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신입 매니저 >
"네. 그 자리에 있을 테니 사진 잘 찍어주시고요. 절대 정보 출처가 저희라는 걸 알리시면 안 됩니다. 네. 그럼요. 수고하세요."
성민은 전화를 끊은 뒤 기지개를 쭉 켰다. 근심거리 하나가 날아갔다. 성민은 목을 양쪽으로 움직이며 굳어진 몸을 가볍게 풀다가 자리에 앉아 졸고 있는 수한을 발견하고는 피식 웃었다.
'이 녀석 봐라?'
처음 봤을 때부터 인상이 범상치 않다고 했더니 하는 행동도 평범하지 않았다. 신입인 주제에 이곳, 저곳에 안 끼어드는 곳이 없으니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성민은 수한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근데 신입이 아니라 나와 연차가 비슷한 동료를 보는 느낌이란 말이야?'
그중에서도 재치가 있어 일을 능숙하게 풀어가는 동료였다. 물론 도전 정신도 강해서 어떤 면에서는 골치가 아픈. 다행히 성민은 그런 사람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 성민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그 순간 잠에서 깬 건지 수한의 고개가 급격하게 아래로 떨어졌다가 올라왔다.
"잘 잤나? 김수한이?"
"네? 졸지 않았는데요."
"입에 침이나 닦고 말하지그래."
그 말에 수한이 빠르게 입 주변을 문질렀다. 이런 모습만 보면 어리바리한 게 뒤통수를 잘 맞을 것 같았다.
"사실 거짓말이야."
"실장님!"
"네가 말한 건 잘 처리했어."
"그렇습니까?"
담담한 얼굴로 대답한 수한은 찰나에 순간, 씩 웃었다. 그 모습이 적군에게는 자비가 없는 장군 같았다. 성민은 이런 스타일의 사람을 좋아했다.
성민은 오늘 중국에서 돌아온다는 대표의 연락을 받았다. 대형 기획사라면 대표를 만나는 게 신입 사원에게 흔치 않은 일이지만, 가온 엔터테인먼트가 아직은 중소기업이라 수한이 대표를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대표를 만나면 수한이 크게 긴장할 것 같으니 성민은 수한이 대표를 만나기 전에 먼저 말을 잘 전해두기로 했다.
'넌 좋은 상사 만나서 복 받았다. 인마.'
성민은 얼마 안 가 제보를 한 기자에게서 사진을 찍었다는 연락을 받고 웃었다. 수한이 적군에게 자비가 없듯이 그건 성민도 마찬가지였다. 성민은 시간을 확인한 뒤 수한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난 대표님 모시고 올 테니까 긴장하고 있어."
"오늘 저도 보는 겁니까?"
"글쎄. 피곤하다고 내일 나올 수도 있긴 하니까. 내일이면 내일이라고 연락하마."
"네. 그럼 다녀오십시오."
시은에 관해서 대표에게 말을 전해두기는 했으나, 그래도 직접 얼굴을 맞대고 보고하는 편이 좋았다. 대표를 모시러 가는 일인 만큼 이번에는 성민이 직접 운전했다. 공항으로 가니 이미 대표는 도착해서 성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허. 저 양반 보세?'
얼마나 쇼핑을 많이 한 건지 커다란 캐리어가 하나 추가되었다. 저 중에는 직원들에게 선물할 것도 있으니 성민은 불평하지 않고 캐리어 두 개를 잡아끌었다.
"여행은 즐거웠습니까?"
"여행이 아니라 출장이라니까."
서남일. 가온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였다. 30대 후반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40대 중반을 넘어가는 중년이었다. 성민과는 다섯 살 차이나 나지만, 친척 관계이기에 사이는 좋았다. 남일은 누가 엔터테인먼트사의 대표 아니랄까 봐 셔츠 하나에 청바지 하나로 멋을 냈다. 중국 여행이 꽤 좋았는지 피부가 반들반들해져서 돌아왔다.
"그래서 중국 출장은요?"
"좋았지."
총명하게 빛나는 눈빛에 성민은 머지않아 중국 시장을 공략하게 될 미래가 보였다. 지금 가온에도 중국에서 통하는 배우가 꽤 있으니 번갈아 가면서 활동하면 딱 좋았다. 성민은 캐리어를 차에 실으면서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캐리어가 무거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김수한 데려오는 건데.'
