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신입 매니저 >
"크흠."
어색한 기침 소리에 수한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멈췄다. 기침 소리의 주인은 예진이었다. 소원을 만나자마자 까칠하게 대할 거라 생각했던 것과 반대로 예진은 반짝이는 눈망울로 보는 소원을 어색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제가 뭘 도우면 되나요?"
"그냥 이것, 저것 같이 하면 됩니다."
수한의 단순한 계획에 예진은 기가 찼는지 비웃음을 흘리다가 소원과 눈이 마주치고는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쑥스러워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소원이 만나자마자 팬이라고 한 영향이 이런 식으로 나타났다.
'팬 앞에서는 약하구나.'
아이돌과 다르게 배우는 자신의 팬을 만날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에 팬을 만나면 굉장히 어색해했다. 게다가 소원의 사정을 알게 된 예진으로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듯 못되게 굴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알아둔 장소는?"
"가까운 한강입니다."
수한은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는 예진을 겨우 외면했다. 평일 낮이기에 사람이 많지 않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본다고 해도 남자와 연애하는 것도 아니니 들켜도 상관이 없었다. 다만 복장은 사람들이 잘 알아보지 못하게 평범하게 입어야 했다. 소원이야 집에 있다가 나온 거라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으나, 문제는 예진이었다.
"알았어. 하지 뭐."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던 재원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예진이나 그녀의 매니저인 재원이나 감정이 얼굴에 확연히 드러났다. 재미있는 파트너였다. 수한이 운전하여 한강까지 두 사람을 데리고 나가자 재원이 무슨 연락을 받더니 얼굴이 환해졌다.
"무슨 좋은 일 있습니까?"
"나한테만 좋은 일이 아니야."
"네?"
"새로 매니저 뽑는대!"
그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앞에 가던 예진이 모자챙을 살짝 위로 올리며 한심스럽다는 듯이 재원을 쳐다봤다. 그러나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조금 빠르긴 하지만, 후배가 들어오는 건 대환영이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있으면 집에 가서 하루라도 쉴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고 보면 연예계 쪽은 어딜 가든 안 힘든 곳이 없네요."
"그렇지."
"오빠! 나 자전거!"
"어! 알았어!"
재원이 재빠르게 자전거 대여소로 달려나가자 소원이 어색하게 수한을 보며 웃었다.
"이런 식으로 밖에 나오게 될 줄 몰랐어요."
"너무 집에만 있는 것도 좋지는 않으니까요. 예진 씨는 생각한 대로입니까?"
"네. 너무 예뻐요."
진심이 담긴 목소리라 수한은 인정하였다. 소원은 정말로 예진의 팬이었다. 두 사람이 자전거를 빌리고 한강 자전거 길을 타는 동안 수한과 재원은 돗자리를 빌려 그 위에 앉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였다.
"너 대단하더라."
"네?"
"새 매니저 구하는 거 너 때문이라는데?"
"굳이 저 때문이라기보다는 한소원 씨 덕분이죠."
"너 같은 녀석만 들어온다면 앞으로 일이 편할 텐데 말이지. 경력 같은 신입이 딱 너 같을 거야."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저 같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수한의 확신에 찬 말에 재원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도 시선은 예진을 향했다. 잠깐에 표정으로 재원이 얼마나 예진을 걱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번만 잘 극복하면 여배우하면 생각나는 배우가 될 겁니다."
"그런데 이런 게 과연 통할까?"
"글쎄요. 예진 씨의 의지에 따라 달라지겠죠."
매니저가 할 수 있는 건 배우가 연기를 다 할 수 있게 환경을 만들어주는 거지 직접 연기를 가르치는 게 아니었다. 물론 기획사에서는 연기 선생을 고용해 가르칠 수 있으나, 그것이 매니저의 일은 아니었다. 수한 또한 대학로에서 연극을 했기 때문에 배우의 마음가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다. 수한은 어느새 자전거를 반납하고 다가오는 두 사람에 손을 흔들었다. 이제부터 진짜 피크닉이다.
