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초대
똑 똑―
천장에 고인 물방울이 이마 위로 뚝뚝 떨어졌다.
또로록 물방울이 이마를 타고 내려와 입술에 닿았다.
으음.
고개를 저으니 물방울이 턱을 따라 흘러갔다.
“하암.”
목욕탕에 허리까지 몸을 담그고 느긋하게 누워있던 호준은 기지개를 쭉 켰다.
하품으로 벌어진 입이 착 다물어졌다.
참으로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가끔은 쉬는 것도 좋지.’
매일 이곳저곳 바쁘게 돌아다녔으니 하루쯤은 쉬어도 되지 않나.
오늘은 왠지 느긋하게 쉬고 싶었다.
밖에 호숫가에서 뛰노는 요정들과 동물들처럼.
베티와 샤롯은 아랫마을로 쇼핑을 간다고 나서서 가게는 더욱 한산했다.
꾸꾸―
새로 가족이 된 알크메네 새끼가 목욕탕 위를 둥실둥실 떠다녔다.
녀석의 이름은 찹쌀이라고 지었다.
“꿍―”
호준은 부풀어 오른 하얀 뱃살을 콕 찌르며 말을 붙였다.
“찹쌀아. 안 더워?”
“꾸웅―”
【찹쌀이가 따뜻하니 참 좋다고 말합니다】
【찹쌀이는 더운 것을 좋아합니다】
“뭐 네가 좋다면야. 마음껏 놀아라.”
“꾸!”
호준은 녀석의 배를 손가락으로 튕겨주었다.
“꾸우~”
찹쌀이는 물 위를 빙글빙글 돌며 멀어져갔다.
찹쌀이가 두둥실 떠가는 걸 멍하니 바라보며 호준은 목까지 물에 담갔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쏴아아―
구석에 놓인 휴식용 의자에 철푸덕 누워버린 그는 눈을 감았다.
아무리 놀기로 마음먹었어도 그는 완전히 놀고먹을 생각은 아니었다.
‘목욕탕 오픈일인데 암.’
오늘은 고대하던 목욕탕 개장일이 아니던가.
고민 끝에 결정한 오늘의 일정은 간단했다.
‘5시간 정도만 놀고. 나머지 시간에는 요리하고 장사해야지.’
일명 적당히 놀고, 적당히 장사하기.
휴식시간에는 낮잠도 늘씬 잘 생각이었다.
기껏 유토피아까지와서 잠을 자냐고 누가 뭐라 할 수도 있지만, 경험자 입장에서는 또 달랐다.
‘여기에서 자는 잠은 이상하게 깊이 잘 수 있단 말야.’
이상하게 유토피아에서의 수면은 잠의 효율이 좋다고 느껴졌다.
아주 푹 자서 피로가 풀린 기분이랄까.
그래서 계속 낮잠을 자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시간 난 김에 푹 자야지.’
호준은 밀려오는 수마를 거부하지 않았다.
의자에 몸을 푹 파묻은 채 잠에 빠져들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흐려지려는 찰나.
쉬이잉―
난데없이 거센 돌풍이 불어닥쳤다.
돌풍은 물보라를 일으켰고 누워있던 호준은 그 물보라를 그대로 들이맞았다.
“뭐야…!”
벌떡 일어난 호준은 재빨리 돌풍이 일어난 곳을 살폈다.
돌풍의 발원지는 바로 목욕탕 한가운데.
목욕탕 속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바람이 쉴 새 없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공사가 잘못된 건가? 부서졌다거나?’
내부 장치가 부서지기라도 한 것일까.
불안한 마음에 다가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던 그때.
풍덩―
바람구멍에서 인어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여자 인어가 등장하자 돌풍이 차츰 가라앉아 사라졌다.
‘저 여자 때문인가.’
불과 20초도 안 되는 돌풍.
그로 인해 탕 속의 물이 고갈되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돌풍에서 튀어나온 여자 인어에게 호준의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아… 호준 님. 이를 어째….”
여자 인어는 지느러미를 살랑거리며 다가왔다.
염치는 있는지 눈빛과 몸짓에는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호준은 젖은 머리카락을 이마 뒤로 넘기며 여자 인어가 무어라 말하는지 들어보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인어족 중에는 제가 가장 마법을 잘하는 편인데 이동 마법을 하다 보면 가끔 이런 돌풍이 일어나서요. 목욕탕을 어지럽힌 데다 물까지 뒤집어쓰게 해서 너무너무 죄송합니다.”
