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
수한은 무작정 달렸다. 그 길, 끝에는 반포대교가 있었다. 수한은 당장에라도 그 안에 뛰어들려고 했다.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그러나 막상 들어가려니 망설여졌다. 그 망설임으로 인해 수한은 자살을 포기하였다. 망설일 정도로 아직 삶의 미련이 있던가?
'개 같은 새끼들.'
사회에 나오니 뒤통수 치는 새끼들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차라리 대학로에서 연극이나 계속할 걸 그랬다. 그랬다면 소소한 행복이라도 느끼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수한은 무엇보다 자신의 뒤통수를 강하게 때린 명훈을 용서할 수 없었다.
'내 새끼들을 데리고 한꺼번에 날라?'
힘들게 키운 중소 기획사였다. 처음에는 모든 게 어설펐지만, 어느새 요령이 생겼고 이름 들으면 누구나 아는 배우도 키워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수한과 함께 기획사를 키운 명훈이 소속 연예인들을 데리고 대형 기획사로 나른 탓이었다.
수한에게 이제 남은 건 아담 기획사 대표라는 직함뿐이었다. 더불어 지하에서 열심히 연습하는 이제 막 데뷔한 신인 걸그룹 스윗걸즈. 이들로 자위하기에는 음악 방송 출연 한 번이 다였다. 그 음악 방송도 회사에서 돈을 크게 써서 얻어낸 자리였다.
'어떻게 하면 좋지?'
많은 생각이 오갔다. 그러나 수한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수한은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멍하니 지나가는 차들을 보았다. 많은 기억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배우를 하겠다고?"
처음 수한의 꿈은 배우였다. 외모도 다른 일반인과 서 있으면 눈에 띌 정도로 잘생겼고, 연기 실력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수한은 자신이 있었다. 수한이 처음 그 말을 했을 때 수한의 부모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어주었다.
수한은 자신감을 가지고 수많은 오디션을 보았다. 그러나 그 자신감을 비웃는 것처럼 수한은 한결같이 오디션에서 떨어졌다. 수한의 자존감이 우수수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대학로에서 연극을 한다고?"
"네."
연기만 할 수 있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수한은 연예인의 화려한 생활을 꿈꾸긴 했지만, 무엇보다 연기하는 게 너무 좋았다. 그래서 수한은 대학로 연극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수한은 그 안에서도 수많은 좌절을 느꼈다. 그곳에도 파벌이 존재했고, 수한은 그 사이에서 헤맸다.
수한이 모든 사람에게 잘하면 잘할수록 평판은 나빠져만 갔다. 모순적인 상황이었으나,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 어디에도 끼지 못한 중립에 최후였다. 배우는 연기만 제대로 해내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배경이 되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얼굴만 잘생기면 뭐해. 인성이 그 모양인데. 착한 척하는 거 볼 때마다 토할 것 같아."
"저런 연기를 할 바에야 나 같으면 나가 뒈지겠다."
수한이 매일 듣는 뒷담이었다. 처음에는 큰 상처를 받았으나, 매일 들으니 어느새 적응되어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수한의 연극을 보러왔다가 그러한 뒷말을 듣게 된 부모님이었다.
수한은 다른 게 불효가 아니라 이런 게 불효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고 다른 길을 가기에는 이미 배우라는 꿈으로 시간을 많이 잡아먹은 상태였다. 그 가운데 수한에게 손을 내민 사람이 명훈이었다.
"수한아. 매니저 일 해보는 거 어때?"
"저 같은 사람도 가능할까요?"
"솔직히 다들 파벌 싸움하느라 널 멀리한 거지, 너 착한 건 다 알지."
명훈은 수한보다 먼저 다른 길을 선택하였다. 그래서 수한은 명훈을 믿고 그 길을 가보기로 했다. 매니저 일은 TV에서 보던 것보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게다가 명훈의 소개를 받고 들어간 지라 여러 가지로 눈치를 봐야 했다.
