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새 시작 >
"어디서 구한 건지 이 작품으로 하겠다고 하더군. 그리고 시은이도 이 작품 하고 싶다고 하고."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타 기획사면 경쟁을 해서라도 가져올 텐데 문제는 같은 소속사라는 거야. 이 문제는 우리 내에서 해결하는 게 가장 베스트고."
시은이 열애설을 버텨내면서 발생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 일에 어느 정도 수한의 책임이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예진이한테 이 작품을 양보하고 싶긴 한데······. 내가 봐도 들어온 작품 중에 이게 가장 낫단 말이야?"
시은의 상태가 불안정하므로 최대한 빠르게 작품에 들어가 일에 집중하게 하는 편이 나았다. 게다가 예진의 경우 들어갈 드라마를 엎은 상태였기 때문에 성민의 마음은 시은에게 치우쳐졌다. 예진이 항의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예진이 드라마를 엎으면서 드라마 제작사와 안 좋은 말을 주고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미 회사 쪽에서는 결정이 정해진 건가요?"
"그래. 다만 예진이한테는 어떻게 이야기할지 고민이고."
수한이 아는 예진이라면 이 일을 가만히 넘길 리가 없었다. 특히나 무엇을 하기도 전에 회사에서 시은의 손을 들어준다는 것 자체를 알아버린다면 감정이 크게 상해버릴 것이다. 인지도로 비교해봐도 예진이 훨씬 높으니 이 상황이 이해 안 될 게 뻔하였다.
"차라리 자체 내에서 누가 더 잘 어울리지를 보고 판단하는 시늉이라도 하는 게 어떻습니까?"
"굳이?"
"네. 굳이요. 적어도 뭔가라도 해야 이 상황을 이해하지 않겠습니까?"
예진의 편을 들려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예진에게도 기회를 주고 싶었다. 성민은 수한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는 듯싶더니 참고하겠다고 하고 먼저 회의실에서 나갔다.
**
"콜록. 콜록."
"괜찮으십니까?"
"잔기침 조금이야."
감기로 쉬던 재원이 다시 돌아왔다. 수한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전에 만난 이후로 예진을 만나지 못했다. 다만 성민이 수한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안심되었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피곤해진 건 예진의 매니저 재원이었다.
"대본 읽는 거 봐달라는데 콜록. 콜록."
서류 처리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저 기침이 멈추지 않는다는 거였다. 나름대로 마스크도 쓰고 왔지만, 기침 소리는 쉽게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예진의 담당 매니저였기 때문에 재원은 나갔고, 그 결과 수한은 법인카드를 받아 택시를 탔다. 목적지는 당연히 예진의 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감기 옮으면 어떡하냐고 집안에도 안 들여주지 뭐야."
수한이 받아온 법인카드를 넘기자 재원이 차 키를 건네주었다. 여러모로 씁쓸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나마 네가 편하다니까."
"절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거로 아는데."
"마음에 안 드는 사람 중에 편하다는 거야."
어느새 열린 문에 수한이 눈을 깜빡이자 어느새 재원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있었다. 수한이 재원을 향해 인사를 하기도 전에 예진이 수한이 손목을 잡아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못 지낼 이유는 뭐야?"
여전히 까칠한 목소리였다. 옷차림은 누가 집 아니랄까 봐 편한 운동복 차림이었다. 그런데도 괜찮아 보이는 건 옷이 예진 빨 받기 때문이었다. 수한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대본이 너덜너덜한 것을 보고 침을 삼켰다.
"김 실장님한테 들었어. 이 제안 네가 한 거라며?"
"네. 그렇습니다."
"네 생각에는 누가 이길 것 같아?"
"박시은 씨요."
