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를 너무 잘함-197화 (197/200)

197. 한판 뜹시다

산적을 제압하는 과정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오합지졸을 처리하는 것은 염력으로 칼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충분했으니까.

휘잉― 퍽

“으윽…!”

“크윽…! 네 이…커억!”

호준의 손끝이 움직일 때마다 리더의 입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죽지 않도록 칼 손잡이로 내리찍기를 여러 번 하자, 마침내 리더가 쓰러졌고.

“저 저희가 몰라뵈었습니다!”

“산에서 풀만 먹고 살았더니 뇌가 어떻게 됐나 봅니다! 죄 죄송합니다. 어르신!”

나머지 녀석들도 순순히 무릎을 꿇었다.

호준이 그들에게 말한 것은 하나였다.

“가장 가까운 마을로 안내해.”

그들을 데리고 근처 마을로 내려가자, 마을 사람들이 홍해 갈라지듯 갈라졌다.

경계가 가득한 눈빛이 쏟아져서 볼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아이구. 처, 처음 뵙습니다. 저희 베이커 마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굽신거리며 달려온 촌장에게 호준은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그의 태도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조금 경계하던 시선에서 우호적인 모드로 바뀐 것.

“이 산적 녀석을 잡아주셨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도시로 보내서 재판을 받게 해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에잇. 젠장!”

그렇게 산적을 촌장에게 넘기고서, 그의 안내로 잡화점에 도착했다.

잡화점은 3층짜리 나무로 만든 건물로 제법 번듯하게 잘 차려져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풋풋한 풀 냄새가 제일 먼저 느껴졌다.

“어서 오세요! 무엇이 필요하신가요. 손님?”

창문 먼지를 털던 꼬마 아이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물었다.

선반 위에 가지런히 올라가 있는 물건들.

정리가 잘 되어있는 가게였다.

호준은 내부를 쓱 둘러본 뒤 말했다.

“씨앗을 살 생각이니 가지고 있는 것은 다 가져와 볼래?”

“앗!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다 가져와 보라는 주문에 소년의 눈이 반짝였다.

어리게 보여도 장사꾼 기질은 숨길 수 없는 모양이다.

호준은 참새처럼 날렵하게 이곳저곳을 누비는 소년을 바라보다가 구석에 비치된 의자에 앉았다.

풀썩― 풀썩―

소년은 씨앗 주머니를 차곡차곡 쌓았고.

호준은 그중 마음에 드는 씨앗을 전부 체크했다.

소년은 호준이 호명하는 것을 하나하나 주문서에 적은 뒤, 마지막으로 가격을 확인했다.

“로즈마리 씨앗 10개, 라벤더 씨앗 10개, 페퍼민트 씨앗 5개, 민트 씨앗 3개, 깻잎 씨앗 5개, 상추 씨앗 2개, 쑥갓 씨앗 3개, 숙주 씨앗 5개까지. 총 4,300골드입니다! 많이 사주셨으니 4,000골드만 받겠습니다!”

“여기 4,500골드다. 나머지는 과자 사 먹어라. 다음에도 들를 테니 특이한 씨앗 있으면 가져다 놓도록.”

“앗. 가 감사합니다. 형님 복 받으실 거예요!”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네.’

호준은 수확이 마음에 쏙 들었다.

로즈마리나 라벤더 등 허브류는 요리뿐만 아니라 목욕탕에서도 요긴하게 쓰일 듯했다.

로즈마리 탕, 라벤더 탕 같이 허브 탕으로 운영해도 괜찮지 않은가.

특히 로즈마리 향을 좋아하는 그로서는, 로즈마리를 얻은 것이 꽤 기분이 좋았다.

‘깻잎이랑 상추, 쑥갓은 쌈으로 먹기에 좋지. 샤브샤브 쌈으로 딱이겠어.’

그리고 깻잎, 상추, 쑥갓 같은 쌈 채소는 샤브샤브와 궁합이 좋았고.

고기류 요리에는 대부분 쌈 채소를 곁들일 수 있으니 활용도도 높았다.

“감사합니다. 손님! 또 오세요!”

“그래~.”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하는 소년에게 손을 흔들고, 호준은 가게 문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낡은 문손잡이를 잡고 오른쪽으로 돌리는 순간.

“어…?”

그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허공을 응시했다.

‘이런….’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당신은 랭킹전 입장 인원으로 선발되었습니다】

【랭킹전, 참가자 1만 명과 실력을 겨룰 수 있는 기회입니다!】

【랭킹전 참가 여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불참으로 인한 어떠한 페널티도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참가자는 랭킹전에서 사망하더라도 사망 페널티가 없습니다.】

【참가자 유의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

‘……흐음.’