누군가는 추천으로 갔으니 쉽게 취업했다고 장난스레 말하기도 했지만, 사실 추천으로 들어가서 더 부담스러웠다. 추천한 사람 부끄럽지 않게 더 열심히 해야 하니까. 그 부지런함과 성실함 때문에 명훈은 따로 기획사를 차릴 때 수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결과가 이럴 줄이야.'
수한은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밀려 들어오는 매연 탓에 얼마 안 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긴 했으나, 그런데도 살아야 했다. 이렇게 생을 마감하기에는 남은 삶이 아까웠다. 그리고 이 일을 꼭 후회하게 만들어야 했다.
수한은 터덜터덜한 걸음으로 다리 위를 걸어갔다. 그러나 그 힘 없는 걸음과 다르게 마음은 완고해졌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시작한다. 수한은 주먹을 꽉 쥐었다.
**
"저희 행사 뛰어요?"
"그렇게 됐어. 미안하다."
"아니에요. 좋기만 한걸요."
음악 방송 출연 한 번이 다라서 그런지 행사를 뛴다니까 설레하는 얼굴들이 보였다. 수한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저리 생각해주니 고마운 마음이 컸다. 명훈이 회사에서 나가면서 중요 인력을 다 데리고 나갔기 때문에 수한이 매니저 일까지 다 하게 되었다.
수한은 오랜만에 현장에 뛰게 되어 기분이 남달랐다. 처음 기획사를 차렸을 때 명훈과 다짐한 것도 떠올랐다.
"우리 절대로 악덕 소속사 사장이 되지 말자."
"당연하지."
수한은 지켰으나, 명훈은 지키지 못했다. 돈이 돈을 부른다고 했다. 돈은 항상 욕심과 함께 움직였다. 수한이 진지하게 소속 연예인들의 미래를 걱정하며 작품을 고를 때 명훈은 어느 순간부터 돈 욕심을 먼저 부렸다. 그것이 이 비극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명훈은 결국 그 돈을 따라서 수한을 배신하였다. 그런데도 수한은 후회가 없었다. 무너졌으나, 다시 세울 자신이 있다.
"식사는 도착해서 행사 마치고 먹자."
"네! 대표님!"
수한은 안전띠를 제대로 맨 것을 확인한 후 차에 시동을 걸었다. 빠르게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안전이 중요했다. 수한이 안정적이게 운전하자 거울 너머로 싱글벙글 웃고 있는 스윗걸즈가 보였다. 수한은 그 웃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죽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러니까 여행 가는 것 같다."
뭐가 그리 좋은지 행사장에 도착하기 전까지도 차 안은 떠들썩했다. 정말로 소리만 듣는다면 행사하러 가는 게 아니라 놀러 가는 것 같았다. 수한은 저 아이들을 통해 어떻게서든 일어서겠다고 다짐하며 창밖을 보았다. 푸르른 하늘에다가 선선한 바람이 행사하기 좋은 날이었다.
"저 안 이상해요?"
"안 이상해. 예뻐."
먼 길을 운전해서 도착한 곳은 지역 축제였다. 수한은 축제에 온 많은 사람을 보며 긴장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수한이 고개를 돌리자 수한보다 더 긴장으로 굳어있는 스윗걸즈가 보였다. 음악 방송 때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때처럼 너희는 잘 할 수 있어. 걱정하지 마라."
"네. 대표님."
수한은 스윗걸즈가 대기실에서 메이크업을 수정받는 동안 이들이 설 무대를 살펴보았다. 전국에서 노래를 자랑하는 프로그램을 보는 듯한 어설픈 연두색 간판이 배경으로 있는 무대였다. 그 연두색 때문에 지역 축제라는 게 실감이 되면서 수한은 무대를 살펴보다가 조금 불안해졌다.
'조명이 조금 불안하게 매달려있는데?'
원래 이런 건가 싶어서 수한이 행사 스태프에게 말을 걸었다.
"저거 제대로 설치되어있는 게 맞습니까?"
