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새 시작 >
"너도 그만두기로 했다고? 얼마나 했다고?"
"네. 취업했거든요."
수한의 예상대로 합격했다는 문자가 왔다. 출근은 내일부터였다. 솔직히 말해 수한은 별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말하고 떠나는 게 예의라고 생각하여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말을 꺼냈다. 그러자 사람들의 얼굴은 꽤 복잡해졌다.
"얼마 지내지도 않았는데 꽤 섭섭하네."
"저도요. 다음에 연극 보러 오겠습니다."
수한은 한때 자신을 몰아붙였던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표정을 짓자 괜히 기분이 묘해졌다. 그렇다고 이 선택에는 후회가 없었다. 더러운 꼴 다 보고 헤어지는 것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 아닌가?
"그래. 어쩔 수 없지."
말리기에는 이곳 생활이 얼마나 척박한지 알고 있어서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다만 명훈만이 능글맞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느 회사에 가?"
"엔터테인먼트 회사요."
"뭐? 진짜?"
명훈은 진심으로 신기한지 눈이 커다래졌다. 그야 명훈 또한 엔터테인먼트 회사로 들어가는 거니 당연했다.
"여기 애들은 몰라도 우리는 따로 만날 수도 있겠는데? 나도 그쪽 계열이거든."
명훈은 그 뒤로 자세히 무엇을 하는지를 말하지 않았다. 매니저 일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있기 때문이다. 수한도 매니저 일을 한다고 하면 수많은 질문을 받았고, 편견 어린 시선도 받았기에 그를 이해했다.
"어쨌든 만나면 서로 아는 척하기다."
"네. 알겠습니다."
아마 마주치기는 할 거다. 이왕이면 최대한 늦게 마주쳤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어쨌거나 명훈의 송별회에 수한의 송별회도 포함이 되었다. 어차피 겸사겸사하는 거라서 수한은 크게 거절하지 않았다. 송별회는 조촐하게 진행되었다.
"그러고 보니 나 저번 공연 때 유성준 봤어."
"나도 봤어. 모자 썼었지?"
"잘생기긴 엄청 잘생겼더라."
"옆에 여자친구로 보였지?"
"손을 그렇게 잡고 보는데 여자친구가 아닐 리가."
아닐 수는 있지만, 수한은 괜히 말을 보태고 싶지 않아 따라주는 맥주만 마셨다. 마지막이라고 하니 먹이기도 엄청 먹였다. 다행히 수한은 술이 센 편이었다. 방송계는 특히나 술자리가 일상이므로 술이 센 게 다행이었다.
"어? 열애설 터졌다."
"열애설?"
이 와중에도 핸드폰을 놓지 않는 사람이 있었는지 갑자기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수한은 입안에 남은 맥주 맛을 새우로 만든 과자로 달래며 화면을 보았다.
[박시은]
[유성준]
[유성준 박시은]
유성준은 그렇다고 쳐도 수한은 검색어에 함께 떠오른 이름에 깜짝 놀랐다. 박시은. 이름을 보니까 기억이 났다. 한때 잘 나가다가 열애설 이후로 갑자기 사라졌다. 수한이 무의식적으로 시은의 이름을 누르자 소속사 이름에 가온 엔터테인먼트가 함께 떴다. 배우 라인업에서 분명히 봤는데 왜 기억하지 못했는지 스스로가 어이없을 지경이었다.
'이러면 엄청 시끄럽겠군.'
출근 첫날부터 힘들어질 것 같다. 어쩌면 전화 받는 거로 하루가 끝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수한은 힘없이 웃었다.
**
"안녕하세요."
"왔으면 저기 가서 전화 받아!"
수한이 배정받은 팀은 매지니먼트 사업부 2팀이었다. 물론 2팀이 끝이었다. 다른 중소 기획사에 비하면 큰 편이었지만, 가온은 아직 중소 기획사였다. 그래도 체계적으로 역할을 나눠 돌아가게 하였다. 그 체계화가 나중에 대형 기획사가 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거라 수한은 추측하였다. 어쨌거나 수한이 첫 출근부터 하는 일은 전화 받기가 되었다.
