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 탑스타-22화 (22/186)

< 3. 서열은 명확히 >

[월화 드라마, '수상한 보스' 시청률 7%. 무난한 첫 시작]

수한은 오랜만에 잠을 푹 잤다. 요즘 모든 게 잘 풀리는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그 정도로 성에 차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원래 성취감이란 작은 것을 실천하는데서부터 시작된다. 수한은 조금 더 늦장을 부리고 싶어 침대에 누워있다가 오늘의 스케줄을 떠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박시은 씨 촬영이 있지.'

현장 분위기는 좋을 거라 예상되었다. 수한은 급하게 씻고 편한 복장으로 나왔다. 현장에 오래 있을 테니 편한 복장이 좋았다. 수한은 꽉 찬 지하철에 몸을 구기며 가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신입 뽑았다고 했는데 언제부터 오는 거지?'

수한의 때에도 바로 출근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쉬운 감이 있었다. 인력이 한 사람이라도 더 있는 것과 없는 것에 차이는 매우 컸다. 물론 수습 기간을 걸쳐야 하므로 한 사람의 몫을 하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래도 수한은 후배가 들어온다는 사실에 굉장히 들떴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수한이 고개를 돌리니 누가 다른 사람의 발을 세게 밟았는지 연신 사과하는 게 보였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목소리였다. 수한은 아는 사람인가 싶어 발꿈치를 살짝 들었다가 후회했다.

[최명훈- 스타성: C, 연기력: A, 가창력: D, 춤: D, 인지도: F, 기타: A, 성장 가능성: 60%]

아침부터 좋았던 기분이 바닥을 치는 순간이었다. 수한은 왜 이런 장소에서 마주치나 싶어 짜증이 났다가도 어차피 곧 있으면 내리니 아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저 인간 때문에 아침부터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이었다.

"김수한!"

왜 같은 곳에서 내리는지 모르겠지만, 명훈이 수한에게 먼저 아는 척을 했다. 수한은 이내 미소를 짓고 고개를 돌렸다.

"선배님?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회사가 이쪽입니까?"

"나? 어. 이번에 이직했거든."

"이직이요?"

"어. 너도 알다시피 유성준 그 새끼가 사고 쳤잖아."

유성준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화가 나는지 명훈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수한은 명훈을 생각하면 이가 바득바득 갈렸지만 말이다.

"그래서 관두신 겁니까?"

"그래. 그렇지 뭐."

수한은 식은땀을 흘리며 어색하게 웃는 명훈의 모습을 보고 그가 사직서를 낸 게 아니라 잘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한과 함께 있을 때는 무엇이든 능숙하게 해내서 일을 잘하는 줄 알았더니 그것들도 여러 경험을 통해 익힌 모양이다.

"어디로 이직하셨습니까?"

이 근처에 엔터테인먼트 건물이라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어차피 가온 엔터테인먼트로 올 건 아니라고 여겼기에 수한은 어디든 상관없다고 여겼다.

"아! 그건 비밀!"

"네?"

"그냥 쉽게 알려주면 재미없잖아."

수한은 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수한은 불안해졌다. 명훈이 저런 식으로 굴 때는 무언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수한은 애써 떠오르는 생각을 무시하며 걸어갔다.

"그럼 나는 이쪽으로 가볼게."

"네. 그럼 살펴 가십시오. 선배님."

다행히 명훈은 다음 신호등에서 건너갔다. 수한은 어느새 손바닥에 차오른 땀을 닦아냈다. 그러나 왜 불길한 예감은 사라지지 않는 건지 수한은 사무실로 들어가자마자 물을 한 잔 마셨다. 그리고 바로 나갈 준비를 하는데 성민이 기분 좋은 얼굴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게 보였다.

"김수한이! 나가려고?"

"네. 가서 촬영 현장 가서 이것, 저것 챙겨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 한소원 곁으로 가기 전에 시은이한테 잘해줘."

"뭘 또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아! 오늘 신입 오는데 안 보고 갈 거야?"

