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새 시작 >
'그러고 보니 이 드라마 제목 들어본 적 있어.'
연극 단원 중에 단역으로 드라마에 참여한 사람이 있었다. 자신이 참여한 만큼 드라마가 잘 되어서 좋다며 자랑하던 게 떠올랐다. 다만 여자주인공 배우가 너무 싸가지 없다면서 뒷담 아닌 뒷담을 했는데 수한은 왠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성예진. 예진이 주연인 드라마였다.
'잠깐만 그러면 촬영 시기가 너무 안 맞지 않나?'
수한은 순간 든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수상한 보스' 드라마 대본을 꺼내 들었다.
"이 드라마는 언제쯤 촬영이라고 하던가요?"
"아직 확실한 시기는 못 잡은 것 같던데. 그래도 올해 안에는 찍지 않을까?"
"왜요? 그 대본이 마음에 들어요?"
"그냥 드라마 제목이 눈에 띄어서요."
"그냥 평범한 것 같은데 매니저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먼저 읽어볼게요."
수한은 이래도 되나 싶었다. 원래라면 예진에게 들어가야 할 대본일 텐데. 그래도 시은이 하겠다고 한 적이 없으니 아직은 안심해도 될 단계가 아닐까 싶었다.
"밥은 따로 아주머니 불러놓을 테니까 꼭 먹어."
"네. 알겠어요.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대본들을 보니 일하고 싶은 마음이 든 건지 눈빛이 총명하게 빛났다. 수한은 한때 수한이 키웠던 배우들이 생각나면서 성민과 함께 집에서 나왔다.
"여기서 미안한데 나 회사에 데려다준 후에 다른 데로 가봐야 할 것 같아."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재원이 그 녀석이 비실거리더니 기어코 감기에 걸린 모양이야. 다른 매니저들도 스케줄 도느라 바빠서 너밖에 없다."
"네? 그렇다는 말은······."
"예진이를 부탁한다."
수한은 열심히 표정 관리했다. 그래도 수습 기간이 끝난 후에는 안 봐도 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성민이 얄밉기도 했다. 굳이 그럴 거면 왜 회사까지 가야 한단 말인가? 그런 수한의 속마음을 알아챈 건지 성민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예진이가 환경에 민감해서 그래."
"알겠습니다."
"원래 이렇게 일이 많은 시기가 아닌데 미안하네. 수습 끝나고 난 후에 또 신입 공고 내야 할까 봐."
말은 그렇게 하지만, 수한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다른 회사와 마찬가지로 매니저 일도 워낙 일이 힘들어서 지원하는 사람만큼 쉽게 그만두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고 보면 추천으로 들어갔던 게 좋은 거긴 했네.'
은인에서 원수가 되어버린 명훈이지만, 확실히 회사에 다니면서 수한을 신경 써주었다. 그래도 그 은혜를 잊게 할 만큼 크게 뒤통수를 친지라 수한은 굳이 좋은 추억을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성민이 얌체처럼 차에서 내리고 얼마 안 가 다시 와서 다른 차 키를 건네주었다.
"네가 해야 할 일은 스케줄 끝난 예진이를 집에까지 데려다주는 거야. 집 주소는 네비게이션에 등록되어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오늘 고생 많았으니까 갔다 오면 바로 퇴근해도 돼. 물론 차 키는 반납하고 가야 한다."
"네. 실장님."
"그럼 오늘만 고생해."
수한은 회사 내에 세워져 있는 예진의 밴을 찾아갔다. 확실히 오랜만에 탔는데도 달콤한 향은 머릿속에 잊히지 않았다. 수한은 사무실 의자에서 졸고 있던 재원을 떠올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매니저 일은 극한 직업이었다.
'나도 평소에 체력관리 잘해야지.'