수한은 이럴 때는 입에 발린 소리는 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예진도 그 대답을 예상했는지 크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해 예진도 그리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연기력 차이라는 게 그랬다. 객관적으로 봐도 시은은 연기를 무척 잘했다. 얼굴도 예쁜데 말도 안 되는 연기력까지 갖추고 있으니 연예계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녀가 얼마 안 가 톱스타가 될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니까 성예진이 아닌 박시은의 손을 들어준 거지.'
"그런데도 그런 제안을 한 이유가 뭐야?"
"예진 씨의 연기 열정을 믿어서요."
"뭐?"
"스스로 질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대본을 놓지 않았잖아요."
예진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던 게 이러한 이유였다. 그래서 기회를 주고 싶었다. 원래 그녀의 자리이기도 하니까. 만약 그녀가 그 역에 진정한 주인이라면 시은을 못 이길 게 없었다. 그 순간 수한은 변화를 보았다.
[성예진- 스타성: S, 연기력: C, 가창력: D, 춤: D, 인지도: A, 기타: A, 성장 가능성: 72%]
'스타성이 바뀌었어? 게다가 성장 가능성도 50%나 오르고?'
수한을 보는 예진의 눈빛이 투지로 불탔다. 그러니까 지금 계기를 제대로 심어준 것이다.
"좋아.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 이상 해낼 거야. 그러니까 네가 날 좀 도와야겠어."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대학로에서 연극을 했다고 들었는데 상대역만 해줘."
그 정도 부탁이면 쉽게 들어줄 수 있다. 수한이 가장 잘하는 것이었으니까. 어디서 다른 대본을 구해온 건지 예진은 새 대본을 건네주었다. 연기 테스트를 하는 건 전체를 하는 게 아니었다. 여자주인공의 개성이 가장 많이 드러나지 않는 식사 장면이었다.
"그런데 다 연습하시겠다고요?"
"그래."
"어째서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내가 CF를 찍는 것도 아닌데 왜 한 장면만 연습해?"
예진은 그 말만 하고 처음부터 대사하기 시작했다. 다른 건 몰라도 배우로서의 열정 하나는 대단했다. 그러니까 지금 한 이야기는 테스트를 위한 장면이 아닌 전체적인 흐름에 들어가는 한 부분이니 특별히 신경 쓰지 않겠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수한은 그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배우라면 이래야지.'
반면 시은이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기대되었다. 최선을 다하는 이상 시은도 방심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가끔 발음이 흐트러지는 예진을 볼 때면 수한도 한숨이 나왔다.
'이거 발음 교정부터 다시 해야겠는데?'
갈 길이 멀었다. 그러나 수한이 보기에도 예진은 대사를 뱉으면 뱉을수록 변하고 있었다.
**
수한은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는 두 여배우를 멀리서 지켜봤다. 마음 같아서는 안에 들어가서 두 사람이 어떻게 연기하는지 보고 싶었지만, 수한은 아직 그럴 짬밥이 되지 않았다. 수한이 할 수 있는 건 두 사람이 최선을 다하기를 바라는 것.
'성예진을 응원하는 건 아무래도 그런가?'
연기 연습을 함께 하면서 정이 들었다는 사실을 수한은 부정할 수 없었다. 정작 수습 기한이 끝나면 시은의 로드 매니저로 들어가면서 말이다. 수한은 오늘 안에 정리해두라는 파일을 정리하면서도 신경은 회의실에 가 있었다. 문제는 수한만 그러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연기라면 무조건 박시은이지."
"당연하지."
매니저들도 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수한만큼은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꽤 매력적인 캐릭터를 구사하였고, 그 캐릭터는 실제로 시청자들에게도 통하였다. 수한은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간절히 모으다가 회의실 문이 열린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두 사람의 표정으로 결과를 알 수 있었다.
'졌구나.'
결과는 예상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들어갈 때와 전혀 다르지 않은 얼굴의 시은과 대놓고 우울해진 예진은 수한이 봐도 승자와 패자를 정확히 갈라놓았다. 특히나 뒤에 따라 나오는 재원의 안색이 너무 좋지 않았다.
