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진검승부
이주영.
그녀는 새롭게 정해진 상대, 호준을 보자마자 미소를 지었다.
‘잘됐군. 한 번쯤 겨뤄보고 싶었던 상대였단 말야.’
막 게임을 시작한 호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와는 언젠가 꼭 한번 실력을 겨뤄보고 싶었다.
호준이 적을 해치우는 영상을 곧잘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직접 겨뤄봐야 상대의 가치를 알 수 있지.’
이주영은 호준을 에이스 길드에 영입하는 건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그의 진가가 어느 정도인지 두 눈으로 확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것이 이주영의 심산.
그렇기에 이주영은 칼을 지팡이 삼아 바닥에 꽂으며 호준에게 말을 걸었다.
“호준 님, 여기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동감입니다.”
“한창 방송 중이시네요. 제 얼굴도 그대로 나가겠죠?”
이주영은 구름 카메라를 눈짓하며 물었고 호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전투 장면은 고스란히 중계될 겁니다. 부담스러우시면 카메라를 끌까요?”
호준의 물음에 이주영이 아니라 채팅창이 난리가 났다.
└ 안 돼애!!
└ 역대 빅 매치 아닙니까! 레알팝콘각!
└ 갓호준 님 제발 플리즈! 보고 싶습니다!
이주영은 카메라를 바라보며 손을 한 번 흔들고는 다시 호준과 눈을 마주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자신감이 충만해 있었다.
“아뇨. 호준 님 방송에 나간다니, 저야말로 기쁩니다. 제 승리를 고스란히 찍을 수 있겠군요. 절대 안 봐줍니다.”
“이쪽도 마찬가지입니다.”
호준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고쳐 쥐었다.
이주영은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호준을 바라봤다.
지금까지 봐왔던, 자신만만한 모습 그대로였다.
과연 실력도 자신감을 뒷받침해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재미있는데.’
이주영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검의 끝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30kg이 넘는 천룡도가 그녀에게는 나무젓가락처럼 가벼웠다.
힘 하면 어느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다고 자부했다.
이주영은 마지막으로 호준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혹시 목이 베이거나 흉하게 죽더라도, 악감정 가지지 마셨으면 합니다! 이건 그저 시합이니까요.”
“다들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어서 시작하죠.”
이주영은 호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천격!”
쿠콰콰콰쾅
검 끝에서 생성된 번개가 호준을 향해 날아갔다.
번개가 호준의 머리에 닿으려던 순간.
“흡.”
호준이 옆으로 한 발자국 움직여 번개를 피했다.
그의 움직임은 너무나 가볍고 여유로워 보였다.
‘저렇게 가까이 있는 걸 피했어?’
오히려 이주영은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것은 마치.
지금까지 피할 수 있었는데 번개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얼마나 빨리 다가오는지 계산하려는 듯한.
‘빨리 해치워야겠다. 오래 살려둘수록 불리해.’
그녀가 쓸 수 있는 스킬은 한정되어 있었다.
이곳은 포션 같은 회복 아이템은 쓸 수 없었으니까.
그러니 한정된 마력, 한정된 체력으로 싸워야 했고.
쓸 수 있는 카드도 한정되어 있었다.
이주영은 호준의 실력을 간파하고서, 그다음 카드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곧바로 작전대로 행동에 들어갔다.
“하압!”
이주영은 비호와 같이 달려가서 호준의 옆구리를 향해 칼을 내질렀다.
챙― 채챙―
호준이 대검으로 방어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검과 검이 맞붙으며 날카로운 비음을 냈다.
‘어디 얼마나 버티나 보자.’
이주영은 연달아 계속 칼을 휘두르며 호준의 빈틈을 노렸다.
호준은 처음에는 몇 번 방어하는 듯하더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이주영은 자신만만해져 더욱 거세게 그를 몰아붙였다.
채챙― 챙―
그렇게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다 보니, 어느새 호준은 전장의 막다른 벽을 등 뒤에 두게 되었다.
‘좋았어.’
이주영은 자신만만했다.
벽을 등지고 있는 호준은 더 이상 피할 공간이 없었고.
이대로 자신이 가진 스킬들을 퍼부으면 게임은 끝.
제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살아남기란 힘들 것이 분명했다.
이주영은 검을 추켜 올리며 스펠을 외쳤다.
“천신의 분노!”
찌지지직―
돌연 호준의 머리 위, 허공이 북북 찢기더니 그 사이에서 붉은 구가 튀어나왔다.