**
[고마워요. 매니저님. 덕분에 많이 힐링하고 왔어요.]
당일에는 쑥스러웠는지 이런 말이 전혀 없었기에 수한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착해도 너무 착하다. 예진에게도 그게 보였는지 소원과 만난 이후로 신기할 정도로 연기가 늘었다. 누가 봐도 그 캐릭터의 모델은 한소원이었다. 수한은 고맙다고 당장에라도 절을 하려는 재원을 말리며 커피 한 잔 사달라고 했다.
"아이고. 큰일이네."
수한은 가까운 데서 들리는 성민의 목소리에 고개를 살짝 들었다. 목소리는 큰일이라고 하는데 성민의 표정은 사이다를 잔뜩 들이켠 상태였다. 아주 짜릿하다 못해 기분이 좋아 보여서 수한은 무슨 이유일까 궁금해했다.
"안지연이 하차한다고 해서 우리 기획사에서 한 명 소개해달라고 하네."
당장에라도 노래를 부를 것처럼 즐거워 보이는 성민의 모습에 수한은 씁쓸하게 웃었다. 안지연은 결국 유성준 스캔들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했다. 유성준에게 엿을 먹인 건 좋았지만, 안지연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누구로 추천하려고요?"
"글쎄. 누가 좋을까?"
성민은 책상을 손톱으로 두드리다가 마침 고개를 쑥 내리는 수한을 발견했다. 요즘 활약이 대단하니 수한에게 선택지를 맡기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었다.
"김수한이!"
"왜 절 그렇게 부르시는 겁니까?"
"애정이지. 애정."
전혀 받고 싶지 않은 애정이었다. 수한은 시큰둥한 얼굴로 성민을 보다가 법인카드를 흔드는 성민의 모습에 열정적인 표정으로 얼굴을 바꾸었다.
"속물적인 놈."
"실장님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커피값이 밥값보다 비싸지 않습니까?"
"왜? 또 비싼 거 마시려고?"
"원래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뭐 어차피 법인카드니까 상관없지."
대표인 남일이 들으면 정색할 이야기를 잘도 하는 두 사람이었다. 수한은 성민에게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얻어 마신 뒤 곰곰이 머리를 굴려봤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떠올랐다.
"서민아 씨 어떻습니까?"
"서민아? 네가 서민아를 어떻게 알아? 걔 신인인데?"
"여기 면접 보러 왔을 때 봤습니다."
"거참. 신기한 놈이네. 하긴 서민아가 예쁘긴 하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수한과 다르게 법인카드라는 이유로 성민은 더 비싼 걸 마셨다. 보기만 해도 달달한 비주얼에 수한은 괜히 빨대만 이로 야금야금 씹었다.
"서민아는 안 돼. 너무 인지도가 없어."
박시은도 인지도가 떨어지기에 서브 여주까지 인지도가 떨어지는 애를 쓸 수 없다는 의견이었다. 가온 엔터테인먼트에다가 대체자를 맡기는 만큼 제작사에서도 이해할 만한 연예인을 넣어야 했다.
'내가 여기 소속 연예인들 얼굴을 다 보면 알 수 있을 텐데.'
사진만으로는 능력치가 보이지 않으니 난감했다. 수한은 얼른 커피값 하라는 성민의 집요한 눈빛에 열심히 머리를 굴려 한 가지 의견을 내놓았다.
"그럼 이 드라마에 들어갈 수 있는 연예인은 누구입니까?"
**
회사 일을 핑계로 성민이 여자 연예인들을 불러들였다. 어차피 한 번쯤 불러서 이야기할 것도 있기에 여차여차해서 불렀지만, 성민은 수한을 미심쩍어했다. 그로서는 수한이 무당이라도 된 것 같았다.
'내가 스타가 될 상인가!'
수한이 듣는다면 어이없어할 개그를 성민은 혼자 쳐놓고 웃었다. 그와 별개로 수한은 멀리서 여자 연예인들을 지켜봤다. 그리고 한 사람을 딱 짚어냈다.
'저 사람이다.'