"여보세······."
수한은 어깨를 치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설명하는 글이 보였다. 다행히 수한이 첫 출근이라는 잊지 않은 모양이다. 글을 보니 일단은 알아보는 중이니 확인 후 알려주겠다는 내용이었다. 흔히 열애설이 터지면 내놓는 정석적인 답이었다. 수화기 너머로는 사실이냐고 묻는 흥분한 목소리만 들렸다. 그에 비해 수한은 침착하게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대답하였다.
"네. 가온 엔터테인먼트입니다. 저희도 현재 확인 중이라 답을 해드릴 수 없어서 죄송합니다."
수한이 전화를 끊기가 무섭게 다시 한 번 전화기 벨이 울렸다. 아주 끔찍한 현장이었다. 그러나 수한은 이러한 일을 이미 몇 번 겪어본 적이 있으므로 최대한 차분하게 반응하였다. 그 덕분인지 수한을 보는 매니저들의 시선은 호감으로 시작하였다.
"첫날부터 고생이 많네."
"아닙니다. 선배님들이야말로 고생이 많으십니다. 저는 김수한이라 합니다."
수한이 먼저 고개를 숙이며 들어가자 말은 건 사내는 크흠 소리로 목을 다듬더니 위엄있는 목소리를 냈다.
"이성민이라 해. 실장이지. 앞으로 날 보면 실장님이라 부르면 돼. 일단 저 사람한테 가. 뭐 해야 할지 설명해줄 거야."
재미있는 성격이다. 원래 직장 생활은 동료를 잘 만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수한은 이곳 생활이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기대되었다.
"네. 감사합니다."
수한은 성민이 가리킨 사람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여유 있는 성민과 다르게 초췌해 보이는 것이 어디 건강에 이상 있어 보이는 남자가 의자 위에 축 늘어져 있었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신입으로 들어온 김수한이라 합니다."
수한이 먼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자 의자 위에 있던 남자가 움직였다. 좀비를 떠올리게 하는 흐느적거리는 움직임에 수한은 소름이 돋았지만,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남자는 피곤함이 가득해 수한을 똑바로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구재원이야."
"피곤해 보이시는데 커피라도 타올까요?"
"그래 줄래?"
목소리까지 갈라져 있는 게 새벽에 어디 촬영이라도 하고 온 사람 같았다. 매니저에게는 일상적인 일이라 수한은 크게 충격을 받지 않았다. 그저 어디서 고생하고 온 듯한 남자가 안쓰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물론 남자의 모습은 수한의 미래이기도 했다. 굳이 따지자면 미래의 자신에 대한 안쓰러움이었다. 수한은 탕비실 위치를 금세 찾아내었다.
'괜찮네.'
탕비실 내부는 생각보다 좋았다. 쉬는 날이 얼마 없는 매니저 일의 특성 때문인지 컵라면도 여럿 보이는 게 씁쓸했다. 수한은 달달한 믹스된 커피를 찾은 후 얼른 타서 재원에게 갔다.
"고마워."
재원은 뜨거운데도 단번에 커피를 마셔버린 후에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거울로 얼굴을 확인한 뒤 주변에 걸어뒀던 외투를 걸쳤다.
"가자."
"네!"
"대답 한 번 씩씩하게 잘하네. 참고로 지금 저기압일 거야."
첫날이라 재원이 운전대를 잡았다. 수한은 옆자리에 앉아 밴 안을 살폈다. 연예인마다 의자 간격이라던가 구비되어있는 물건이 달랐기 때문에 둘러본 결과 여자 연예인이었다. 게다가 차 안에서 달콤한 향기가 풍기니 대충 성격이 파악되었다.
'냄새에 민감한가 보네.'
수한이 맡은 연예인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으나, 종종 그런 연예인 때문에 향수를 들고 다니는 매니저를 봤었다. 잘하면 이제 그 일을 수한이 할 수도 있었다. 재원은 능숙하게 시동을 걸고 운전을 했다. 순식간에 주차장에서 빠져나오면서 햇빛이 시야를 찔렀다.
