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 탑스타-17화 (17/186)

< 2. 신입 매니저 >

"그러니까 뭘 해달라고요?"

"저번에 했던 것처럼 대사 맞춰달라고."

예진은 뻔뻔하게 요구했다. 물론 해달라고 하면 못할 건 없지만, 뒤에 있던 재원의 표정은 썩어갔다. 그러나 연예인이 요구하는데 뭘 어쩌겠는가. 수한은 대본을 들었다. 그런데 하면 할수록 수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발연기는 대체 뭐야?'

수상한 보스 때와는 달랐다. 분명 착한 연기를 하는데 누가 봐도 가식인 게 느껴졌다. 수한이 슬쩍 눈치를 보며 재원을 보자 재원은 이미 절망에 빠져있었다. 수한은 재원이 얼마나 속으로 자신을 욕하고 있을지 짐작이 되어 난감했다.

"저 예진 씨."

"알고 있어."

예진도 자신이 발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는지 이미 얼굴이 새빨개졌다. 창피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보였다.

"뭐가 문제인지 알겠어?"

"일단 예진 씨가 여자 주인공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건 알겠습니다."

"맞아. 솔직히 마음에 안 들어. 여기서 왜 알겠어요 하고 당하고만 있는 거야?"

막장 드라마의 시작은 늘 고구마로 시작한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예진이 저렇게 말하는 건 일종의 자기방어였다. 수한이 그를 알고 가만히 있자 예진도 민망해졌는지 괜한 헛기침을 하며 다시 대본을 들었다.

"인제 와서 못하겠다고 하면 안 되겠지?"

"해도 돼. 예진아."

조용히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재원 때문에 수한 또한 깜짝 놀랐다. 원래 드라마 하다가 배역 엎어지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니까 그래도 괜찮기는 했다. 다만 예진에 대한 신뢰도가 조금 떨어질 수도 있을 뿐이다. 하지만 수한은 대놓고 살벌한 기운을 내뿜는 예진의 모습에 그냥 한 말에 재원이 낚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예진아!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이미 물건들이 날아올라 재원을 향해 날아갔다. 던진 물건이라고 해봤자 쿠션 종류라 재원이 다칠 일은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어떻게서든 해내고 만다."

강렬한 의지를 표출하는 예진에 수한은 어색하게 웃었다. 이러다가 매일 예진에게 시달리게 생겼다. 다행히 그런 수한을 도운 건 성민이었다.

"사무실로 오라고 연락을 받아서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선배님이 있으니 대신해줄 겁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수한은 빠져나갈 기회를 전혀 놓치지 않고 꾸벅 인사를 한 뒤 예진의 집에서 빠져나왔다. 나가기 전에 보았던 새하얀 재원의 안색에 수한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그보다 걱정인 건 예진의 발연기를 어떻게 잡아야 할 지였다.

[성예진- 스타성: S, 연기력: B, 가창력: D, 춤: D, 인지도: A, 기타: A, 성장 가능성: 73%]

수치는 지난번과 같았다. 그렇다면 이입을 못 하는 게 문제였다. 예진 자체도 연예인 생활을 하기 전부터 잘 살았다고 하니 여자 주인공에게 이입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다.

'그보다 당근과 채찍이네.'

수한은 예진에게 보낸 것도 성민이고, 다시 빼낸 것도 성민이었다. 수한은 성민의 알 수 없는 인성에 고개를 흔들며 사무실로 돌아갔다. 사무실로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건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성민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 많은 걸 보니 다른 부서 사람들인 것 같았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예진이는 어때?"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 수한은 제 입으로도 예진이 발연기를 하고 있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수한이 어색하게 웃고만 있자 성민은 고개를 끄떡이며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별로라는 거네. 그보다 지금 더 급한 게 있어."

"예? 그게 뭡니까?"

성민이 컴퓨터 모니터를 보여주자 수한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인터넷 기사가 모니터 안에 있었다.

[드림즈 한소원, '놀라운 친구들' 예능 출연]

지난번에 이지훈이 나갔던 예능이었다. 수한은 설마 했는데 회복할 시간을 주지 않은 소원의 기획사에 화가 먼저 났다.

"저번에 한소원 씨 데리고 온다는 건 어떻게 됐습니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답변만 들었지."

그 결과가 이런 식으로 나타났으니 상황이 모호해졌다. 소원이 지금 있는 기획사와 재계약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보다 이럴 때 벌써 예능을 잡아도 되나 싶네."

"본인이 허락했으니까 기사도 냈겠죠."

"만약 허락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합니까?"

수한의 목소리에 성민이 씁쓸하게 웃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수한은 그 의미를 알았다.

'어떻게든 출연은 해야 하는 거구나.'

계약 조항에 들어가 있는 사항이라면 어쩔 수 없었다. 수한은 주머니에서 진동하는 핸드폰에 번호를 확인했다. 지난번 소원이 전화했던 번호였다. 수한은 잠시만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말한 뒤 사람이 없는 비상계단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가온 엔터테인먼트의 김수한입니다."

수한이 인사를 했지만, 핸드폰 너머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수한이 전화를 끊으려고 하자 작은 목소리가 겨우 들렸다.

[혹시 기사 보셨어요?]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인지 소원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네. 봤습니다. 소원 씨도 이 일에 동의하신 겁니까?"

[아니요. 저도 기사를 통해서 봤어요.]

"제가 말한 대로 하신 건가요?"

[네.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알겠다고 해놓고 이런 식으로 나올 줄 몰랐어요.]

"일단 회사에 연락을 해보시죠. 그 후에 다시 제게 전화 주세요."

수한은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소원을 찾아가 무슨 개소리를 하는지 함께 듣고 싶었다. 그러나 수한도 그렇고, 소원도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수한은 담배가 피고 싶어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자신이 아직은 담배를 시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기회에 다시 피워볼까?'