"네. 저희가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할까 봐요."
스태프는 귀찮다는 듯이 수한을 지나쳐갔다. 수한은 불안하긴 해도 관련자가 괜찮다고 말하니 괜찮을 거라 여기고 스윗걸즈가 있는 대기실로 다시 돌아갔다.
다섯 명이라 그런지 메이크업 하나 수정받는데도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러나 하나같이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게 어느새 설레는 마음이 긴장을 앞섰다. 음악 방송에 출연할 때도 그랬으므로 이번에도 잘 해낼 것이다. 수한은 미리 받아둔 큐시트를 살폈다.
'역시 트로트 가수들이 뒤네.'
이런 행사의 꽃은 트로트였다. 스윗걸즈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신인이라 앞 순서였다. 그래서 대기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수한은 나가는 스윗걸즈를 보다가 아까 불안했던 조명이 떠올랐다. 수한은 자신도 모르게 무대에 가까이 다가갔다. 물론 더는 가지 말라고 막는 스태프 때문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괜찮겠지?'
스피커를 통해서 반주가 나오기 시작했다. 스윗걸즈는 프로답게 미소를 지으며 핸드 마이크를 들고 대형을 갖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노래는 몰라도 전체적인 멜로디 자체가 신나서 그런지 지나가던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게다가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아이들이 무대 위에서 춤을 추고 있으니 어느새 의자에 앉기 시작했다.
눈에 띄는 반응에 스윗걸즈는 활짝 웃으며 노래를 불렀다. 데뷔곡은 수한이 신경을 많이 써서 낸 곡이었다. 소녀다우면서도 설레는 감정이 드는 곡. 정석적인 걸그룹 노래였다. 그러나 데뷔곡이었기에 건강한 기운을 내뿜는 스윗걸즈와 잘 어울렸다.
"노래 괜찮네."
관객의 무릎 위에 올려진 손가락이 까딱거리는 게 보이면서 수한은 뿌듯하였다. 이런 식으로 다시 시작하면 된다. 회생의 기회는 아직 남아있다. 그 순간 수한의 시야가 기이해졌다.
'어?'
세상을 모자이크로 찍어낸 것처럼 눈앞의 모든 것이 점으로 보였다. 형태를 갖추지 못한 수많은 색채의 점이 수한의 의식을 건드렸다.
'왜 이러지?'
현기증이 함께 찾아오면서 수한의 몸이 비틀거렸다. 누군가 괜찮냐고 수한을 붙잡는 손길이 있었지만, 수한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몸 상태가 이상했다. 수한은 머리를 붙잡은 채로 눈꺼풀을 연신 깜빡였다. 그런데도 변하는 게 없었다. 오히려 점들이 더 여러 개가 생겨났다.
"이봐요. 괜찮아요?"
수한은 강제로 의자에 앉혀진 채로 무대를 보았다. 수한이 머리를 흔들며 앞을 보자 점으로 보이던 세상이 다시 합쳐지기 시작했다. 또렷하게 보이는 형체에 수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하나- 스타성: C, 연기력: C, 가창력: B, 춤: B, 인지도: F, 기타: A, 성장 가능성: 78%]
'저게 뭐지?'
이상한 게 보이기 시작했다. 수한은 자신이 잘못 본 것인가 눈을 깜빡이다가 흔들리는 조명을 발견했다. 수한이 내내 마음에 걸려 했던 그 조명이었다. 찰나에 순간, 수한은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뒤통수로 커다란 충격이 오면서 비명이 들렸다.
"구급차 불러!"
시끄러운 소리로 귀가 윙윙거렸다. 그 와중에도 수한은 제 품에 안겨있는 하나를 보고 웃었다. 하나는 상황 파악이 안 됐는지 불안하게 시선을 옮기다가 수한의 피를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대표님!"
"내가 다쳐서 다행이다."
수한은 그 말을 끝으로 의식을 완전히 잃었다.
< 프롤로그 > 끝
ⓒ 엔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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