여자 인어는 연신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놔두면 계속 사과를 할 것 같아서 호준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뭐. 물이야 다시 퍼오면 그만이니 괜찮습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가 머나먼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는 하나였다.
“호준 님, 잠깐 인어족이 있는 곳으로 와 주실 수 있나요! 라텔 님께서 호준 님에게 감사의 의미로 만찬에 초대하셨습니다. 지난번 식사를 너무 잘 대접해주셔서 저희도 그냥 못 넘어가겠다 그런 이야기도 하셨어요.”
그녀는 장담했다.
그녀 자신이 호준을 인어족이 사는 마을까지 이동시키겠다고.
말을 끝마친 인어는 호준의 대답을 기다렸다.
동글동글 눈을 굴리는 인어를 바라보며 호준은 생각에 잠겼다.
‘만찬이라.’
추후에 인어족과 교류하겠다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바로 교류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뭐. 어쨌든.
인어족이 만드는 음식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는 궁금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식재료를 얻을지도.’
때마침 여자 인어가 사족을 덧붙였다.
“특산품도 구경하러 오셔요! 그동안 오래 버려져 있던 곳이라 야생식물들이 아주 많이 자랐습니다. 특히… 버섯산호가 아주 일품이죠.”
“버섯산호?”
“네. 산호에서 버섯이 매일 10개 이상씩 자라나는 거예요. 산호 가지를 꺾어서 토지에 꽂으면 잘 자란답니다. 호준 님도 가져다 기르시면 좋을 것 같아요.”
“버섯은 이쪽에도 없는데. 괜찮겠군요.”
버섯 하니 버섯 샤브샤브가 생각이 났다.
요새 버섯 샤브샤브가 입맛에 아주 잘 맞았는데.
오늘은 샤브샤브나 먹어볼까.
“아. 그리고 약탈금지 구역도 있는데, 호준 님은 얼마든지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인어족의 영웅이시니까요!”
“그래서. 지금 가면 되는 겁니까?”
호준이 가까이 다가서며 묻자 인어는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그럼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그렇게 호준은 낮잠 대신 샤브샤브를 택했다.
* * *
“정말 감사해요!”
“별말씀을.”
여자 인어가 만든 포탈을 통해 도착한 곳은 인어와 인간이 공존하는 마을.
“리틀 머메이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리틀 머메이드였다.
지도를 통해 살펴보니 이 마을은 해안가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상주하는 게임 캐릭터 숫자는 3명.
상점 숫자도 고작 2개였다.
잡화점과 여관이 전부.
“왜 이렇게 사람이 없는 겁니까?”
“아, 그건 인어족이 뿔뿔이 흩어진 뒤로 마을이 사양길로 접어들어서래요. 원래 인어족이 갖다 주는 해산물로 마을 사람들이 먹고살았는데, 인어가 사라지니 사람들도 다 빠져나간 거죠.”
“아아. 그럼 인어들이 돌아왔으니 사람들도 차츰 늘어나겠군요.”
“네. 그럴 거 같아요. 호준 님 덕분인지 소문이 좀 난 거 같거든요.”
그녀와 이야기를 하는 사이 어느새 바닷가에 도착했다.
눈부신 백사장.
에메랄드빛 파도가 인상적이었다.
컴퓨터 배경화면에 나올 법한 광경이랄까.
“일단 버섯산호부터 보러 갈까요.”
“그럽시다.”
호준이 인어의 뒤를 따라 터벅터벅 걷던 그때.
별안간 파도 속에서 하얀 인어가 튀어나왔다.
‘…?’
은빛 비늘이 햇빛을 받아 환하게 빛났다.
눈을 가늘게 뜨고 빤히 들여다보니,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호준 님, 오셨군요!”
라텔은 하얗게 탈색된 비늘을 푸르르 떨면서 걸어왔다.
지느러미로 걸어오는 자태는 우아한 워킹을 보는 듯했다.
이전과는 비늘 색깔이 확연히 다른지라 시선이 갔다.
“비늘 염색하셨나 봐요.”
호준의 물음에 라텔이 까르르 웃으며 허리를 접었다.