'이대로 끝인 건가?'
수한은 자신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 같아 미안했다. 그러나 예진은 수한과 눈이 마주치자 오히려 눈을 반짝였다.
[성예진- 스타성: S, 연기력: B, 가창력: D, 춤: D, 인지도: A, 기타: A, 성장 가능성: 73%]
연기력이 올라갔다. 예진은 괜찮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그랬다. 여배우에게는 단, 한 번의 기회만 찾아오는 게 아니었다. 여러 번의 기회가 있고, 예진은 다른 기회를 잡을 준비를 이미 하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배우였다. 그래서 수한은 예진을 적극적으로 돕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러려면 대본을 봐야겠네.'
그때 멀리서 재원이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게 보였다. 수한은 영문도 모른 채 다가갔다가 재원의 손에 들린 홍삼 세트에 의문을 그렸다.
"예진이가 너 고생했다고 먹으래."
수한은 재원의 입가에 걸린 뿌듯한 미소에 재원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예진을 기특해하는 게 틀림없었다.
"선배님. 제가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혹시 예진 씨한테 들어온 대본들을 볼 수 있을까요?"
재원은 무슨 뜻인지 이해했는지 기꺼이 예진에게 들어온 대본들을 보여주었다. 인지도 A가 달리 나온 수치가 아닌지 시은 때와 또 다른 양이 나왔다. 예전이라면 대본들을 일일이 보면서 어떤 게 좋을지 고민했겠지만, 수한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신의 한 수- 대중성: C, 화제성: C, 평균 시청률: 3%, 성장 가능성: 42%]
[연애의 정석- 대중성: B, 화제성: B, 평균 시청률: 9%, 성장 가능성: 47%]
[지새는 달- 대중성: B, 화제성: C, 평균 시청률: 7%, 성장 가능성: 62%]
[아스라이- 대중성: D, 화제성: C, 평균 시청률: 1%, 성장 가능성: 24%]
다양하다. 안 좋은 시청률로 다양한 대본은 또 처음 봤다. 처음부터 이런 상태의 대본이면 쓰지 않겠지만, 제작사가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게다가 별로인 대본을 연출로 살리는 경우도 숱하게 봤으니까.
'심지어 어떤 드라마는 한 배우의 연기력으로 다 이끌어갔지.'
개연성이 엉망인데도 시청자들이 그 드라마를 본 건 그 배우의 연기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이렇게 정확한 수치가 보이는데 성공작을 고르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였다. 게다가 수한이 의도한 게 아니었지만, 예진의 역할을 빼앗은 거나 다름이 없으니 어떻게서든 좋은 것을 골라서 주고 싶었다. 수한은 대본들을 계속해서 살핀 후 한숨이 나왔다.
'어떻게 건질 게 하나도 없지?'
그나마 나은 게 '연애의 정석'이지만, 수한은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없었다. 적어도 '수상한 보스'에는 맞춰야 하지 않겠는가? 수한은 대본들을 끝까지 살핀 후 다시 재원의 자리에 가져두었다. 들어온 것 중에서 건질 건 없었다.
"아무래도 신경 쓰이지?"
수한의 그러한 행동을 다 봤는지 성민이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네. 신경이 쓰이네요."
"그러고 보니 아까 등기로 누가 대본 보냈던데. 그거 봐볼래? 아마 예진이한테 온 대본일걸? 어제 보낸다고 했거든."
"아! 네!"
수한이 서둘러 등기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자 성민의 혼잣말 아닌 혼잣말이 들려왔다.
"누가 보면 예진이 매니저인 줄 알겠네."
수한은 딱 봐도 책이 들어있는 듯한 문서 봉투를 발견했다. 그리고 뜯자마자 보이는 정보에 자신도 모르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달보드레- 대중성: S, 화제성: S, 평균 시청률: 32%, 성장 가능성: 82%]
< 1. 새 시작 > 끝
ⓒ 엔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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