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함께
“후루룩―”
“후루루룩―”
시골 마을 회관에는 오늘따라 사람이 많았다.
뜨끈뜨끈한 온돌바닥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이들.
그들은 국수를 먹느라 여념이 없었다.
계란과 김 고명이 듬뿍 올라간 국수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멸치를 듬뿍 우려낸 국물 향기도 덩달아 피어올랐다.
‘향 좋네.’
유기준은 면을 한 바퀴 휘저어 후루룩 먹고.
그릇을 기울여 국물을 들이켰다.
역시 이 맛이지.
“호준 엄마, 국물 한번 기가 막히네!”
유기준은 옆에서 식사를 하는 아내에게 자신의 감상을 말했다.
아내는 어깨를 으쓱하며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내가 한두 번 해보나? 호준 아빠, 맛있는 것도 좋은데 천천히 먹어요! 그러다 체하겠네.”
“허허, 나이는 들었어도 아직 거뜬하다고.”
아내의 걱정을 여유있게 받아넘기며 유기준은 국수를 마저 먹었다.
맛도 맛이지만, 유기준은 오늘 무척 기분이 좋았다.
그야말로 최고였다.
‘호준이 이 녀석, 언제 이렇게 어른스러워졌는지.’
바로 아들, 호준 때문이었다.
지난 20년간 매달 말일마다 마을 사람들과 다 같이 점심을 해 먹는 행사가 있었는데.
아들이 감쪽같이 날을 맞춰 음식을 잔뜩 보내줬던 것.
서프라이즈랍시고 미리 알려주지도 않고 말이다.
‘바쁜 녀석이 주위 챙길 줄 알고. 다 컸어.’
물품을 받자마자 전화를 했지만 길게 전화를 하지는 못했다.
출근해서 일한다는데 방해할 수 없지 않은가.
유토피아 3위 랭커로 일약 스타덤에 오르고서도, 팀장 직위를 맡아 일까지 병행하는 아들.
그런 아들이 유기준은 무척이나 자랑스러웠다.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지. 암.’
마을 사람들은 덕분에 계를 탔다.
평소에는 국수만 먹고 끝났는데, 오늘은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뉴질랜드산 청정 소고기 100kg.
구석에 난로에서 구워지고 있는 고소한 인절미의 향.
그 옆에 쌓여있는 쫀득쫀득한 백설기까지.
달달한 옛날 과자와 고구마, 밤 양갱 등.
아들이 보내준 음식 덕분에 마을 노인분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구석에서는 한씨 할머니가 제수용 전을 구울 때 쓰는 원형 프라이팬에 스테이크를 굽고 있었다.
치지지직―
고기의 핏기가 가실수록 소고기의 기름향이 퍼져갔다.
적당하게 고기가 익자 한씨 할머니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자, 소고기 스테이크 먹을 사람은 이쪽으로 오라구! 늦게 오는 놈은 없어!”
“하다 하다 스테이크도 먹어보는구만!”
한씨 할머니의 말에 접시를 든 남정네들이 부리나케 줄을 섰다.
두툼한 스테이크가 척척 담기자 접시를 든 이들은 활짝 웃었다.
“이야. 두께가 두둑하구만! 서울에서 와서 그런가벼.”
“서울이 아니라 뉴질란드라는구만! 저기 바다 건너 물 건너 공기 좋은 데 있잖나.”
“오랜만에 배때기에 기름칠 좀 하겄구만. 형님, 호준이 덕분에 배불리 잘 먹습니다!”
다들 스테이크를 먹는 와중에 심씨가 넉살좋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유기준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허허. 뭘. 난 숟가락만 얹었을 뿐이네. 호준이가 다 알아서 했는걸.”
“호준이가 어릴 때부터 착하기는 했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인사도 잘 하고. 우리 신영이 공부도 봐주지 않았나.”
“그랬던가. 허허.”