수한은 소원의 연락을 곧바로 기다려볼까 하다가 다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성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제대로 된 답변을 듣지 못했으니 다시 접근하는 게 낫겠지?"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 예능에 나오면 화제성 하나는 제대로겠네요."

이미 소원을 포기하는 분위기여서 수한은 딱히 뭐라 말을 보태지 않았다. 수한은 자리에 앉자마자 새로 올라온 시은의 스케줄을 확인했다. 이번 주에 2차 대본리딩이 잡혀있었다. 수한은 이미 안지연에 관해서 성민에게 이야기해둔 상태였다. 물론 성민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연예부 기자가 괜히 이상한 말 주워듣지 않게 조심하고."

"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동현이가 알아서 잘하겠지만 말이야."

아무래도 수한이 신입이다 보니 어느 정도 봐주는 건 있었다. 수한은 제자리에서 몸을 가볍게 풀다가 조금 전에 본 기사를 검색해서 찾아보았다. 댓글 반응은 지난번에 비하면 한결 좋아졌지만, 마냥 좋지도 않았다.

- 나와서 피코 오지게 하겠네

ㄴ22222

ㄴ누가 보면 한소원이 교통사고 낸 줄 알겠네

ㄴ한소원이 늦어서 난 거 아니었음?

ㄴ그거 아니라고 밝혀진 지가 언제인데ㅉㅉ

이래서 처음이 중요했다. 한 번 이렇다고 결론을 내리니 그 뒤에 결과물은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았다. 수한은 짧게 한숨을 내쉬다가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그 순간 소원에게 연락이 왔다. 수한은 구석에서 연락을 받고는 아직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한소원 씨 가온 엔터테인먼트로 오겠다고 합니다. 대신 조건이 있다고 합니다."

**

수한은 성민이 새로 건네주는 차 키를 받았다. 늘 받던 형태가 아니어서 어리둥절해 하니 성민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이거 대표님 차인데 특별하게 빌려주는 거야."

"네? 대표님 차요?"

"그래. 아직 대표님 한 번도 못 뵈었나?"

"네. 만나지 못했습니다."

수한은 미래에서 봤던 가온 엔터테인먼트 대표를 떠올리고는 미소를 지었다. 가온 엔터테인먼트가 크게 성장하는 데에는 체계적인 역할 분담도 존재했지만, 무엇보다 대표의 인성이 크게 빛을 발휘했다.

'나간 연예인들도 대표에 관해서는 좋은 말만 했으니까.'

속이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외부에는 좋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대표님이 일할 때는 냉철한 분인데 은근 마음은 여리거든. 그래서 한소원 씨한테 관심을 가진 거지."

"그래서 대표님 차를 내주신 겁니까?"

"그래. 그런 거지. 틴팅을 잘해놔서 안이 제대로 안 보일 거래."

나름대로 소원을 배려해서 해주는 일이라 수한은 크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수한이 차 키를 잘 챙기자 성민이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너 정말 그 제안 거절하지 않을 생각이야?"

"예. 그러려고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수한이 주차장에 가서 키를 만지작거리자 띠딕- 소리가 들려오며 불빛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수한은 그 차 앞으로 가자마자 크게 실망했다.

'비싼 외제 차라도 끄는 줄 알았더니.'

국산 차였다. 엔터테인먼트사 대표치고는 규모가 약했다. 그렇다고 해도 국내에서는 가격이 나가는 차이니 수한은 조심스럽게 차 문을 열어 운전을 시작했다. 값이 나가는 차답게 운전은 부드럽게 잘되었다. 소원의 집을 네비게이션을 찍어가니 다행히 차가 막히지는 않았다.

수한은 멀리서 보이는 가녀린 실루엣을 보고 차를 세웠다. 약속한 시각보다 소원이 더 먼저 나와 있었다. 수한이 차에서 내리자 소원이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직접 데리러 안 오셔도 되는데······."

"아닙니다. 어차피 집을 알아두기는 해야 합니다."

수한이 차 문을 열자 뒤에서 걱정하는 소원의 어머니가 보였다. 그러나 수한은 신뢰감이 드는 얼굴로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끝나고 제가 다시 올 거니 염려하지 마세요."

"그럼 잘 부탁해요."

원래는 부모님을 모시고 와도 된다고 말했으나, 그는 소원이 거절하였다. 이왕 일이 이렇게 된 거 정신을 단단하게 하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소원은 차에 타자마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괜찮겠죠?"

"네. 괜찮을 겁니다. 어차피 계약대로 하는 겁니다. 여기서 소원 씨가 잘못한 건 없습니다."

소원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기획사마다 재계약이 되면 소속 연예인을 다루는 방법이 달랐다. 순순히 보내주는 곳이 있는가 하면 폭력적인 방법으로 가치를 하락시켜 다시 재계약을 하게 하는 기획사가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소원이 속한 기획사는 후자였다. 수한은 소원이 안전띠를 제대로 맨 걸 확인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근데 저로 괜찮겠습니까?"

"네?"

"절 매니저로 해달라고 조건을 걸지 않았습니까?"

수한은 처음 그 조건을 들었을 때 내용을 잘못 들었나 의심하였다. 그러나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소원은 다시 한 번 수한을 매니저로 두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게 가온 엔터테인먼트로 가는 조건이었다. 어떻게 보면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다. 자신의 가치를 잘 모르고 있기에 하는 행동이었다.

"네. 후회 안 하려고요."

다른 건 몰라도 그 의지가 강하게 보여 수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또한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좋은 선택이었다. 수한은 그 제안을 들은 순간부터 소원을 어떻게 탑스타로 만들지 계획하기 시작했으니까.

< 2. 신입 매니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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