신입인데도 불구하고, 요새 너무 뺑뺑이를 돌려서 배려한 건데 괜한 배려인 것 같았다. 성민은 유성준을 가볍게 제압했다는 수한의 소식을 들었기에 크게 후회를 했다. 성민이 손을 탁탁 털며 운전석에 앉자 남일이 핸드폰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성준이라는 친구, 얘기 계속해봐."
"여자관계가 복잡한 친구예요. 그래서 이번 기회에 한 번 무너뜨려 보려고 합니다. 거기서도 살아남는다면 연예인이 운명인가 보죠."
"우리가 한 짓이라는 증거가 없는 건 맞고?"
"돈을 줬으니 입을 잘 막겠죠."
남일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자신의 직분을 망각하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디어를 준 게 김수한이라는 신입 매니저?"
"네. 똘똘한 친구예요. 아마 연차가 쌓이면 중요한 직분을 맡게 될 겁니다."
"그래?"
성민은 남일의 심드렁한 반응에 살짝 당황했다. 그래서 수한이 들어오면서 했던 일을 나열해놓았다. 신입치고는 재미있는 행보였다. 그러나 그럴수록 남일의 반응은 나쁘면 나빴지, 좋아지지 않았다. 성민이 계획했던 것과 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일단 만나봐야 알겠지."
"실제로 만나보면 괜찮을 겁니다."
확신에 찬 성민의 목소리에도 남일은 크게 반응하지 않으며 핸드폰만 계속 쳐다봤다.
**
'연락이 안 오는 걸 봐서는 오늘 온다는 이야기네. 긴장하지 말자. 어차피 해야 할 일이야.'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자 계속해서 긴장되었다. 수한은 인터넷을 하며 긴장을 달래려다가 메일 목록을 확인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소원에게서 메일이 하나 왔다. 수한은 이어폰을 컴퓨터 본체에 꽂아두고 메일에 첨부된 음악 파일을 재생시켰다. 그와 함께 눈앞에 음악 정보가 떴다.
[나 혼자- 대중성: S, 음악성: S, 최고 순위: 1, 성장 가능성: 10%]
수한은 환호를 크게 지를 뻔한 걸 간신히 입을 틀어막으며 멈췄다. 대박이 터졌다. 역시나 소원은 작곡에 재능이 있었다. 수한은 서둘러 음악을 재생해보았다. 저번에 만든 '여름날의 휴가'와 다르게 '나 혼자'는 잔잔하면서 감성을 건드리는 멜로디였다. 무엇보다 잔잔하게 전해져오는 소원의 목소리가 좋았다. 소원은 밝은 목소리를 가진 것과 별개로 노래할 때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예쁜 목소리를 가졌다. 그룹 안에 있을 때는 흔한 목소리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혼자 부르자 그 안에 감정이 더해져 사람을 울컥하게 하는 힘이 생겼다.
'게다가 이 가사들······.'
[그날 처음 봤을 때의 너희들이 떠올라. 새빨갛게 물들었던 그 웃음 번지듯이 퍼져 함께 웃었지.]
드림즈 멤버들과 함께 했던 그 순간이었다. 직접 그 현장을 보지 않았지만, 가사를 통해 얼마나 서로를 아꼈는지 알 수 있었다. 담담하게 부르지만, 그래서 더 슬픔이 묻어나왔다. 노래가 끝나고 수한은 어느새 흐른 눈물을 닦아냈다.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그러나 수한은 기뻐할 수 없었다. 이런 마음마저 상품으로 이용하는 거니까 당연했다.
"김수한."
수한은 갑자기 불린 이름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한은 성민 혼자 서있는 것에 의아해서 주변을 열심히 살폈다.
"지금은 나 혼자야."
"혼자 오신 겁니까?"
"아니. 당연히 대표님과 함께 왔지. 대표님은 대표실에 가셨어. 그러니 네가 나를 도와야겠다."
"어째서 그런 결론이 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알겠습니다."
수한이 성민을 따라 밖으로 나오니 커다란 캐리어 한 개가 트렁크 안에 들어있는 게 보였다. 수한이 지체하지 않고 캐리어를 꺼내 잡아끌자 성민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 어서 그거 들고 사무실로 가자고."
수한은 크기에 비해 생각보다 가벼운 캐리어를 끌며 문득 떠오른 의문을 물었다.