“호준이 덕분에 성적도 꽤나 올랐지.”
자식이 칭찬받고 인정받는 것은 부모에게는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기쁜 일.
적당히 넘겨들으면서도 유기준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자, 천혜향과 겨울 딸기 30박스를 나누어주는 것으로 모임은 마무리되었다.
과일이 가득 담은 봉지를 안고 가는 어르신들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피었다.
“이리 많이 받아서 미안해서 어쪄.”
“괜찮습니다, 어르신. 들고 가세요! 마을회관에도 조금 남겨둘 테니까 부족하면 오시구요.”
“고맙네. 고마워! 호준이한테 고맙다고 전해주구려. 역시 착하긴 착혀. 주위 사람들 챙길 줄도 알고.”
몇 번 거절하다가 받는 할머니도 있었고.
“호준이가 어릴 때부터 착혔어. 한번은 버스에서 내려서 짐을 이고 가는데 대신 들어준 적도 있다니까.”
“저도 몰랐네요. 저 혹시 무거우시면 대신 들어다 드릴까요?”
“괜찮네 괜찮어. 잘 먹겠네. 고마워!”
호준의 어릴 적 이야기를 해주는 김씨 할머니도 있었다.
“우리 마을에 인물이 났구만. 어릴때부터 착하더니, 언젠가 성공할 줄 알았어!”
“허허. 자네가 아들을 참 잘 뒀어. 부럽구만 부러워!”
분에 넘치는 칭찬을 들으며 유기준은 모두에게 과일을 나누어 주었다.
조용해진 마을 회관에는 유기준과 그의 아내, 이미자만이 있었다.
둘은 눈이 마주치자 나지막이 웃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
“그러게 말일세. 다들 맛있게 먹었으니 된 거지.”
“우리도 집에 가서 유토피아나 가봅시다. 요나스 마을에 들러서 호준이 소식이나 들어보는 건 어때요?”
“그거 좋지!”
“그럼 2호점 앞에서 만납시다. 난 방어구 좀 사고 갈테니까 좀 기다려요!”
“나도 잡화점에 갈 일 있으니까 시간이 얼추 맞겠군.”
둘은 부리나케 마을회관을 나서 집으로 향했다.
둘의 대화내용은 나이 60을 넘어선 이들의 대화라기에는 조금 색달랐다.
대화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이미 푹 빠져있었다.
유토피아라는 환상적인 세계에.
* * *
“말도 안 돼.”
이미주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지금 본 게 맞는 건가?
자신도 의문이 들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아 그녀는 호준에게 채팅으로 물어보았다.
└ 【이미주】: 호준 님, 방금 뉴스 봤는데 정말인가요? 80억을 전부 다 기부한다니…?
그녀가 방금 전 인터넷으로 확인한 뉴스는 다음과 같았다.
【호준의 통 큰 기부, 80억 원 노란어린이재단에 기부해】
【기부금은 저소득층 청소년의 교육과 학대 청소년 숙소 건립, 장학금 등으로 쓰일 예정】
【호준, 기부 당시 기부금 사용내역을 온라인에 투명하게 공개하도록 요청해】
【노란어린이재단, 투명하게 공개하고 전액 청소년을 위해 사용하겠다 밝혀】
【호준의 통 큰 기부에 사회 각계각층 응원 이어져】
무려 호준이 80억 원을 기부한다는 소식.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할리우드 스타들의 기부를 많이 봐왔던 이미주조차도, 갑작스러운 호준의 통 큰 기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연예인들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한번에 80억 원을 기부하는 것은.
주로 이미지 관리용으로 기부를 하는 경우에는 두어 달에 한 번씩.
잊을 만할 즈음에 3~4억 정도를 기부하는 경우는 들어봤지만.
‘진짜 사람 놀라게 하는 데는 선수라니까.’
이미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호준의 결단력을 높이 샀다.
‘생각하는 게 다르긴 달라.’