주룩주룩 쏟아지는 안내 문구를 읽어 나가며 호준은 들뜬 가슴을 가라앉혔다.

플레이어 6억 명.

동시 접속자 수 최대 4억 명까지 찍은 만큼, 랭킹전 입장 기회는 흔치 않았다.

하루에 1만 명으로 입장 인원은 고정되어 있었으니까.

‘1만 명에 들었다 이 말이지.’

그래서 별 기대도 안 했건만.

오늘은 운이 좋은 모양이었다.

불참으로 인한 페널티가 없는 이상, 참가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 호준 님, 왜 프리징임?

└ 렉 걸리심?

└ 멈췄다.

└ 아냐. 웃고 있어. 입꼬리가 올라감!

시청자들은 가만히 실실 웃는 호준을 보며 왈가왈부 중이었다.

호준은 카메라를 향해 씩 웃으며 그들의 불안을 잠재웠다.

“여러분, 지금부터는 랭킹전 생중계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럼 바로 접속하겠습니다.”

갑자기 랭킹전 입장을 선언하는 호준 덕분에, 시청자들은 깜짝 놀란 분위기였다.

그럴 수밖에.

지금까지 인어, 유령과 식사도 하고 씨앗쇼핑을 하는 순한 맛 방송이었다면

앞으로는 한 명이 나가떨어질 때까지 싸우는 매운맛 방송이 될 테니까.

채팅창은 빠르게 새로운 글이 쏟아졌다.

└ 네에엥???

└ ㅎㄷㄷ. 랭킹전 당첨되심!! 역시 운빨 지리네.

└ 1명 가려질 때까지 박 터지게 싸우는 거라며! 졸잼이겠다 ㅋㅋㅋㅋㅋ

└ 가즈아아! 갓호준!!

└ 요정들 데리고 가면 더 좋을 텐데, 하필 여기서. 아쉽아쉽!

└ 킹직히 호준 님이 다 발라버릴 듯 ㅋㅋㅋ

“그럼 갑니다~”

호준은 카메라를 향해 싱긋 웃고는 참가 버튼을 눌렀다.

【바로 무대로 이동합니다!】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하얀색 방에서 도착해 있었다.

호준은 공중에 뜬 검은색 글씨를 응시했다.

【자동 매칭된 상대와 전투가 시작됩니다!】

【참가자 한 명이 죽을 때까지 전투는 최대 3시간 동안 지속됨을 알려드립니다】

꼴깍.

호준은 침을 삼키고는 무릎을 살짝 굽히고 자세를 잡았다.

‘누구지.’

상대는 저 앞에 서 있었다.

호준은 칼을 고쳐 쥐고 앞을 응시했다.

“검사 새끼구만.”

앙칼진 목소리가 가림막을 넘어 들려왔다.

투명한 가림막 너머에는 불처럼 빨간 머리를 늘어뜨린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뭐가 그렇게 아니꼬운지 입술이 비틀려 있었다.

원래 표정인지 아닌지 알 길은 없었다.

어쨌든 딱히 호감 가는 표정은 아니었다.

“하늘에 계신 불의 신이시여….”

여자는 허공에 진을 그리며 마법진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마법사인가.’

그녀가 진을 외우며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 눈빛을 받은 호준은 화도 나지 않고, 오히려 차분했다.

그는 안도하고 있었다.

불 마법사라니. 너무 좋은데?

└ 뭐야. 불 마법사? 누구지… 음. 못 본 거 같은데.

└ 누구든 뭔 상관임. 저분 호준 님 모르는 듯 ㅋㅋㅋㅋㅋ

시청자들도 호준의 랭킹전 생중계를 보며 한껏 들떠 있었다.

자고로 불구경, 싸움 구경이 재미있다고 하지 않던가.

지금은 불과 싸움 구경을 동시에 할 기회였다.

한두 다리 건너면 아는 사람이 나온다고 했던가.

채팅창에서 이미 그녀의 정체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 아아. 저 중국 유학 중인데 저분 암. 꽤 유명한 화염 마법사임! 리체나였나. 이름이 그랬던 거 같은데. 간부 외동딸이라서 아무도 함부로 못 건든다는 소문이 돌음.

└ ㅋㅋㅋㅋㅋ 어쨌거나 캐불쌍하네. 호준 님 불내성 있는 것도 모르고 열심히 불 마법 준비 중 ㅋㅋㅋ

└ 왜 노력하는 맛은 있어야죠 ㅋㅋㅋㅋ

└ 말도 싸가지없게 하는데 칼맛 좀 보여주시죠!!

‘한 번에 끝내버리자.’

호준은 내용을 대강 체크하고는 칼을 제대로 고쳐 쥐었다.