[이단아- 스타성: S, 연기력: A, 가창력: A, 춤: B, 인지도: C, 기타: B, 성장 가능성: 60%]
수한은 새삼 가온 엔터테인먼트의 인재 풀을 보고 놀랐다. 수한은 이단아의 미래 모습을 기억하기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확신을 했다.
'초반에는 서브 여주만 하다가 감독들에게 잘 보여서 확 떴지.'
이단아는 아이돌 출신의 배우였다. 그래서 연기력을 인정받는데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렇다고 해도 처음부터 저 수치라니 대단하기는 했다. 수한은 멀리서 어떻냐고 신호를 보내는 성민에게 오케이 신호를 주었다. 성민은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흔쾌히 웃었다.
"내가 너 때문에 별 걸 다한다."
"제게 도움을 청한 건 실장님이 아니었습니까?"
"그러게 말이야. 내가 왜 도움을 청했지? 혹시 나한테 최면 같은 거 건 거 아니야?"
"네? 그런 걸 할 줄 알았으면 매니저를 안 하고 정치인을 했을 겁니다."
"그거 좋네. 정치인. 어쨌든 간에 너는 이단아가 괜찮다는 거지?"
"네."
"좋아. 이단아로 밀어보지 뭐."
수한은 말은 저렇게 해도 자신을 밀어주는 성민을 든든하게 여겼다. 명훈도 수한에게 잘해주기는 했지만, 성민만큼은 아니었다. 진심으로 자신을 키워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감사했다.
"아! 오늘 새로 오는 매니저 면접 보기로 했어."
"저도 이제 후배가 들어오는 겁니까?"
"몇 개월 차로 후배는 무슨······ 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군대에서 생활해보면 그런 말이 안 나오지."
수한은 성민의 군대 이야기를 들으며 열심히 공감하다가 앞에서 이지훈을 만나게 되었다. 여전히 기타 가방을 등 뒤로 메고 다녔다. 지훈은 오늘도 잔뜩 긴장했는지 온몸이 굳어있었다.
"실장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노래 하나를 만들어왔습니다."
"아니, 저는 멜로디만 몇 개 만들어오라고 한 거였는데 좋습니다."
수한은 함께 가겠느냐고 묻는 성민에게 적극적으로 가겠다고 피력하였다. 가온 엔터테인먼트는 중소 기획사이긴 해도 웬만한 시설은 다 갖춘 곳이었다. 대표인 남일이 이런 데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설이 무색하게도 지훈이 들고 온 건 기타이기에 지훈의 기타로 연주하며 만들어온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부탁이야- 대중성: B, 음악성: A, 최고 순위: 4, 성장 가능성: 20%]
수한이 잘 아는 이지훈 표 발라드였다. 수한은 기타 연주에도 불구하고 애절하게 들려오는 간곡한 목소리에 크게 감탄했다. TV로만 봤던 이지훈도 대단했는데 실제 눈앞에서 노래를 부르니 그 존재감이 훨씬 크게 느껴졌다. 놀란 건 성민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대로 굳어있다가 노래가 끝나자마자 박수를 쳤다. 그리고 수한을 보며 어떻게 알았냐고 쳐다보는데 수한은 눈앞에 보이는 이 능력치 때문이라는 걸 말할 수 없었다.
지훈은 노래를 부르고 나서의 여운이 아직 가시질 않았는데 숨을 고르며 눈을 감고 있었다.
"이지훈 씨."
"네?"
"올해 하반기가 바빠질 것 같네요. 여러 노래 준비하고 계시죠."
"감사합니다!"
수한은 환해지는 지훈의 얼굴을 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이로써 지훈은 무명 생활을 오랫동안 걸칠 필요가 없어졌다.
"참고로 지훈 씨의 재능에 대해서 대표님께 말씀드린 건 이 친구이니까 이 친구한테 감사하세요."
수한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하는 성민 때문에 당황했다가 고맙다고 연신 인사를 하는 지훈을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도 이 맛에 매니저 일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어서 지훈을 무대에서 보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 2. 신입 매니저 > 끝
ⓒ 엔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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