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스케일이 달라.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면으로 화제가 되는 일은 쉽지 않다.
대중은 긍정보다는 부정에.
모범이 되기보다는 자극적이며 막장스러운 소재를 선호하기 마련이니까.
―최근에 결혼했다던 A가 실제로는 사실혼 관계인 사람이 있대.
―어제 라디오ㅇㅇ에 나왔던 걔, 원래는 학교 일진이었다는데? 피해자가 글 올리고 난리 남.
―마약 복용 혐의로 검거된 연예인 C씨와 유명 정치인이자 대통령 후보자인 B씨가 내연 관계….
찌라시에 눈이 가고 귀가 열리는.
눈살 찌푸려지는 뉴스가 범람하는 와중에도.
호준의 존재는 단연 돋보였다.
그는 한국인 최초로 유토피아 방송 구독자수 300만을 최단기간에 달성.
그와 그의 요정들은 어느새 압도적인 인지도와 인기로 이름을 날리는 스타가 되었다.
‘역시 내 감은 틀리지 않았어.’
호준의 컨설팅과 이미지 전담을 맡은 이미주 PD.
호준의 존재는,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간 이유이기도 했다.
이미주는 식어 빠진 커피를 원샷하며 입을 달싹였다.
텁텁한 맛에 인상을 찌푸리는 것도 잠시.
곧 그녀는 현재 중계 중인 방송 화면을 왼쪽으로 치워두고 뉴스탭을 켰다.
호준이 하늘국으로 간 이후, 그가 우승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방송에 나간 이후.
뉴스탭에는 이미 그에 관한 뉴스가 범람했다.
【갓호준, 하늘국 대표 요리사로 등극!】
【갓호준의 파죽지세에 기죽은 용족들 (사진 첨부)】
【호준, 그에게 불가능이란 없다! 당당히 우승 차지!】
【우승을 기대하던 용족들, 닭 쫓던 개 신세 되다】
대회 우승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는, 이미 만천하에 알려졌다.
이번 요리 콘테스트는 하늘국을 대표하는 공식 행사이자, 카이사르 왕이 신에게 이름을 걸고 보상을 주는 유일한 행사였다.
왕실의 비보를 가질 수 있는 기회이기에, 수많은 이들이 도전하는 대회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방송을 본 이들은 호준이 겨우 무대 위의 99명과 겨루었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었다.
‘수천 명의 용족들 중에서 고르고 고른 인재들, 그들이 무대에 오르니까.’
호준의 우승은 결국 내로라하는 용족들을 모두 제친 것이었다.
그들을 제치고 당당히 1위를 차지.
하늘국 널리 이름을 알리는 데는 이만한 방법도 없었으리라.
카이사르 왕의 인장이 찍힌 서문에도 요정의 쉼터라는 문구가 들어갔다.
‘가게가 미어터지겠군.’
앞으로 가게 앞에는 새로운 종족, 용족들이 줄 설 가능성이 농후한 대목이었다.
시중에서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단순히 우승만이 아니었다.
그가 새로 얻은 보상에 대한 관심도 쏟아졌다.
【호준, 그가 선택한 상자의 가치는?】
【상자에 대한 수많은 추측 이어져】
【현재로서는 상자에 대한 확실한 정보 無】
【가장 확실한 정보는 소유자 본인이 잘 알 것】
“흐음… 이게 문제인데.”
이미주는 이미 상자의 내용물이 뭔지 알고 있었다.
호준이 이미 관리자 지위에 있는 이미주에게만, 정보 공개 설정을 해놓았기 때문.
시청자들은 그저 상자 속에 있는 것이 호루라기라는 정도만 알겠지만.
이미주는 이미 그 내용물의 정보를 다 보았다.
‘계륵 같군.’
버리기에는 아깝고 취하자니 쓸 데가 없고.
호루라기들은 인간이 쓸 수 없는 아이템이었고, 요정도 쓸 수 없는 아이템이었다.
그렇다고 단순히 팔거나 경매에 부치기에는 뭔가 찝찝한 느낌도 있었다.
그냥 호루라기가 아니었으니까.
‘특히 기억 조작이 된다는 점이 위험해.’
어느 정도 기억이 조작될지는 지켜봐야 알겠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호루라기를 시중에 내보내기에는 불안한 감이 없지 않았다.
단지 아이템 하나에 불과할지라도, 기억 조작을 통해 어떤 세력구도가 생성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이미주는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호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이미주(관리자)】: 호준 님, 그 호루라기들은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농장에 새로 사온 씨앗을 심고 있던 호준은, 메시지를 보고는 피식 웃으며 허리를 폈다.
그는 메시지를 보자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답신을 보냈다.
└ 【호준】: 좋은 적임자가 있습니다.
└ 【이미주(관리자)】: 그게 누구인가요?
└ 【호준】: 미주 피디님도 이미 아는 분입니다.
└ 【이미주(관리자)】: 제가요?
└ 【호준】: 누군지 한번 맞춰보시죠.
“음… 누구지?”
이미주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툭툭 두드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아는 자라면, 음. 요정들도 무용지물이고. 그렇다면 용족?
설마.
이미주는 키보드를 빨리 타이핑하고는 엔터를 눌렀다.
└ 【이미주(관리자)】: 설마 타무르입니까? 만난 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그에 대한 대가는 뭘로 하실지 생각해보셨어요?
└ 【호준】: 아닙니다. 지금 저기서 낮잠을 자고 있네요.
“낮잠… 아…!”
그제서야 이미주는 호준이 말하던 이를 알아챘다.