수한은 왜 이 순간에 명훈이 떠오르는지 이유를 몰랐다. 그냥 느낌이 안 좋았다. 수한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가느냐 아니냐의 선택지를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안 본다고?"

"네. 일단은 현장이 급하니까요."

"그래. 그러면 그러든가."

마음대로 하라고 말하는 성민을 보며 수한은 초조한 마음에 주먹을 몇 번이나 쥐었다가 폈다. 그리고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을 때 보인 얼굴에 애초에 그에게 선택지가 없었음을 알게 되었다.

"김수한!"

어째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걸까? 수한은 주먹을 꽉 쥐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선배님이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어? 두 사람이 아는 사이예요?"

성민의 흥미롭다는 목소리에 수한은 명훈이 먼저 말을 꺼내기 전에 대답했다.

"네. 제가 대학로에서 잠깐 있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함께 지냈던 선배입니다."

"네. 수한이가 유독 저를 잘 따랐죠."

자연스럽게 수한의 이름을 부르는 명훈의 모습에 수한은 이가 갈렸지만, 꾹 참았다. 사회생활은 자신의 감정을 다 드러내는 게 아니었다. 수한이 아무리 성민과 친하게 지내도 어느 정도 선은 늘 지켜왔다. 지금이 그 넘지 말아야 할 선이었다.

"그랬군요. 하지만 아무리 친한 사이여도 직장에서 이름 부르고 다니는 건 그렇지 않나요?"

"네?"

"아니, 공과 사는 구별해야 할 것 같아서요. 최명훈 씨."

평소 반말을 기본으로 달고 살던 성민이 그런 말을 하자 웃겼지만, 수한은 사이다를 한 사발 들이키는 기분이었다. 수한이 고맙다는 눈인사를 하자 성민이 히죽 웃으면서 명훈을 데리고 갔다. 명훈은 완전히 똥 씹은 표정이었으나, 성민이 사람들에게 인사를 시키면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수한은 촬영 현장으로 가다가 온 메시지에 피식 웃었다.

[아는 사람일수록 더욱 봐주면 안 된다. 수한아.]

**

촬영은 계속되었다. 수한은 눈꺼풀이 무거워졌지만, 현장에서 열심히 연기하는 시은을 보고 있으니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다. 밤새 촬영을 했기에 시은의 눈 밑으로 그림자가 졌지만, 대기하고 있던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몇 번이나 수정을 해주었기에 피곤한 기운이 어느 정도 사라졌다. 수한은 시은의 어깨 위에 담요를 덮어주며 따뜻하게 마실 것을 챙겨주었다.

"왠지 이런 일에 익숙해 보이네요. 오빠."

"아닙니다. 선배님들이 많이 가르쳐줘서 아는 거죠."

현장에 있던 동현의 어깨가 으쓱거리는 게 보였다. 수한은 시은이 다시 촬영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 재원이 보내주는 영상을 받았다.

'이런 것까지 굳이 보내주지 않아도 되는데.'

예진의 대본리딩 현장 모습이었다. 수한은 이어폰을 끼고 조용히 동영상을 틀었다. 수한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예진의 연기에 깜짝 놀랐다.

'한소원 씨 판박이잖아?'

소원이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짐작이 안 되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자기 방식대로 다르게 하는 것도 있어서 수한은 흥미롭게 영상을 봤다. 수한은 종종 다른 배우들을 향해 카메라를 돌리는 재원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저 놀라는 표정들이 즐거웠나 보네.'

함께 출연하는 배우들은 예진의 연기 실력을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예진의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수한은 시은과 별개로 다른 현장에서 힘내는 예진을 보며 굉장히 뿌듯해했다.

"뭘 보고 그렇게 웃어요?"

갑자기 이어폰 한쪽을 빼는 손길에 수한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시은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한이 현장을 보니 무언가 문제가 생겼는지 기계를 점검하는 스태프들이 보였다.

"예진 언니네요?"

"네. 굳이 안 보내줘도 되는데 선배님이 보내주셨네요."

