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 탑스타-9화 (9/186)

< 1. 새 시작 >

수한은 들뜬 상태로 대본을 읽어나갔다. 흡입력 있는 이야기에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대본을 읽었다. 본래라면 해야 할 일이 있지만, 그걸 잊어버릴 정도로 재미있는 대본이었다. 물론 재미와 비례해서 또 다른 문제가 있기도 했지만.

'막장이야.'

출생의 비밀은 기본으로 나오는 막장 드라마 내용이었다. 애초에 대중성이 S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막장 드라마를 좋아했다. 그냥 막장 드라마도 아니고 그 안에 특유의 세련됨을 섞었을 때 열광했다.

"저 실장님."

"왜?"

"이 드라마 대본 말입니다. 주말 드라마인가요?"

"아니? 어제 들은 바로는 주중 드라마인데? 왜?"

"내용이 재미있긴 한데 막장 드라마라서요."

"오? 그래? 그러고 보니 시은이한테 수상한 보스 추천한 게 너였지?"

수한은 부디 성민이 그 말을 예진의 앞에서 하지 않기를 바랐다. 물론 성민도 눈치가 있어서 그러지는 않겠지만, 예진이 진 이상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었다. 물론 고맙다고 홍삼 세트까지 주고 갔지만.

'그래도 바로 준 걸 보면 미리 준비는 해뒀다는 거네.'

재원이 왜 뿌듯해하는지 알 것 같았다. 수한은 그 자리에서 바로 대본을 읽어보는 성민의 모습에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성민이 마침내 대본을 덮고 모호한 표정을 지었을 때 수한은 성민이 걱정하는 것을 바로 알았다.

"수한아. 막장 드라마를 하려면 가장 큰 조건이 있어."

"네. 알고 있습니다."

"연기를 기본적으로 잘해야 한다는 거야."

시청률은 잘 나오더라도 연기를 못하면 독이 될 수 있었다. 특히나 드라마 내용은 처음에는 착한 여자주인공이 연달아 배신을 당하면서 흑화하는 내용인데 연기를 못하면 그만큼 여배우에게 독이었다.

"확실히 아까 본 예진이가 연기가 많이 늘긴 했는데 말이야."

수한은 보지 못했지만, 연기력 수치가 늘었다는 걸 말해주었으니 성민의 고민을 이해하였다. 굳이 모험할 필요가 없다. 수한은 성민에게 공감하지만, 예진의 성장을 본 이상 조금 기대하는 마음도 컸다.

"예진 씨한테 일단 줘보는 건 어떻습니까?"

"그러다가 하고 싶다고 하면?"

"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 도우면 됩니다."

"이거 참 골 때리는 놈이네."

그러면서도 수한은 성민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연예인이 성장하는 것만큼 매니저의 성취감은 커진다.

"너 이러다가 예진이 로드 매니저로 가면 어쩌려고."

"지금은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재원이가 들으면 좋아하겠네."

예진의 까칠한 말들을 나눠서 듣게 되었으니 좋아할 만했다. 게다가 예진이 자기 자리에서 멈추지 않고 앞으로 더 나아가고 싶어 하니 재원의 열정도 함께 되살아났다.

"알았어. 일단 이 대본 예진이한테 보내보고 반응 살피자. 안 한다고 하면 좋은 거지. 그리고 예진이가 급한 대로 드라마에 들어갈 짬도 아니니까."

"네."

"아! 조금 있다가는 시은이 스케줄 있으니까. 거기 따라가면 될 거야."

"네. 알겠습니다."

자리에 앉아 기획사에 온 메일을 정리하는 동안 시은의 매니저인 동현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동현은 다른 매니저들에 비해 덩치가 큰 편이라서 시은의 곁에 서 있으면 사람들이 쉽게 다가오지 못했다. 사실 그래서 매니저로 뽑힌 것도 있었다.

"수한아. 얼른 따라와"

"네. 선배님."

운전대는 수한이 잡았다. 동현이 전화 통화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누가 보면 일할 시간에 딴짓하는 거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 시은이 출연할 관찰 예능 작가와 통화하는 거였다.