【랭킹전에 참가한 호준 님과 리체나 님에게 알립니다】

【체력이 0이 되는 순간까지 전투는 지속됩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승리한 자는 다른 매칭 상대와 전투가 계속됩니다!】

【패배한 자는 랭킹전에서 자동 퇴장합니다!】

【전투가 시작됩니다!】

【앞으로 3초 뒤 가림막이 제거됨을 알려드립니다!】

【3】

【2】

【1】

파밧!

가림막이 제거된 순간.

호준은 날듯이 허공으로 박차고 올랐다.

그는 마치 발사한 대포알처럼 포물선으로 날아갔다.

“어어. 뭐 뭐야!”

불 마법을 준비 중이던 리체나는 너무나 빠른 호준의 속도에 당황해서 말을 얼버무리더니.

“데스 파이어!!!!”

급한 대로 더블 캐스팅에 들어갔다.

운석 소환은 그대로 두고, 급하게 만든 불로 호준을 묶어두려는 셈.

그러나 호준은 그 불을 그대로 맞고도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리체나의 동공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고.

그녀는 이미 피할 수 없었다.

푸욱―

“끼아아악!”

정수리부터 시작해 자신을 반으로 가르는 칼날을.

그녀는 비틀린 입술이 경직된 채로 바닥에 철퍼덕 엎어졌다.

└ 키야. 역시 승리!

└ 멋지다!

└ 그냥 진짜 멋지다.

└ 눈 깜짝할 새 승리. 역시 클래스 오지고요!

└ 지리네. 저 아이스크림 가지러 갔다 온 사이에 끝남. ㅠㅠ

└ 너무 빨라서… 이건 슬로우로 봐야겠는데요?

시청자들은 승리에 들떠 있는 것을 넘어서 축제 분위기였다.

최근 들어 계속 늘었던 실력에 비해 전투를 별로 한 적 없어서 이런 분위기인 듯했다.

“다 여러분이 응원해주신 덕분입니다.”

호준은 손을 흔들며 감사 인사도 하고, 칼을 칼집에 챙겨 넣었다.

고개를 들자 승리의 메시지가 그를 반겼다.

호준은 개운한 얼굴로 메시지를 살폈다.

【첫 승리를 축하합니다!】

【당신은 불과 2.5초 만에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랭킹전 최단기록을 달성했습니다!】

2.5초밖에 안 되었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지만.

그 아래 나오는 메시지는 더 마음에 들었다.

【다음 전투 상대를 찾는 중입니다!】

【SEARCHING】

【1%】

【……】

【30%】

【……】

【100%】

【SEARCHING 완료!】

└ 【미르미르】: 이제 또 싸우러 가심.

└ 【별이바라기】: 이번에는 좀 느긋하게 싸우시져.

└ 【랭킹전꿈나무1323호】: 랭킹 1위 가즈아아!

└ 【놀라요짜요짜요】: 한국인의 위상을 드높이는 겁니다요!

└ 【츄츄미르합체】: 요정왕 신도들 모여라!!

시청자들은 오랜만에 본 전투 덕분에 한껏 들떠 있었다.

흥분한 시청자들 못지않게 호준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오랜만이네. 이렇게 달려본 것도.’

그동안 몸이 편했기 때문에 전투를 본격적으로 한 적이 별로 없었다.

한동안 요리에만 몰두했다면 지금은, 오랜만에 달리기로 감을 익히기 시작한 기분이랄까.

아직 시작도 제대로 안 한 축에 속했다.

‘할 수 있는 만큼 해보자.’

쉽게 오지 않는 랭킹전 입장권이니, 그 기회를 써먹을 대로 써먹는 것이 순리 아니겠는가.

호준은 아직 에너지가 충분했다.

2.5초 뛴 것만으로는 해소되지 않을 만큼.

띠링―

호준은 알람이 울리자 고개를 들었다.

반가운 메시지가 그를 반겼다.

씩 웃으며 호준은 손목을 뚝뚝 꺾고 목을 스트레칭했다.

【3초 뒤, 다음 상대와 자동 매칭됩니다!】

【3】

【2】

【1】

【이동합니다!】

번쩍이는 메시지와 함께 그는 또 다른 전쟁으로 이동했다.

서걱―

퍽―

서걱―

【2번 연속 승리했습니다!】

【3번 연속 승리했습니다!】

【4번 연속 승리했습니다!】

【………】

【10번 연속 승리했습니다!】

연승에 연승을 이어나갈 무렵.

호준은 뜻밖의 이와 마주했다.

“길드 마스터님이 여기는 왜.”

“저도 참가자로 선택되어서요. 호준 님과 처음으로 겨룰 수 있는 기회군요!”

에이스 길드 마스터, 이주영이 씩 웃으며 생글생글 미소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