"첫날치고 긴장을 안 하네?"
"긴장하는데 티가 안 날 뿐입니다."
"그래? 매니저 일에 딱 맞네. 뭐 그렇다고 기분 좋을 때 안 웃는 건 아니지?"
"그건 아닙니다."
"그럼 다행이고. 거의 다 도착했다."
척 보기에도 잘 나가는 사람이란 게 아파트 위치로 드러났다. 청담동. 수한이 맡은 사람 중에는 청담동에 사는 연예인이 없었기에 살짝 신기했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 입구 앞에서 차를 멈추고, 밴 문을 열어놓자 아파트 입구 쪽에서 신발 소리가 들려왔다. 수한은 재원이 시키기도 전에 앞자리에서 내렸다. 재원은 빠릿빠릿한 수한이 마음에 드는지 웃으면서 함께 내렸다. 그러나 신경질적으로 구겨진 여자의 얼굴에 그 웃음이 어색한 미소로 변하였다.
"박시은 기사 뭐야?"
라이징을 넘어서서 여주인공 자리에 안정적이게 들어가게 된 여배우 성예진이었다. 예진의 물음에 재원이 곤란하다는 듯이 웃었다.
"시은이? 별거 아니야."
"뭐가 별거 아니야. 얘 때문에 나 드라마 들어가는 기사 묻히는 거 아니지?"
"어서 수습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하여간 마음에 안 들어. 연애하고 싶으면 몰래 하든가. 어설프게 해서 걸리고 난리야."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예진이 시은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게 느껴졌다. 샵에 들려서 메이크업을 받아야 하므로 예진은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을 드러내었다. 그런데도 달리 배우가 아닌지 민얼굴도 예뻤다. 물론 수한은 예진의 민얼굴보다는 다른 것에 신경이 팔려있었다.
[성예진- 스타성: A, 연기력: C, 가창력: D, 춤: D, 인지도: A, 기타: A, 성장 가능성: 22%]
연예계 안으로 들어오니 확실히 유명한 연예인들은 능력치가 남달랐다. 특히나 저 스타성에 수한은 스타성의 중요도를 크게 느꼈다. 수한이 기억하는 미래의 예진은 지금과 별다를 것 없이 계속 여주인공 역할을 맡는다. 물론 연기력 때문에 항상 같은 연기를 한다는 말은 듣지만, 어쨌거나 연예인으로서 그 정도 자리에 오른 것만으로도 평생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근데 이쪽은 누구?"
"신입 매니저인 김수한이라 합니다."
"그래? 매니저치고는 잘생겼네."
언뜻 내용만 들으면 칭찬 같지만, 예진의 말투는 퉁명스러웠다. 말을 걸기 전에 인사하지 않은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말투에서 반응을 확인한 재원은 예진을 서둘러 차에 태우면서 말했다.
"수습 기간이니까 잘해줘."
"내가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해?"
"미안. 커피는 옆에 준비해놨어."
성격이 제법 거칠다고 소문을 듣긴 했지만, 재원에게 하는 걸 보니 소문 이상이었다. 그래도 일정 선은 넘지 않는다고 하니 그 소문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차 안은 조용했다. 예진이 조용한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차 안에서 대본을 유심히 살피는 걸 보니 이번에 들어가는 드라마 대본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 수한의 눈에 다른 게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스파이- 대중성: B, 화제성: C, 평균 시청률: 4%, 성장 가능성: 10%]
'이런 것도 보인다고?'
그 순간 매섭게 쳐다보는 예진이 보였다.
"뭘 봐?"
"네? 아! 죄송합니다!"
잠깐 본 건데도 엄청 까칠하게 반응한다. 수한은 죄송하다고 연신 말한 뒤 재원을 보았다. 재원은 작게 한숨을 내쉬는 중이었다. 재원이 왜 이렇게 피곤해 보이나 했더니 이런 이유도 있을 것 같다. 수한도 그 피곤함에 물들어가면서도 대본의 정보까지 볼 수 있는 것에 소름이 돋았다.
< 1. 새 시작 > 끝
ⓒ 엔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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