'관찰 예능 출연자가 부탁했다고 했지?'

이사를 하는데 집들이 형식으로 와서 화제성을 모아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러면서 얼마 전에 있던 열애설에 관해서도 마무리 짓자고. 워낙 출연자가 인지도가 낮은 사람이라 수한은 시은이 이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까 했는데 시은은 흔쾌히 승낙했다. 어차피 관찰 예능이다 보니 부담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시은이 힘들 때 함께 했던 친구라고 하니 시은의 선택을 이해하게 되었다.

"네. 네. 주신 대로 이미 다 외웠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수한이 다만 신기한 건 관찰 예능에도 다 대본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관찰 예능을 보면 너무 자연스러워서 대본이 있을 거라 전혀 예상을 못 했는데 대충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정도는 대본으로 정해져 있었다.

'하긴 그래야 방송 사고가 안 일어나겠지.'

관찰 예능도 몇 년 유행하다가 끝났기 때문에 수한은 관찰 예능을 제대로 볼 기회도 없었다. 애초에 남의 사생활이 왜 궁금한지도 이해가 안 갔으니까.

'그걸 알았으면 내가 매니저 일을 할 게 아니라 감독을 했겠지만 말이야.'

"네. 네. 시은이한테 잘 말해두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동현의 통화가 끝났을 때쯤에는 이미 주차장에 들어선 상태였다. 수한이 깔끔하게 주차를 하자 동현이 감탄하는 얼굴로 수한을 봤다.

"면허 딴 지 1년도 안 됐다고 하지 않았어?"

"기본으로 타고난 게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가 보네. 운전 진짜 잘한다."

운전을 칭찬을 받을 때마다 수한은 어색하게 웃었다. 고등학생이 초등학생 수학 문제 만점 받았다고 칭찬받는 기분이었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는지 동현은 그동안의 매니저 생활에 관해 말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덩치와 다르게 동현은 말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솔직히 배우보다 아이돌 매니저가 더 힘들어."

"어째서입니까?"

"극성인 팬이 있기 마련이거든. 특히 남자 아이돌은 아주 끔찍하지. 그중 최고는 사생팬이고."

사생팬이라면 수한도 다른 매니저들을 통해 전해 들은 바가 있었다. 심지어 집안까지 몰래 들어가서 물건을 훔쳐가기도 한다니까 이야기만 들어도 온몸이 오싹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가온은 남자 그룹 신인 밖에 안 데리고 있으니까. 가수들 몇 명하고."

동현의 말에 수한은 어색하게 웃었다. 나중에 남자 그룹 하나가 대박을 칠 거라는 사실을 동현이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지금 있는 신인 남자 그룹은 망하고 만다. 아직 가온에서 아이돌을 크게 키울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잔인한 구조였다. 키우지 않을 거면 만들지나 말거나.

'그래도 그중 하나가 나중에 탑스타가 되니까.'

연기로 넘어가서 성공한 남자 배우가 있었다. 웬만해서는 아이돌의 연기를 인정하지 않은 세계에서 살아남았으니 아마 얼굴을 보게 되면 단번에 알아보게 될 것이다.

"어! 어! 시은아! 내려와!"

그 말에 맞춰 수한이 주차했던 밴을 빼내 입구 쪽으로 갔다. 얼마 안 가 시은이 나오는데 예진의 때와 다르게 화장을 약간 한 상태였다. 그 사이에 동현이 네비게이션에 샵 위치를 찍었다.

'화장했길래 샵에는 안 가는 줄 알았는데.'

역시 카메라가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시은은 차에 올라탄 뒤 수한을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아까 뵙고 또 뵙죠?"

"네.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배우마다 성격이 다르다는 건 알았지만, 예진을 생각하고 시은을 보면 확실히 다른 게 느껴졌다. 시은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면서도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수한은 예진과의 경쟁에서 이겨서 그런 게 아닐까 짐작했다.

"맞다. 오늘 대결 매니저님이 제안한 거라면서요?"

"그게 시은 씨한테까지 전해졌어요?"

