열은 명확히 >
명훈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차 안에서 풍기는 향기에 피식 웃었다. 역시나 들은 대로였다. 성예진에 관한 소문은 다른 매니저들 사이에도 은은하게 퍼져있기 때문에 명훈은 예전의 까다로운 성격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재원이 얼마나 고통받는지 짐작해냈다. 명훈은 그래서 먼저 재원의 마음부터 사로잡기로 했다.
'원래 큰 건 나중에 건드리는 법이지.'
주변 사람들에게 먼저 신망을 얻는 게 중요했다. 물론 수한은 이미 그 주변 사람들에 속해있었다. 명훈은 조심스럽게 말문을 뗐다.
"많이 힘드시겠어요."
"응? 뭐가?"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라 재원이 화들짝 놀라 명훈을 봤다. 명훈은 그런 재원의 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진 씨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들었거든요."
"아! 그렇지. 그래도 열심히 하니까 힘들긴 해도 보기는 좋아. 오랜만에 열정이 불타오른다고 해야 할까?"
당연히 예진에 관해 험담할 줄 알고 맞장구칠 준비를 했던 명훈은 당황해서 눈을 연신 깜빡였다. 물론 재원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예진에 대해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예진이가 성격은 까칠해도 열정 하나는 좋거든. 수한이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나도 예진이가 그렇게도 열정적인 연기자인 줄 몰랐어."
이런 화제에서 갑작스럽게 수한이 언급될 줄 몰랐기에 명훈은 깜짝 놀랐다. 대화하면 할수록 점점 그의 의도와 다르게 결론이 맺어지고 있었다.
"수한이가 뭘 좀 했나 봐요?"
"예진이한테 도전의 기회를 주자고 많이 어필했지. 그때만 해도 수한이가 헛바람만 불러일으키는 건 아닌가 했는데 예진이도 할 수 있더라고. 요즘 예진이를 보면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니까?"
누구보다 예진을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게 재원이었다. 명훈도 대학로 연극단에서 굴러먹은 짬밥이 있었기에 여기서 예진에 관한 험담을 했다가는 큰일 난다는 것 정도는 금세 알아챘다.
"그런 분을 이번에 제가 보게 되는군요."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얌전해졌어."
그렇다면 다행이다. 명훈도 은근 긴장하고 있었기에 괜찮을 거라는 재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덜컹거리는 차에 재원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운전이 좀 매끄럽지 못한 편이네."
"네. 이렇게 큰 차는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요."
"확실히 김수한이 난 놈이긴 하지. 처음 몰아본다면서 무슨 운전을 그렇게 잘해."
"네? 수한이가 운전도 잘하나요?"
"운전하던 놈 아닌가 우리끼리도 의심했을 정도라니까."
어째서인지 기승전김수한이 되는 것 같아서 명훈은 입안이 까끌까끌했다. 분명 매니저 일을 한 건 비슷한 시기인데 어떻게 이토록 다른지 명훈은 이해할 수 없었다.
"예진이 타면 이렇게 운전하면 안 돼. 예진이가 이런 거에 민감하거든."
"네. 명심하겠습니다. 선배님."
명훈은 풀었던 긴장을 다시 바짝 조이며 네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청담에 있는 아파트로 갔다. 예진은 이제 막 나왔는지 실내 주차장인데도 선글라스를 낀 채로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앞에 나와 있어 재원은 살짝 긴장한 채로 말했다.
"예진이 보이니까 천천히 멈춰."
"알겠습니다."
척 보기에도 까칠해 보이는 예진의 성미에 명훈은 재원의 말대로 차를 천천히 멈추었다. 물론 운전 미숙으로 차가 덜컹거리는 게 보여서 예진의 선글라스가 반쯤 벗겨져 있었다. 옆에서 한숨 쉬는 소리에 명훈은 고개부터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됐다. 운전은 나와 바꾸기로 하고 일단 내려."
"네······."
두 사람이 차에서 내리자 예진은 그 상태를 유지하며 명훈을 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기에 누군가하고 관찰하였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입!"
