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새 시작 >
"헉!"
수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수한은 다급하게 자신의 몸을 살폈다. 그러다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뒤통수가 아파야 하는데 왜 이렇게 멀쩡할까? 그보다 이상한 건 주변 환경이었다. 수한은 당연히 깨어나면 병원일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건 병원이 아니라 자신의 방이었다.
"어?"
방도 그냥 방이 아니었다. 오래전에 살던 곳이었다. 수한은 자신이 꿈을 꾸는 건가 싶어서 볼을 잡아당겼다. 그런데 지독하게 아프기만 하다.
'뭐지?'
수한은 일어난 채로 집을 둘러보았다. 말도 안 되게 예전 그대로였다. 그러다가 거울을 보게 되었다. 수한은 깜짝 놀라서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왜 이렇게 어려 보이지? 수한은 거울에 비친 청년의 모습에 적응이 안 됐다. 이상했다. 수한은 분명 40대 초반이었다. 그런데 다시 어려지다니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
'설마 그 모든 게 꿈이라고?'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수한은 다시 한 번 방을 둘러보았다. 분명 수한이 20대에 살던 집이 맞았다.
수한은 팬티 한 장만 입은 제 모습을 확인하고 급하게 아무 옷이나 입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눈에 익은 대학로의 모습에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그랬다. 지금은 그가 대학로에서 한창 연극을 하던 때였다.
'진짜 어떻게 된 거지?'
수한은 어리둥절한 상태로 서 있다가 다른 건 몰라도 단, 하나의 사실은 알았다.
'어쨌거나 20대잖아!'
수한은 곧바로 안으로 다시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물을 꺼내다가 조그만 냉장고에 꽉 차 있는 반찬 통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연극을 한다고 뛰쳐나온 수한은 독립했어도 여전히 부모님께는 돌봐야 할 자식이었다. 수한은 새삼 자신이 부모님께 얼마나 폐를 끼쳤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이 자취방도 부모님 돈으로 구했으니까.
'한심한 놈.'
수한은 핸드폰을 켜서 날짜를 확인했다. 연도를 보니 스물여섯 살로 돌아왔다. 막 대학로에서 연극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다른 길로 가려면 얼마든지 갈 수 있는 나이. 꿈대로 될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수한은 이 길로 계속 가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생생했던 게 마음에 걸렸다.
'다른 길로 가는 게 좋겠지.'
수한이 기획사를 운영하면서 많은 비법을 얻긴 했지만, 연극배우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정치 싸움에 다시 끼어들기는 싫었다. 수한의 기억을 되짚어보면 이번에 하는 연극에 수한은 스태프로 참여하였다.
아무리 수한의 얼굴이 잘생겼다고 해도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함부로 역할을 주지 않았다. 게다가 뒤에 배경이 없는 사람이니 더했다. 수한은 그 당시 나쁘지 않다고 여겼고, 지금도 그리 생각했다. 일단 하기로 했으니 이 일이 끝난 뒤에 그만두는 게 모양새가 좋았다.
'일단 밥부터 제대로 먹어야겠지.'
이 나잇대 수한은 어머니가 챙겨주신 반찬을 제대로 먹지 않았다. 귀찮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지금의 수한은 달랐다. 새삼 자신이 얼마나 불효자식이었는지 상기하게 되었다.
수한은 천장에 있는 햇반을 보며 쓰게 웃었다. 전자레인지에 햇반을 돌린 후 반찬 통을 꺼내 접이식 밥상 위에 올려두니 그럴듯해 보였다. 막 데워진 밥에 반찬을 올려 먹으니 꿀맛이었다. 수한은 깨끗하게 밥을 비워낸 후 나갈 준비를 하였다.
'전이라면 밥도 굶고 정신없이 뛰쳐나갔겠지만.'
어떻게서든 잘 보여서 역 하나 맡아보려고 안달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이번 일만 하고 나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했다.