무슨 이유 때문인지 시은이 더욱더 불만스럽게 수한을 보는 것 같았다. 수한은 이유를 알 수 없어 목덜미를 긁적이다가 다시 대본을 살피는 시은의 모습에 불빛을 비춰 글자가 더 잘 보이게 했다. 시은은 피곤할 텐데도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대본에 파고들었다. 수한이 남자 배우 쪽을 살펴보니 그쪽도 시은 못지않게 열정적이라서 수한은 이 드라마가 잘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수한은 점검이 끝났다는 말에 새롭게 온 핸드폰 메시지를 확인했다.

[새로 온 신입 봤어? 난 아직 못 봤는데 다른 사람 말 들어보니까 얘가 괜찮다고 하더라고.]

수한이 기억하는 명훈도 그랬기에 수한은 울컥하는 감정부터 올라왔다. 왜 하필 들어와도 가온 엔터테인먼트로 들어왔을까? 다른 엔터테인먼트사도 많은데 말이다.

'설마 나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있기는 했다. 명훈은 기본적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 곳을 선호했다. 게다가 수한은 대학로에 있을 때도 명훈을 깍듯하게 잘 대했으니 명훈이 선호할 만했다. 한마디로 수한을 호구로 보고 가온 엔터테인먼트를 골랐다는 소리였다.

'정말 어이가 없네.'

수한은 아침에 성민이 보낸 문자를 보며 마음가짐을 새롭게 했다. 대학로는 대학로고, 회사에서는 달라야 한다. 수한은 어디 사무실로 돌아가면 두고 보자는 심정으로 재원에게 명훈에 관한 칭찬을 잔뜩 해두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붙였다.

[예진 씨도 보시면 분명 마음에 들어 할 겁니다. 정말 좋은 형이거든요.]

**

명훈은 전 회사보다 바쁘게 돌아가는 가온 엔터테인먼트 사무실에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유성준의 스캔들로 인해 시끄러웠던 것보다는 나았다.

'망할 유성준 새끼.'

적어도 열애설은 인정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어떻게든 빠져나갈 길이 있었지만, 인정해버리는 바람에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어버렸다. 게다가 여자가 한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이다. 연애까지는 어떻게 넘어가 주었지만, 문어발은 넘어갈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 명훈은 굉장히 억울했다. 명훈은 다른 사람의 소개를 받고 들어간 건 맞지만, 굳이 따지자면 신입의 자리인데 위쪽에서 관리를 못 한다고 얼마나 질책하던지 회사에 다니던 하루, 하루가 지옥 같았다.

'돈도 적게 주는 주제에.'

명훈은 수한의 예상과 다르게 본인이 사직서를 냈다. 물론 분위기가 주는 압박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온 곳이 가온 엔터테인먼트였다. 수한이 생각한 것처럼 수한 때문에 이곳에 왔으나, 명훈은 그 이유로 이곳이 거북하게 느껴졌다.

"김수한이는 아직 현장이야?"

"네. 실장님."

"내 애인도 아닌데 왜 이렇게 그놈 얼굴이 보고 싶은지 모르겠네."

수한과 비슷한 시기에 들어왔기 때문에 명훈은 당연히 수한도 자신과 비슷한 취급을 받을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성민은 수한을 예뻐해도 너무 예뻐했다.

'지도 반말 찍찍하면서도 왜 나한테만 지랄이야.'

처음 오자마자 지적을 당했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났다. 그렇지만 명훈은 참아내며 어서 수한이 사무실로 돌아오길 바랐다. 수한이 좋게 말해주면 성민에게 찍힌 게 어떻게든 해소될 것 같았다. 그때 재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명훈을 불렀다.

"명훈아. 오늘 예진이 스케줄 있거든. 운전 부탁해."

"네! 선배님!"

수한이 하면 자신도 할 수 있다. 명훈은 수한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보이며 성민의 관심을 빼앗아오기로 했다.

< 3. 서열은 명확히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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