광고를 재계약하면서 월 80억 원을 벌게 되자마자 기부를 했다.
이로써 그의 이미지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아질 것은 분명했다.
때마침 호준의 답이 돌아왔다.
└ 【호준】: 네. 노란어린이재단에 기부하기로 이미 얘기를 끝냈습니다. 제 버킷리스트 중에 하나라서. 생각 난 김에 연락했습니다.
└ 【이미주】: 보통은 차라든가 집이라든가, 빌딩이라든가. 남자들은 큰돈 벌면 차를 제일 먼저 사던데. 이렇게 기부부터 하는 플레이어는 처음 봤어요.
순수한 감탄의 말에 호준은 나직이 대답했다.
└ 【호준】: 운전보다는 택시 타고 다니는 게 더 편합니다. 나중에 필요하면 사도 되고요. 그보다 메인 퀘스트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는데….
└ 【이미주】: 아, 넵. 편히 말해주세요!
‘맞아, 메인퀘스트가 끝났댔지.’
기부보다 더 중요한 건이 남아 있었다.
호준이 긴 시간 동안 도전한 메인퀘스트가 성공했다는 사실.
오랜 시간을 들인 만큼 보상도 훌륭하리라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이번에는 뭘 얻었지?’
이미주는 촉각을 곤두세우며 모니터에 집중했다.
그녀의 눈이 초조하게 깜박이던 순간, 호준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 【호준】: 당분간 가게를 문 닫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닫는다고…? 이렇게 갑자기?’
호준의 난데없는 휴업 선포에 이미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많은 손님들이 보내올 아쉬움이 가득 담긴 메시지들이.
갑자기 문을 닫는다면 기존 손님들이 왜 그런지 궁금해할 것은 뻔할 뻔 자였다.
└ 【이미주】: 대체 무슨 일 때문인가요? 간단하게 이유라도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 【호준】: 요정성을 지으려면 시간이 필요해서요. 앞으로는 요정성에서 장사를 할 생각입니다. 요정성은 최대 2,000명까지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라서 짓는데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2천 명이나 들어갈 수 있다고…?”
숫자를 본 순간, 그녀는 재빠르게 셈에 들어갔다.
한 번에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음식점이라면.
150명밖에 수용하지 못하는 요정의 쉼터와는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시간당 수익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말이고.
‘기존 가게보다 더 아름답기도 할 테고. 분위기도 있고.’
요정성은 호재였다.
요정의 쉼터는 목욕탕을 위한 곳으로 운영해도 괜찮지 않나.
지금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적극적인 서포트였다.
호준이 마음껏 제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돕는 일.
└ 【이미주】: 공지는 제게 맡겨주세요. 더 말하지 않으셔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 기다리던 분들이 서운하지 않게 요정성 첫 방문자는 무료 음료를 드린다는 식으로 멘트를 날려보는 건 어떨까요?
└ 【호준】: 좋은 아이디어네요! 그럼 공지 부탁드립니다.
└ 【이미주】: 넵. 필요하신 부분 있으면 언제든 연락주세요.
마지막으로 엔터를 누르자 메시지는 전송되었다.
이미주는 기지개를 켜며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요정성이라. 기대되는데.”
쉬지 않고 바로바로 그녀는 공지사항을 적어 내려갔다.
모니터에 집중해 있는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녀가 상상한 요정성과는 차원이 다른 요정성이 건설되리라는 것을.
* * *
“휴. 바쁘네.”
메인퀘스트를 깬 이후 호준은 많은 일을 겪었다.
먼저 첫 번째로.
【당신은 요정국의 진정한 왕의 자격을 획득했습니다】
진정한 왕의 자격을 획득했다.
이로써 요정국을 세웠고 세력 확장이 가능해졌다.
세력 확장은 주위 지역의 정치인을 포섭해서 요정국에 포섭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미 마을 하나는 접수했다.