"그럼 대표님은 오늘 만나지 않는 건가요?"
"아니. 사무실 사람들한테 선물 나눠주고 같이 갈 건데?"
"네? 그럼 이게 직원 선물입니까?"
"어. 통 하나는 작은 분이시지. 뜻밖에 반전이었어. 가벼운 캐리어가 선물이었다니."
수한은 어색하게 웃었다. 웃으라고 한 이야기겠지만, 비꼼이 대상이 대표인 남일이니 이래저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었다.
'먼저 뒷담을 시작해놓고 뒤통수를 친 사람을 한두 번 봤어야지.'
성민이 그럴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수한은 그래도 조심하기로 했다.
"아! 한 가지 말해줄 게 있는데 들어가면 말을 조심해야 할 거야. 나한테 편하게 대하듯이 하면 안 돼."
너무 당연한 조언이라 수한은 할 말이 없었다. 수한이 아무 말 없이 따라가자 성민이 괜히 수한의 어깨를 건드리다가 곧 도착한 사무실에 큰소리를 냈다.
"여러분! 대표님의 여행 선물이 여기 있으니 하나씩 가져가세요!"
수한이 캐리어를 열자 비닐봉지 안에 수없이 많은 장식이 보였다. 겉모양은 새빨갛고. 그 안에는 복(福)이라는 글자가 노랗게 새겨져 있었다. 누가 봐도 중국에서 사 온 장식이었다. 수한은 장식만 들어있는 캐리어에 대표 남일의 재치를 의심하였다.
'돈 아끼려고 이걸로만 사 온 건가?'
수한은 그 와중에 몇 개씩 챙기는 성민을 발견했다. 장식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다. 성민은 장식들을 다 하나씩 챙긴 것을 확인하고 캐리어를 잘 정리하여 수한의 손에 들려주었다. 캐리어를 다른 부서에 넘기라는 의미였다.
수한은 캐리어를 끌고 다른 부서로 가서 인사를 하며 캐리어를 건네주었다. 캐리어 안을 본 다른 부서 사람들의 표정은 수한이 지었던 표정과 별반 다를 게 없어서 수한은 웃음이 나올 뻔한 걸 겨우 참으며 성민에게로 다시 돌아갔다.
"자. 그럼 젊은이. 대표님 만나러 가보세."
성민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들떠있었다. 그 사이에 수한은 소원이 작곡한 두 노래를 핸드폰에 내려받았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성민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남일은 쌓여있는 서류들을 보고 있었다. 중국에서 꽤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오프라인으로 결제할 것들이 쌓여있었다.
"대표님. 저 왔습니다."
수한의 앞에서 장난스럽게 남일을 까던 태도는 사라지고, 성민은 사뭇 진지해졌다. 성민의 태도로 두 사람이 친한 사이가 아닐까 짐작했던 수한은 그 진지함에 물들어 다시 긴장하게 되었다.
"두 사람 다 편하게 앉으세요."
수한을 의식해서 그런지 남일은 존대를 하며 소파에 앉았다. 조용한 공기가 흐르면서도 수한은 자신을 훑어보는 남일의 눈빛에 몸이 바짝 굳었다. 가온 엔터테인먼트가 현재는 중소 기획사라 해도 후에는 대형 기획사로 발전한다. 그를 머리에 담고 있어서 그런지 남일이 유난히 크게 보였다. 그러나 남일이 풋 하고 웃는 순간 압박했던 공기가 순식간에 풀어졌다.
"이제 막 들어온 신입한테 그리 겁을 주면 어떻게 합니까?"
"재미있으니까. 신입 때가 아니면 언제 이래 보겠어."
수한이 의문을 그리기가 무섭게 장난친 거라는 성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사람들이 진짜!'
수한은 순간 울컥했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들이 그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 무거운 한숨만 내쉬었다.
"이 실장한테 이야기는 대강 들었습니다. 한소원 씨를 영입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면서요?"
"네. 그렇습니다."
수한은 겸손을 떨지 않았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자기 공이라는 걸 내세워야 했다. 수한은 '이것 봐라?'하는 남일의 표정을 봤지만,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 의미에서 한소원 씨 관련하여 대표님께 제안 드릴 것이 있습니다."
< 2. 신입 매니저 > 끝
ⓒ 엔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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