수한은 스태프 일을 하면서 앞으로의 일을 천천히 계획하기로 했다. 마음을 급하게 먹는다고 해서 안 될 일이 될 리가 없었다. 수한은 말끔하게 씻은 뒤 깔끔한 티를 골라 입고 밖으로 나왔다.
'대학로는 언제나 그대로네.'
열정이 가득한 청년들이 모인 곳이었다. 수한이 가는 소극장은 언제나 가던 곳이므로 과거로 돌아왔다고 해서 그 길을 까먹지는 않았다.
'잠깐만 과거로 돌아왔다고?'
무의식중에 한 생각에 수한은 소름이 돋았다. 그렇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생생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소름 돋는 건 이 당시 일이 구체적으로 생각나지 않는 거였다. 당장 어제 먹은 것도 기억이 나지 않은 건 수한이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오히려 꿈의 내용을 더 현실처럼 기억하고 있으니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었다.
"김수한!"
수한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수한의 걸음은 소극장 앞에 도착해있었다. 수한은 담배를 피우며 수한에게 손을 흔드는 명훈을 보고 주먹을 꽉 쥐었다.
'배신자 새끼.'
"오늘은 늦게 왔네?"
"네. 씻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기강이 흐트러졌냐?"
말은 그렇게 해도 장난기가 가득했다. 수한은 그러한 명훈의 살가운 반응에도 속은 싸늘해졌다. 만약 그 모든 일이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면 명훈과 가깝게 지내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닙니다."
"아니긴. 지금 무대 청소 중이니까 어서 가서 도와."
"네. 선배님."
수한의 딱딱한 반응은 신입으로서의 긴장으로 보기에 부족하지 않으므로 명훈은 수한의 어깨를 툭툭 치며 피우던 담배를 마저 피웠다. 수한은 명훈의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기침을 하였다. 담배 연기가 역했기 때문이다. 이 당시에는 아직 담배를 피우지 않았는지 몸이 담배 연기에 적응하지 못했다.
'사회생활을 위해서라면 다시 피는 게 좋겠지.'
주로 술자리나 담배를 피울 때 중요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수한은 지하로 내려가다가 보이는 사람에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좀 늦었네."
"네. 늦잠을 잤습니다. 죄송합니다."
수한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름 갈구려고 하는 말이지만, 어차피 이곳에서 일하지 않을 거니까. 수한이 고개를 들자 운동복 차림으로 서 있는 여자가 보였다. 이번 연극에 여주인공인 우리였다. 그 순간, 수한은 눈앞에 뜨는 이상한 것에 눈을 깜빡였다.
[김우리- 스타성: D, 연기력: C, 가창력: F, 춤: B, 인지도: F, 기타: B, 성장 가능성: 40%]
'이게 뭐지?'
수한의 인생에 말도 안 되는 일이 시작되었다.
**
"지금이야."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수한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어둠 속에서 야광 스티커에 의지하여 무대 위에 물건을 재빠르게 치웠다. 그러자 어느새 불이 켜지면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다. 수한은 마주치는 사람마다 보이는 이상한 글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
'일단은 일반인한테는 안 보이는 것 같은데.'
관객석을 보자 그중에는 저러한 것이 뜨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는 말은 이쪽 계열 사람들에게만 저런 것이 보인다는 거다.
'그러고 보니 김우리는 대학로에서만 연기하다가 한계성을 느끼고 떠났지.'
방송 쪽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했는데 일이 잘 안 풀렸다는 이야기만 명훈에게서 전해 들었다. 수한은 각 사람의 능력치를 확인하였다.
슬퍼지는 건 여기서 가장 능력치가 있는 사람이 우리라는 사실이었다. 다들 연기가 하고 싶어서 이 안에 뛰어든 것이긴 하지만, 방송가로 가고 싶은 열망은 있었다. 그러나 저 능력치로 인해 그 희망이 완전히 사그라졌다.