"최명훈이라 합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커다란 목소리를 내는 명훈에 귀가 민감한 예진은 인상을 찌푸렸다가 금세 풀었다. 수한과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네. 반가워요."
물론 그 자리에서 가장 많이 놀란 건 재원이었다. 재원은 고민하다가 예진의 상태를 봐서 괜찮을 거라 여기고 명훈에게 다시 운전대를 맡겼다.
"예진아. 오늘은 회사에 가서 인터뷰할 거야."
"어."
단답식이긴 하지만, 명훈은 소문보다 까칠하지 않은 예진의 모습에 살짝 안도했다. 그러나 차 안에 흐르는 적막이 불편해서 자신도 모르게 말을 하게 되었다.
"와. 역시 소문은 믿을 만한 게 아니네요."
"소문이요?"
명훈은 순간 들떠졌다. 옆에서는 열심히 아무 말 하지 말라고 재원이 신호를 줬지만, 명훈은 보지 못했다.
"네. 성격이 되게 까칠하시다고 들었거든요. 지금 보니 다 거짓말이었네요. 역시 사람은 겪어봐야 아나 봐요."
"소문이 그렇게 날 리가 없을 텐데······."
"네?"
"욕도 같이 섞여 있을 거 아니에요?"
예진의 사르르 웃는 모습에 명훈은 금세 고개를 끄덕이며 신나서 이야기하였다. 물론 미친년이라느니 개지랄을 떤다느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함께 넣으면서 말이다. 당연히 그에 예진이 해당하지 않으니 한 말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명훈만 신나게 웃고 있었다. 명훈이 그를 눈치챈 건 얼마 안 가서였다.
"야."
조금 전에 들려온 낮으면서도 위협적인 목소리는 분명 예진의 목소리였다. 명훈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백미러를 봤다가 선글라스를 완전히 내린 예진을 발견했다.
"지금 저한테 야라고 한 거예요?"
"어. 내가 소문대로 성격이 지랄 맞거든."
"네?"
"내가 그 미친년이 맞다고."
그 순간 명훈의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완전히 엿 되었다. 그때부터 입에 걸레를 문 예진의 말솜씨가 발휘되었다.
**
"그래서 가는 내내 욕만 들었다고요?"
"그래. 나는 예진이가 그렇게 욕 잘하는지 처음 알았어. 나중에 욕쟁이 할머니 역해도 잘하겠던데?"
촬영 현장에서 사무실에 돌아오자마자 재원에게 명훈의 이야기를 들은 수한은 황당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동안 명훈을 과대평가를 해왔던 건지 생각한 것보다 더 빠르게 신망을 잃었다. 수한이 손을 쓰지도 않은 상태에서 말이다.
'너무 싱겁잖아.'
수한은 김빠진 사이다를 마시는 기분이었다. 수한이 사무실 안에서 명훈을 찾으니 명훈은 다른 매니저를 따라갔다고 한다. 물론 운전도 미숙한 탓에 옆에 데리고 다니기만 했다. 애초에 신입으로 들어온 수한이 너무 사기적이었다.
"운전을 그렇게 못해서 매니저 일은 어떻게 하려고. 성격도 그래. 머지않아 사람 다시 뽑아야 할 것 같은데. 김수한 같은 신입 데려오랬지. 어디서 뭐 같은 신입을 데려온 거야."
"너무 과한 칭찬인데요."
"아니야. 너는 신입은 원래 그렇다는 걸 까먹게 할 정도니까. 너 진짜 어디서 매니저 일 하던 놈 아니야?"
"그리 말씀해주시니 칭찬으로 알아듣겠습니다."
"입이 너무 가벼운 사람은 여자든 남자든 별로야."
수한은 명훈의 뒷담을 들으며 쓰게 웃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명훈이 매니저로서의 경험이 얼마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는 말은 이 상태가 계속되면 명훈은 수한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말과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말인데 수한아."
"네?"