일부러 헬스도 끊어서 꾸준히 운동하고 있다. 매니저 일은 성취감을 주기도 하지만, 그만큼 스케줄이 일정치도 않아서 건강 관리를 소홀히 하면 건강을 잃기 좋았다. 수한은 차 안에서 나는 달콤한 향을 맡으며 성민이 알려준 제작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 마침 내려오는 길이었는지 선글라스로 얼굴의 반을 가린 예진이 보였다. 수한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서둘러 차에 다시 올라타 예진이 있는 쪽으로 차를 세워 문을 열었다.
'그보다 얼굴 엄청 작네.'
연예인은 다른 유전자라도 가진 건지 하나같이 얼굴이 작았다. 수한이 키웠던 배우들도 비슷했으니 수한은 유전자의 신비함을 또 한 번 느꼈다. 다시 보는 예진은 여전히 까칠하였다. 아니, 전보다 까칠함의 농도가 올라갔다.
"왜 네가 와?"
"유일하게 시간이 비는 사람이 저밖에 없어서요."
"진짜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네."
예진은 그러면서도 본래 앉는 자리에 타 안전띠를 제대로 매었다. 그러면서도 그 손에 대본이 있는 게 유난히 눈에 띄었다. 수한은 문이 완전히 닫히는 걸 보고 다시 운전을 시작했다. 수한이 예진의 상태를 살피면서 운전을 하자 그 시선이 불편했는지 예진이 끼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었다.
"뭘 그렇게 자꾸 봐?"
"기분 안 좋은 일이 있는 것 같아서요."
이런 상대에게는 쓸데없는 변명을 하는 것보다 직설적으로 말하는 편이 나았다. 그게 정답이었는지 구겨져 있던 예진의 인상이 살짝 펴졌다.
"눈치 하나는 더럽게 좋네. 안 좋은 일 있었어. 대본이 뽑힌 걸 봤는데 막상 나온 거 보니까 되게 별로인 거야."
"그렇습니까?"
"그래. 이건 완전 시놉 사기 수준이지. 그래서 그거에 대해서 직접 말하고 왔더니 다짜고짜 화를 내는 거 있지? 그건 내가 참견하면 안 되는 영역이라는 거야. 그러니까 하는 드라마마다 다 말아먹었지.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엎고 싶네."
수한은 대충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있었다. 예진의 성격상 좋게 지적했을 리도 없었다. 게다가 자존심이 강한 감독, 작가라면 그 말을 듣고 심기가 상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수한은 예진에게 딱히 뭐라 할 수 없었다. 예진의 손에 쥐어진 대본이 여러 번 본 것처럼 너덜거리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애정은 있다는 거네. 잠깐만, 설마 이거 엎어져서 수상한 보스에 들어가는 거 아니야?'
수한은 불길한 생각에 그 생각을 재빠르게 정리하고자 질문을 던졌다.
"혹시 이러한 상태에서도 드라마 하차가 가능한 겁니까?"
"대본 리딩 전이잖아. 물론 리딩 후에도 엎어지는 일도 있지."
오히려 정리되기는커녕 더 복잡해졌다. 물론 예진에게 질문하기는 했지만, 수한도 그러한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예진이 그쪽은 생각 안 했으면 했다.
'잠깐만, 이러면 내가 이 애한테 잘못하는 것 같은데?'
만약 시은이 예진이 한 드라마에 들어가서 크게 히트한다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는 사람의 기회를 빼앗아 남을 주는 모양새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수한이 곤란해진다. 아니, 실질적으로는 곤란해지지는 않겠지만, 양심이 찔려왔다. 덕분에 수한의 머릿속은 한없이 복잡해졌다.
예진은 불평 상황을 계속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수한은 자신이 적극적으로 반응을 안 해서 그런 건가 싶어 서둘러 말을 건넸다.
"제가 회사 측에 이야기해두겠습니다."
아직 엎어지기 전이니 일단은 최선을 다하는 게 나았다.
"아니, 그것보다 내가 왜 이걸 너한테 이야기하는 거지?"
"그야 매니저니까요."