붉은 구는 당장 호준을 집어삼킬 것처럼 입을 쩍 벌렸다.
벌어진 입 안에서 튀어나온 붉은 혀가 호준의 목을 감아쥐려던 그때.
“으, 징그러.”
호준이 대검을 휘둘렀다.
이주영이 미처 눈치채지 못할 만큼, 너무나 빠른 속도였다.
‘이게 뭔….’
이주영이 당황한 나머지 굳어있던 순간.
그녀의 발 앞에 붉은 혀의 잔해가 떨어졌다.
철푸덕―
꿈틀꿈틀
붉은 혀는 몇 번 꿈틀거리다가 이내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좁아터진 전장에 피 내음이 진동했다.
이주영은 뺨에 묻은 붉은 피를 손바닥으로 만지며 그제야 실감했다.
‘설마 지금까지 봐 줬다는 건가?’
방금 호준이 혀를 자르는 순간.
그녀는 그 모습을 미처 보지 못했다.
뭔가 확 지나간 것 같기는 한데 너무 빨라서 눈으로 따라가지 못했던 것.
그녀가 그럴진대, 혀를 베인 붉은 구, 그 안에 깃들어있는 악마도 마찬가지였다.
악마도 자신의 혀가 잘려나간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참기 힘든 고통이 악마에게 찾아왔다.
끄그그극! 끄그그그그!
붉은 구에 갇힌 악마가 고통이 담긴 비명을 내질렀다.
혀가 잘려나가는 바람에 비명은 크지는 않았으나, 매우 귀에 거슬렸다.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듯한 소리였으니까.
이주영이 귀를 막으며 뒤로 재빨리 물러섰다.
“아, 시끄러워.”
호준은 그녀처럼 참고 있지만은 않았다.
삭 삭 사삭―
붉은 구를 6등분으로 잘라 주었다.
더 이상 소리를 낼 수 없도록.
크엑―
호준이 케이크 자르듯 악마를 자르는 모습을 보며, 이주영은 검을 고쳐 쥐었다.
그녀가 보기에 호준은 위험했다.
천신을 농락한 상급악마를 자를 수 있음에도 지금까지 힘을 감추고 있었다면.
‘위험하다.’
쉽게 꺾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주영의 경계 어린 시선을 알아차린 호준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갔다.
그는 거치적거리는 잔해를 발로 치워버리고는 대검을 들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할까요?”
이주영이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호준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준비운동은 끝나고 실전이 시작되었다.
* * *
미국 맨해튼, 도시 이곳저곳에 즐비한 푸드트럭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이름은 로버트.
부잣집 도련님이 서 있기에는 조금 안 어울리는 듯했지만, 이래 봬도 그는 이 와플 가게의 단골손님이었다.
“어이, 왔나.”
“찰스, 생크림 맛 3개랑 보통 맛 10개 줘. 아, 딸기도 얹어주나?”
“바나나도 특별히 얹어주지.”
“오오. 찰스 덕에 내가 행복하다니까. 월요일마다 이 별미를 먹으러 안 올 수가 없지.”
로버트가 능청맞은 미소를 지으며 트럭 옆 간이의자에 앉았다.
푸드트럭의 주인이자 로버트와 오랜 친구 사이인 찰스는 분주하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툼한 와플을 굽기 위해 반죽을 붓고, 과일을 다듬는 사이.
로버트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는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아. 와플 구울 때 나는 향은 진짜 최고야.”
“향이 좋으면 팁이나 넉넉히 주라고.”
“팁 말고 프랜차이즈 내는 건 어때? 내가 얘기한 그거 있잖아. 텍사스에서 이 와플집을 내면 아주 대박일 거라니까. 내가 장담하지.”
“됐네. 나는 지금 여기에서 벌어먹는 것도 충분해. 부모님이 물려주신 내 집이 있고, 차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생활비 정도 벌면 넉넉하다니까.”
“허. 자네처럼 욕심이 없는 사람은 진짜. 흔치가 않아.”
로버트는 어깨를 으쓱하며 더 이상 보채지 않았다.
친구 찰스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이렇게 적은 돈을 벌고 적게 쓰는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요 근래에 보기 힘든 부류였다.
많이 소유할수록 그만큼 피곤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돈이 얼마나 허망한지 깨달았다나.
‘특이한 녀석이란 말야.’