요나스 마을 촌장이 자청해서 와주었던 것.
“우리 마을은 호준 님이 없으면 안 돌아갑니다! 호준 님! 저희를 버리지는 않으실 거죠?”
“호준 님, 저희 마을사람들은 다 환영합니다!”
촌장님과 마을 사람들의 간곡한 부탁대로, 요나스 마을은 요정국에 포함되었다.
그렇게 요나스 마을은 요정국의 수도가 되었다.
퀘스트를 통해 얻은 것은 또 있었으니, 바로 세계수였다.
세계수 묘목은 요정들과 요정왕에게 1시간마다 축복을 내려주었는데.
그 축복이라는 것이 너무 효과가 좋았다.
【세계수 묘목이 요정왕과 요정에게 축복을 부여합니다】
【축복의 효과로 체력과 요정력이 100%로 회복됩니다】
【축복의 효과로 힘이 1.5배 상승합니다】
【축복의 효과로 이동속도가 1.5배 상승합니다】
【축복의 효과로 방어력이 1.5배 상승합니다】
‘포션이 이제 필요가 없네.’
체력이 전부 자동 충전되었다.
1시간마다.
정말로 포션이 필요없게 되었다.
요정성 건축도 순탄하게 진행되었는데 재료를 얻는 것부터 짓는 과정까지.
인어족과 용족, 대장장이 칼과 긴밀히 협의한 덕분이었다.
덕분에 건설 시간이 단축되어, 최종 단계에 접어들었다.
지금 호준이 들고 있는 마지막 벽돌이 바로 그것.
별이와 요정들이 모두 손을 모은 채로 바라보았다.
“호준님, 어서요!”
“뀨뀨!”
“끼루!”
보채는 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호준은 손가락을 까딱였다.
염력을 이용해 마지막 벽돌을 쌓는 순간.
번쩍이는 빛과 함께 요정성이 완성되었다.
【요정성이 완성되었습니다】
【인벤토리에 있는 활공석이 요정성에 반응합니다!】
【활공석을 장착할 경우 성이 공중으로 100m 이상 떠오를 수 있습니다!】
화룡점정으로 메인퀘스트에서 얻은 ‘활공석’을 장착한 순간.
거대한 성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와아.”
“끼루루!”
“츄츄츄!”
성이 풍선처럼 두둥실 떠오르자 석양이 비치는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눈부신 전경이었다.
위에서 전경을 내려다보며 호준은 미소지었다.
언젠가 요정성을 짓고 석양이 비치는 호숫가를 내려다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 목표가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형. 축하해요. 진짜 저도 형처럼 멋지게 성공하고 싶어요!”
다리를 치료하고 다시 합류한 진수가 주먹을 흔들며 다짐을 했고.
“이런 데서 살 수 있다니. 꿈만 같아. 내가 다짐하는데 앞으로 진짜 열심히 일할 거야.”
“내 말이 내 말이. 이야, 여기 진짜. 이야… 내가 성에서 산다니.”
베티와 샤롯에게 성에 각자의 방을 준비해뒀다고 말하자 입꼬리가 승천했다.
요정들과 이무, 그밖에 동물들이야 뭐.
“끼루끼루~”
“이무우!”
“츄츄츄!”
다들 흥분에 겨워 말이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처음 유토피아를 시작할 때.
서울에서 오랜 시간 자취하면서 외로웠던 그 마음들은 온데간데없었다.
외로움은커녕.
오히려 주변 이들을 챙기면서 웃고 즐기느라 바쁜 나날들이었다.
외로움은 사라지고 즐거움과 미래에 대한 기대가 남았다.
쓸쓸함 대신 책임감과 기쁨과 즐거움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참 재미있네. 인생이란 게.’
붉은 석양을 보며 호준은 눈을 감았다.
붉은 석양이 앞날을 축복하기라도 하듯 따스히 얼굴을 감쌌다.
《농사를 너무 잘함》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