수한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자 거울 너머로 인상을 찌푸린 예진이 보였다. 무언가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이 일 계속할 생각이야?"
"네. 그러려고 들어왔으니까요."
"하긴 그렇겠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심드렁해 하는 게 다 보였다. 수한은 익숙한 아파트에 조심스럽게 주차장 입구에 들어섰다. 그런 수한을 예진은 턱을 괴며 살펴봤다. 방지턱 하나도 거슬리지 않게 운전하는 걸 보면 운전 실력이 상당히 좋다는 거였다. 그러나 그런데도 예진은 수한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딱 봐도 연예인 보려고 들어온 것 같잖아.'
어리바리한 것까지는 봐줄 수 있었다. 그러나 예진은 매니저 일을 하려는 수한의 의도가 불순하다는 것에서 점수를 왕창 깎아버렸다. 특히나 소원에게 반응했던 수한을 생각하면 그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수한과 단둘이 있을 때 불편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편하게만 느껴져서 자신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마치 수한이 처음부터 그녀의 매니저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수한에 대한 점수가 소수점만큼 정도는 올라갔다.
"자. 도착했습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다음에도 네가 오는 거야?"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예진은 차에서 내리다가 무언가 생각났는지 고개를 돌렸다. 수한이 웃으면서 고개를 돌리자 처음으로 누그러진 예진의 얼굴이 보였다. 눈을 살짝 굴리는 게 묘하게 수한의 눈치를 보는 듯해서 어색했다.
"내가 한 말 잘 정리해서 전달해야 한다?"
"물론이죠.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잘 들어가."
수한은 예진이 완전히 안에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까지 지켜본 후에야 출발했다. 그보다 의외였다. 수한은 집에 돌아가면 예진이 나온 드라마를 보기로 했다. 괜히 스타성이 높은 게 아닌지 묘하게 사람을 궁금하게 하는 힘이 있다.
**
"음······."
수한은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앞에서 끙끙 앓고 있는 성민을 발견했다. 모른 척하고 지나가고 싶지만, 명색이 실장인데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이 사람이랑 만나기만 하면 이상하게 피곤한 일이 생긴단 말이야.'
수한은 종종 자신이 수습인지 구별을 못 할 때가 있었다. 그래도 수습 기한이 다음 주면 끝나니 성민이 마음대로 수한의 일정 조정하는 건 덜하지 않을까 희망을 걸어봤다.
"안녕하세요."
"드디어 왔구나!"
"예?"
"네가 올 때까지 계속 기다렸지."
어째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가. 수한은 자신을 회의실 안으로 끌고 가는 성민을 보며 이번에도 피곤한 일이 몰려올 거라 예상하였다. 성민은 수한을 자리에 앉힌 후 다짜고짜 한숨부터 내쉬었다.
"무슨 일이길래 제가 올 때까지 기다린 겁니까?"
"큰일이 생겼어. 굳이 따지자면 네가 친 사고이기도 하고."
"네? 제가 무슨 사고를?"
"예진이가 드라마 엎겠대."
설마 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말았다. 수한이 아무 말도 못 하고 보고만 있자 성민이 호쾌하게 웃었다.
"사실 네가 친 사고라는 건 농담이고. 회사에서는 나름 조율하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됐지."
감독만큼이나 작가 또한 고집이 세서 예진의 의견은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싫으면 하지 말라는 식으로 다른 배우를 물색하는 행동까지 보여 예진이 화낼 만했다.
"이곳에서 감독의 힘이 아무리 세다고 해도 그런 태도면 이곳에서 오래 살아남기는 힘들지. 남의 돈으로 자기 예술 하는 사람을 누가 쓰려고 하겠어."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다른 드라마에 들어가야지.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어."
수한은 성민의 손에 들린 대본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수한이 걱정한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수상한 보스- 대중성: A, 화제성: A, 평균 시청률: 22%, 성장 가능성: 87%]
< 1. 새 시작 > 끝
ⓒ 엔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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