로버트는 찰스가 건네는 생크림 와플을 하나 들며 피식 웃었다.
찰스는 몇 안 되는 배울 것이 많은 친구였다.
그는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살아가는, 현대인과는 다른 부류였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소통하는 것을 좋아했다.
와플 가게를 운영하는 것도 소통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라나.
“프랜차이즈가 생기면 자네가 여기까지 안 올 거 아닌가. 그리고 여기에도 단골이 많이 생겨서. 외로울 틈이 없어.”
“그래. 자네 뜻이 그렇다면야 그게 맞는 거겠지.”
로버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와플을 먹었다.
입에서 살살 녹는 생크림과 바나나, 딸기의 싱싱한 맛이 하모니를 이루었다.
겉은 바삭하면서 속이 촉촉한 와플은, 먹어도 먹어도 질리는 법이 없었다.
집안의 전속 요리사에게 부탁을 해도 이 정도 와플은 나온 적이 없을 정도로 맛은 훌륭했다.
“으음… 끝내준다 진짜. 아예 이 근처에서 살아야겠어.”
“그러면 더 좋구. 하하. 저녁에 당구도 치고 바도 가고 그러겠군.”
“하하. 대학 때처럼?”
로버트는 찰스가 새로 건네는 와플을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뜨끈뜨끈한 와플을 이제 막 한 입 먹으려는데.
띠로 띠로링―
핸드폰이 요란한 벨 소리를 내뱉으며 진동했다.
이 벨 소리는 한 사람에게 지정해 놓은 것이었기에 누가 전화했는지 듣자마자 바로 알 수 있었다.
“응? 이 시간에 윌이 웬일이래?”
집사 윌.
유토피아에서조차 집사 일을 해주는 윌, 그는 오늘 하루 휴가를 나간 참이었다.
1년 만에 딱 한 번 있는 휴가.
가족들과 몰디브로 가 모히또를 실컷 즐기도록 해주었는데.
휴가 갔으면 놀기나 할 것이지 왜 전화를…?
혹시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건가. 사고라도?
불안한 마음에 로버트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어, 윌. 뭔 일이야?”
“헥. 로 로버트 님, 그거 보셨어요? 그 그거요!”
로버트는 와플에 생크림을 듬뿍 찍어서 입에 넣으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뭔 소리야. 숨소리밖에 안 들린다. 천천히 말해봐.”
“아니. 그 그거 안 봤냐구요. 저도 지금 막 들었지 뭐에요. 어젯밤에 늦게 술을 제대로 하는 바람에. 이제서야 들었어요.”
“아니 뭘 들었길래 그러는 건데. 속 시원히 얘기를 좀 해봐.”
로버트는 답답한 마음에 목소리를 높였고, 윌의 새된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그 글쎄. 호준 님이 이주영도 이기고 지금, 랭킹 10위권 안에 들어갔대요. 저도 지금 몰디브 시차 때문에 늦게 들었지 뭡니까.”
“뭐, 10위? 10위가 맞아? 랭킹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다지만. 생산직이 무슨 10위안에 들어가?”
“그러니까요. 저도 말이 안 돼서 몇 번이나 봤는데. 확실하다지 뭡니까. 이주영 님하고 대결한 것도 그대로 생중계됐다고 하니까 한번 방송 보세요! 저는 지금 인터넷이 느려서 접속이 안 되….”
“알았어. 지금 당장 보지.”
로버트는 윌의 전화를 끊고 바로 즐겨찾기 버튼을 눌렀다.
호준의 방송 사이트에 들어가자 이미 동시접속자수가 70만 명에 육박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인터넷 속도가 괜찮으려나.”
맨해튼 도심이지만 이곳은 외진 곳이라 인터넷 속도가 불안 불안했다.
특히 동시접속자수가 많으면 더더욱 끊기는 일이 잦으니….
“어 너, 어디가? 와플 가져가야지!!”
뒤에서 찰스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로버트는 손을 흔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은 와플보다 더 급한 것이 있었다.
“이따가 다시 올게. 와플은 보관해둬!”
“자식, 시간 지나면 맛이 없을 텐데. 뭐 급한 일이라도 있었나?”
찰스는 온장고에 완성되는 와플을 차곡차곡 넣으며 로버트가 오기를 기다렸다.
“뭐가 급해서 부족할 것 없는 녀석이 그렇게 달려간대?”
로버트가 헐레벌떡 달려간 이유를 궁금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