'내 능력치는 안 보이나?'
솔직히 말해 수한은 자신이 가장 궁금했다. 만약 능력치로 성공할 수 있다면 희망이라도 보인다면 다시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수한의 능력치가 눈앞에 떴다.
[김수한- 스타성: E, 연기력: B, 가창력: C, 춤: B, 인지도: F, 기타: ???, 성장 가능성: 0%]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법한 능력치였다. 연기가 B 정도면 잘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능력치였다. 그동안 수한이 대학로에서 왜 인지도를 얻지 못했는지 알 것 같은 수치의 스타성이었다. 게다가 성장 가능성까지 없다. 이 성장 가능성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대략 느낌은 왔다. 연습한다든가 해서 실력을 늘릴 수 있다는 뜻 정도로 보였다.
'이쪽으로는 꿈도 꾸지 말라는 뜻이구나.'
그런데 이 기타는 무엇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언젠가 알게 되겠지. 헛된 꿈은 빨리 깨라는 것 같아서 수한은 쓰게 웃으면서도 해야 할 일을 했다.
연극은 한 시간 반을 했다. 관객들과 사진 찍는 시간을 가진 후 수한이 하는 일은 객석 청소였다. 대형 극장이라면 따로 청소부를 고용했을 텐데 소극장인지라 단원들이 해야 했다.
"오늘도 고생이 많아."
"아닙니다."
"말 편하게 해도 돼."
수한은 자꾸만 자신에게 다가오는 명훈이 불편했다. 그러고 보니 왜 명훈의 능력치는 안 보이는 걸까? 수한이 의문을 담아 명훈을 보자 명훈이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그 순간, 능력치가 떴다.
[최명훈- 스타성: C, 연기력: A, 가창력: D, 춤: D, 인지도: F, 기타: A, 성장 가능성: 60%]
수한은 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명훈의 능력치가 수한보다 좋았다. 얼굴이 수한보다는 못한 편이지만, 무난하게 생긴데다가 성격 또한 좋은 편이기 때문에 주변 사람에게 인기가 좋기는 했다. 수한은 자신을 배신하고 떠났던 명훈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기 때문에 원망하는 마음부터 들었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닙니다."
"너도 열심히 하면 위에 설 수 있을 거야."
예나 지금이나 사람 좋은 척 하나는 잘했다. 아니, 그래서 연기력이 A로 뜬 걸지도 모르겠다. 수한만 해도 뒤통수를 맞기 전에만 해도 명훈을 믿고 따랐으니까.
수한은 배신감에 분노가 치밀어오르면서도 애써 미소를 지었다. 방송가 생활을 오래 하면서 느낀 거지만, 누군가에게 악감정이 생겼다고 해도 그것을 함부로 드러내서는 위험하다. 그래서 수한은 티 내지 않기로 했다.
"선배님은 안 서십니까?"
"난 사실 연극 오래 할 생각이 없거든."
"어째서입니까?"
"이런 일로는 굶어 죽기 딱 좋잖아."
명훈은 비밀이라는 것처럼 속삭였지만, 사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워낙 버는 돈이 적기 때문에 여기 있는 사람 중 따로 아르바이트를 안 뛰는 사람이 드물었다.
수한도 나중에는 아르바이트했으니 그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 파벌 싸움까지 하고 있으니 지치지 않는 게 이상했다. 명훈은 수한이 편한지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사실 아는 형이 일할 자리 알아봐 준다고 했거든."
"그렇습니까?"
"그래. 그러니까 지금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돕다가 가려고. 그래서 무대에 안 선 거야."
그 자리가 매니저 일임을 수한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수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하던 청소를 계속하면서도 머리는 다른 쪽으로 돌아갔다.
'이 능력을 가지고 매니저를 다시 한다면 어떨까?'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명훈의 소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들어갈 것이다.
< 1. 새 시작 > 끝
ⓒ 엔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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