“염색. 크큭. 저도 하고 싶은데. 바닷물을 버텨내는 염색약이 없더라구요. 사실 정식으로 왕에 오르면서 비늘 색이 바뀌었어요. 어떤가요? 이전이 나으려나?”
“이전보다 더 화려하네요.”
“칭찬 감사합니다. 그보다 호준 님께 꼭 얘기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연락드렸어요.”
라텔은 안내를 한 여자 인어에게 고맙다는 듯 눈짓하고는, 호준의 손을 잡고 바다로 들어갔다.
철렁―
물속으로 들어가자 호준은 볼 수 있었다.
에메랄드빛 파도를 헤집고 다니는 수많은 열대어들.
저 아래 회색 바위 근처에 옹기종기 모인 산호들.
발밑을 간지럽히는 이름 모를 작은 물고기들까지.
‘끝내주네.’
기존에 가봤던 바다와는 개체수가 확연히 차이가 났다.
그때의 밀집도가 10 정도였다면 여기는 100 정도랄까.
물속에 물고기가 너무 많아서 몸 이곳저곳에 부딪힐 지경이었다.
두리번거리던 호준은 옆에 있던 라텔과 눈이 딱 마주쳤다.
지그시 바라보는 그 눈빛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물고기가 끝내주게 많죠. 여기는 아주 외딴 섬이라서 인적이 드뭅니다. 포획도 적은 편이지만, 본래 인어들의 주식인 물고기가 넘쳐나는 곳이랍니다.”
“인어는 물고기를 그냥 생으로 먹습니까?”
호준의 물음에 라텔이 싱긋 미소짓고는 고개를 저었다.
“인어도 인어 나름이에요. 다들 취향이 있죠. 꼬치구이를 좋아하는 인어도 있고, 회에 초장을 찍어 먹는 걸 좋아하는 인어도 있고. 저는 찜을 해먹는 걸 좋아합니다. 저쪽으로 가면 더 볼 게 많아요!”
호준은 그녀가 헤엄쳐 가는 대로 몸을 맡겼다.
사실 주변 구경을 하기에도 바빴다.
눈앞에 수천 마리 열대어가 바글바글.
푸른색, 청록색, 보라색, 연다홍색, 형광분홍색, 초록색, 흰색.
색색의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오길 잘했네.’
물고기 구경에 한창 빠져있을 무렵.
라텔이 무언가로 옆구리를 꾹 찔렀다.
호준은 허리를 흔들며 허리춤을 살펴보았다.
어라….
허리춤에는 놀랍게도 성인 머리 크기만 한 거대한 표고버섯이 있었다.
“이게… 그 산호 버섯입니까?”
“네. 맞아요! 산호 버섯은 개체마다 자라는 버섯 종류가 조금씩 다르거든요? 산호 버섯 줄기는 어디에나 심어도 잘 자라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가져가세요!”
“아무리 그래도 그냥 가져가도 됩니까?”
호준이 조심스레 묻자 라텔은 씩 웃으며 호준을 세게 잡아당겼다.
포르르르―
거품을 일으키며 호준은 라텔의 옆구리에 밀착되었다.
“저기 한번 보세요.”
라텔의 손끗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 호준은 입을 크게 벌렸다.
‘……!’
눈앞에 광경을 보니, 왜 그녀가 얼마든지 가져가라고 했는지 알만했다.
‘수만, 아니 수십만 개는 되겠는데.’
저 아래쪽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흙바닥 아래에 수십만 개의 산호가 가득했다.
금색 버섯, 하얀색 팽이버섯, 하트모양 버섯 등.
가지각색의 버섯들이 즐비했다.
저걸 다 넣고 버섯 샤브샤브를 해 먹으면 무슨 맛이려나.
‘육수가 듬뿍 배인 샤브샤브라… 괜찮겠는데.’
샤브샤브를 좋아하는 그로서는 마다할 일이 전혀 없었다.
라텔이 마치 꽃을 건네듯 버섯산호를 건네며 말을 이어갔다.
“저도 여러 번 먹어봤지만, 제대로 조리하면 맛이 끝내줄 거 같아요. 저희는 주로 꼬챙이에 끼워서 구워 먹는데 그렇게 먹어도 맛이 끝내주거든요. 제대로 된 요리사만 있다면. 호준 님처럼 실력 있는 분이 요리하면 그 맛이 훨씬 끝내주겠죠. 안 그런가요?”