"김 실장님한테 물어보니까 말해주던걸요. 신입이 당차다면서요."

수한은 은근 성민의 입이 가볍다는 걸 깨닫고 그의 앞에서는 말조심하기로 했다.

"오늘 보니까 예진 언니 연기 엄청 늘었더라고요. 덕분에 긴장 좀 했어요."

사실 회사 내에서 경쟁한 거지 시은이 그 역할을 따냈다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아마 그 역할을 하기 위해 다른 회사에서도 물밑 작업을 할 테니까. 그러나 수한은 가온이 따낼 거라 확신했다.

'안 그러면 성예진이 그 역을 했을 리 없으니까.'

물론 인지도 쪽으로 들어가면 예진이 유리하기는 했다. 그래도 회사에서 시은을 밀어주기로 한 이상 될 것이다. 수한이 운전해서 도착한 샵은 저번과는 다른 곳이었다. 그래도 청담인 건 마찬가지인지라 길 찾기가 어렵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매니저 일 한 적 있지?"

"네? 아니요. 전혀요."

"처음 하는 놈이 지름길은 어떻게 알지?"

강남이다 보니 신호등이 유난히 많아 교통체증을 겪는 일이 많았다. 덕분에 로드 매니저들이 해야 하는 일 중 하나는 강남역 곳곳에 있는 지름길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당연히 수한은 청담에 있는 지름길은 다 알았다.

"주차하고 위로 올라와."

"네. 선배님."

수한이 주차하고 위로 올라가자 시은은 머리부터 다시 손 보고 있었다.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아서 동현을 찾으니 동현은 누구랑 통화하는지 구석에서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다. 꽤 지루한 시간이었다.

'사실 이게 수습 기간이긴 하지.'

수한은 저번에도 다른 연예인이 없나 두리번거리다가 입구 앞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얼마 안 가 샵 안으로 여자 아이돌 다섯 명이 연속으로 들어왔다. 서로 웃고 떠들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한 팀이었다. 수치가 한꺼번에 나와서 순간 정신없었지만, 수한은 이름을 외우는 정도로만 사용하였다.

'다시 매니저가 된 이후로 여자 연예인만 보는 느낌인데 기분 탓이겠지?'

한소원에 이어서 또 다른 걸그룹을 보니 스윗걸즈가 다시 떠올랐다. 그들은 나뭇잎만 떨어져도 꺄르르 웃어서 보기만 해도 즐거웠다. 수한은 스윗걸즈를 떠올리며 그들을 보다가 갑작스러운 동현의 말에 깜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재원이가 너 걸그룹 좋아하는 것 같다고 하던데 사실이었네."

"네?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좋아해도 되는데 티는 내지 말아라."

수한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수한이 어깨를 축 늘이는 동안 동현은 다시 전화를 받으러 갔다. 수한은 오늘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건 저 동현의 통화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그때 시은이 손을 드는 게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이온 음료 마시고 싶어요."

"나가서 사 오겠습니다."

수한은 동현에게서 법인 카드를 받고 샵에서 빠져나왔다. 편의점은 다행히 근방에 있었다. 수한은 편의점으로 들어갔다가 모자를 깊게 쓴 한 여자에 고개를 갸웃했다.

'왜 뒷모습이 낯이 익지?'

[한소원- 스타성: C, 연기력: F, 가창력: B, 춤: B, 인지도: C, 기타: S, 성장 가능성: 99%]

지난번에 샵에서 만났던 한소원이었다. 안 그래도 소원을 떠올렸었는데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니 반가웠다. 수한은 인사를 건네기 위해 다가가려다가 과자 판매대에서 고민하는 소원의 모습에 다가가지 않기로 했다.

'알아보지 말라고 모자 쓴 건데 굳이 인사할 필요는 없겠지.'

수한은 시은이 말한 이온 음료를 사기 위해 음료 판매대로 갔다가 뒤에서 느껴지는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 앞에는 어두운 얼굴에 소원이 모자챙을 살짝 올려 얼굴을 드러낸 채 서 있었다.

< 1. 새 시작 > 끝

ⓒ 엔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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