"오늘은 네가 가야겠다."
"알겠습니다."
수한은 그가 예상한 것보다 더 큰 엿을 먹여준 예진에게 감사했기에 흔쾌히 재원을 따라나섰다. 수한은 사무실 밖으로 나가다가 어깨가 축 처진 채로 걸어오는 명훈을 발견했다. 명훈은 수한과 눈이 마주치자 당장에라도 달려올 것처럼 수한을 반가워했지만, 그 옆에서 노려보는 재원을 보고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너 인마. 제대로 반성해."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날 제가 미쳤었나 봅니다."
"수한이가 네 칭찬을 얼마나 했는데 그만큼이라도 좀 해라. 인마. 적어도 수한이 보기에 부끄럽지는 않아야 할 거 아니야?"
수한은 뜬금없이 언급되는 제 이름에 머쓱하게 웃었다. 누가 들으면 명훈이 수한의 소개로 들어온 줄로 오해하겠다.
"수한아. 미안하다."
"아니에요.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요. 자주 하다 보면 익숙해질 테니까 힘내세요."
수한은 일부러 선배라는 명칭을 붙이지 않았다. 그를 알아챈 건지는 몰라도 명훈은 묘하게 가라앉아 보였다. 수한은 진심으로 명훈의 앞날이 걱정되어 격려의 차원으로 명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고마워. 수한아. 나 열심히 할게."
수한은 웃으려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명훈의 눈빛이 싸하게 느껴졌다. 수한은 언제부터인가 명훈의 이런 눈빛을 본 적이 있었다. 그랬다. 딱 그때가 명훈이 수한의 뒤통수를 치기로 마음먹던 때였다. 저런 눈빛을 지금 보인다는 건 재원이 수한을 언급하여 자존심이 단단히 상했다는 거다.
'이거 함부로 방심해서는 안 되겠는데······.'
벌써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걸 보니 명훈은 처음부터 그다지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수한 때문에 본모습을 숨기고 있던 게 틀림없었다.
"네. 그럼 열심히 하세요. 응원하겠습니다. 명훈 씨."
그래서 명확하게 서열을 정리하기로 했다. 명훈은 '선배'에서 이름으로 호칭이 바뀐 것에 당황했는지 눈동자가 대놓고 흔들렸다. 수한이 의도한 바였기 때문에 수한은 여유 있게 웃으면서 명훈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걸음에는 승자의 여유가 담겨있었다.
**
명훈은 무언가 비웃음을 당한 기분에 수한이 지나간 자리를 노려봤다. 기분 탓이라고 하기에는 강렬하게 지나갔다.
'망할. 하나같이 마음에 드는 게 없네. 여기도 관두고 나가야 하나?'
이런 대접 받으려고 가온 엔터테인먼트에 들어온 게 아니므로 명훈은 강한 분노를 느꼈다. 명훈이 답답함에 건물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자 옥상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명훈이 고개를 돌리자 대표인 남일이 보였다.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그래."
원래라면 매니저 면접 자리에 가지 않았어야 할 남일이 그 자리에 가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명훈은 남일의 눈에 띄어서 새롭게 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일은 할 만한가?"
"그게 아직 처음이라 이것, 저것 실수를 많이 합니다."
"원래 그러니까 신입이지."
"그래도 저는 잘하고 싶습니다."
"나도 그랬던 때가 있었지."
명훈은 본능적으로 남일이 자신에게 가진 호감이 큰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대답으로 그 호감의 이유를 알았다. 남일은 명훈을 통해 젊은 시절의 자신을 보고 있었다.
"조금만 지켜봐 주신다면 좋은 성과를 내보이겠습니다."
"그래. 지켜보지."
명훈은 먼저 나가는 남일을 향해 허리를 꾸벅 숙이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애초부터 성민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었다. 원래 사회생활은 줄을 잘 타는 게 가장 중요했다. 명훈은 남일에게만 잘 보이기로 했다.
< 3. 서열은 명확히 > 끝
ⓒ 엔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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