라텔의 물음에 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동감했다.
맛 좋은 재료를 그냥 썩히기보다는 더 맛있게 만드는 것.
그것이 요리사가 할 일 아닌가라고.
지금은 물고기 구경을 할 때가 아니었다.
“버섯 다 가지고 오세요.”
“네?”
라텔의 물음에 호준은 손가락을 흔들며 답했다.
“그동안 못 먹어본 버섯 요리, 만들어드릴테니까.”
* * *
보글보글.
폭폭.
시원한 멸치육수가 만들어지는 동안.
차각차각.
버섯과 각종 야채를 다듬어서 육수에 넣고 푹 익힌다.
그다음은.
소고기를 먹기좋게 얇게 포를 떠 놓으면 준비 완료.
샤브샤브의 생명은 육수였다.
버섯을 씹을 때, 소고기를 씹을 때 나오는.
입맛에 착 감기는 국물.
그 국물 맛으로 모든 것이 결정이 났다.
이 샤브샤브 집이 다시 와도 될 집인지, 아니면 한 번 오고 말 집인지.
호준이 육수를 만들기 위해 취한 방법은 하나였다.
‘최대한 신선한 야채를 많이 넣는다.’
가지고 있는 상급 야채들을 많이 집어넣을 것.
다행히 버섯산호에서 자라는 버섯의 종류만 자그마치 10만 가지가 넘었다.
그중에서 인어들이 가져온 가짓수는 100여 가지.
호준은 각 버섯들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냄비에 넣었다.
야채도, 양념도 다 마무리했으니.
이제는 최종적으로 다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호준이 모든 컨트롤을 하고 있었기에 인어들은 얌전히 냄비 앞에 앉아서 그의 지시가 있기를 기다렸다.
한 인어가 언제 먹을 수 있냐고 묻자 호준이 답했다.
“소고기는 제가 넣으라고 할 때 넣어서 먹으면 됩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넵 호준 님!”
대답을 하고 숟가락을 내려놓은 인어에게 옆자리 인어가 질문했다.
“근데 이게 뭐라고?”
“샤부샤부래. 이름도 고급지다.”
“샤부샤부가 아니라 샤브샤브야. 호준 님이 가져온 신상 요리래!”
“흐음. 뭔가 냄새가 좋은데. 기대된다.”
“밥 비벼 먹어도 맛있을 것 같아.”
소곤소곤 들려오는 이야기 소리를 뒤로한 채.
호준은 메시지가 뜨기만을 기다렸다.
한 10초쯤 지났을까.
【완벽한 샤브샤브 육수가 완성되었습니다】
【구하기 힘든 진귀한 식재료가 들어가 요리 등급이 대폭 상승합니다】
【버섯을 50가지 이상 넣는 당신의 정성에, 요리 등급이 대폭 상승합니다!】
【재료 간 궁합이 완벽합니다】
【요리의 최종 등급이 재조정됩니다!】
…….
‘재조정?’
호준은 차분히 다음 메시지를 기다렸다.
연달아 【조정중】 이라는 메시지가 올라오더니.
최종 메시지가 떴다.
【버섯 샤브샤브(특1등급)을 달성했습니다!】
【놀라운 성과입니다. 축하드립니다!】
……
‘특1등급이라고…?’
한 번도 받은 적 없던.
놀라운 수치에 잠시 할 말을 잃고 있던 그때.
같이 만들고 있던 수많은 요리들이 연달아 완성되었다.
【버섯 샤브샤브(특1등급)을 달성했습니다!】
【버섯 샤브샤브(특1등급)을 달성했습니다!】
【버섯 샤브샤브(특1등급)을 달성했습니다!】
메시지가 비 오듯 쏟아졌다.
한참 지나고 난 뒤.
맨 마지막에 놓여있는 메시지는 하나였다.
【새로운 타이틀 획득】
【특1등급 요리를 미친 듯이 만든 당신에게는 요리의 신이라는 타이틀이 적합합니다】
【앞으로 당신이 만드는 요리는, 무조건 특급이 부여됩니다】
과연.
요리의 신이 되고도 남을만한 타이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