푸푸―
작게 숨을 내쉬며 낮잠을 자는 한 여인.
상아색 머리를 늘어트린 채로 잠을 자는 인어족.
청초해보이는 미모와 달리 입은 걸걸한, 라텔이었다.
그녀를 빤히 들여다보던 이미주는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라텔에게 호루라기를 주고, 사용하게 만든다면.
그렇다면 수많은 인어족들이 이 자리에 모이게 될 테고.
십만이 넘는 인어족들이 세뇌당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좋은 각이었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광경.
즉, 최고의 방송각 아닌가.
└ 【이미주(관리자)】: 설마, 여기에서 라이브로 하실 생각은 아니죠?
└ 【호준】: 라이브가 진리다. PD님이 자주 하던 말대로입니다.
└ 【이미주(관리자)】: 허어… 그럼 잠깐만요. 중간광고 준비해놓겠습니다!
└ 【호준】: 저는 라텔과 입을 맞춰두겠습니다.
└ 【이미주(관리자)】: 진짜. 호준님 덕분에 심장 떨려서 못 살겠네요~ 이러다 은퇴자금까지 다 벌 거 같아요 ㅎㅎㅎㅎ 저 얼른 광고 뽑으러 가겠습니다!
이미주는 농담 반 진담 반 섞인 채팅을 마지막으로, 채팅창을 껐다.
슬슬 방송을 마무리하려고 했다가, 갑자기 중간광고를 준비하려니 당연히 분주할 수밖에.
호준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탱탱볼과도 같다지만 이만큼 재미있는 일도 없었다.
수많은 인어족들이 소환되고, 단 한 명에 의해 기억이 조작되는 광경을 생중계한다니.
‘누구도 한 적 없기에 값을 매길 수 없지.’
고요하던 사무실은 키보드의 요란한 소음으로 가득 찼다.
차분하던 그녀의 마음에도 요란한 두근거림으로 가득 찼다.
* * *
호준은 이미주와의 짧은 채팅을 마치고 기지개를 켰다.
이제 새로 얻은 씨앗도 다 심었겠다, 남은 일은 하나였다.
‘라텔이랑 담판을 지어야지.’
라텔. 인어왕이자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왕족으로 추정되는 인어족.
그녀와 동맹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볼 차례였다.
‘동맹이라.’
【동맹은 전쟁 시 서로 한 몸이 되어 싸웁니다】
【인어왕과 동맹을 맺을 경우, 10만여 명의 인어족에게 건설, 서빙, 제조 등의 잡일을 부탁할 수 있습니다!】
【동맹을 맺을 경우 서로 적은 비용만을 받고 일을 도울 수 있습니다!】
메시지 중에 주목할만한 정보는 이 3줄이었다.
동맹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할 수 있다면 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아군은 많으면 많을수록 유리하니까.’
유토피아에서 길드에 가입하는 이유 또한 이 때문이었다.
아군을 늘림으로써 제3자에게 피해를 입는 일을 줄이는 것.
지금도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여유분의 준비를 해두면 나쁠 것은 없었다.
다만, 동맹을 하기에 앞서서 한 가지 확인해야 했다.
라텔이 어떤 성격인지, 어떤 이유로 샤롯의 변장을 했는지.
일전에는 콘테스트 참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진지하게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은 시간도 넉넉하겠다, 따로 시간을 내서 이야기를 나눠볼 참이었다.
“하암. 심심했는데 잘 왔어.”
“잠은 다 잤냐?”
“응. 하늘국을 빠져나갔다고 생각하니까 긴장이 확 풀렸나 봐. 나도 모르게 긴장을 많이 했었나 보네. 노예로 워낙 오래 살아서 그런 걸지도.”
호준은 라텔의 곁에 앉아 그녀의 말을 들었다.
잔잔한 물결이 일렁이는 듯한 목소리로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마지막 왕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원으로, 모든 인어족들은 고통스러운 전쟁의 기억을 잃고 전 대륙으로 이송되었고.
무작위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라텔은 운이 없게도 하늘국에 떨어졌단다.
기억을 되돌리려면 개개인에게 부여된 트리거를 작동하면 되었는데, 우연하게도 호준은 두 번에 걸쳐 그 트리거를 작동시킨 꼴이었다.
“그럼 내 덕에 샤롯도, 너도 기억을 되찾은 거로군.”
“그렇게 된 거지. 샤롯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친구처럼 같이 지낸 시종이었어. 아버지께서는 내가 왕족의 모습이면 금방 잡혀 죽을 거라 생각하셨는지 샤롯의 모습으로 변하게 만드셨지.”
“그랬군. 그러면 앞으로 어쩔 거냐.”
“음… 인어족들이 안심하며 살 수 있는 왕국을 만들 생각이다. 아직… 나밖에는 없지만, 앞으로 인어족들을 찾으러 다닐 생각이야.”
“허무맹랑한 생각이군.”
호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라텔이 입술을 짓씹으며 반박했다.
“…그, 그렇긴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을―”
“아니. 불가능하지. 10만이 넘는 인어족을 혼자 다 찾으러 다닌다고? 네가 그렇게 걸어다니면 네 꼬리비늘은 다 망가져서 넝마가 될걸? 한 10년은 돌아다녀야 다 찾을까 말까 한데.”
“아… 그건….”
라텔은 호준의 지적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적나라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의 말은 한치도 틀리지 않았다.
아무리 세상 물정 모른 채로 노예로 살았다 해도 라텔도 알고 있었다.
유토피아는 지독히도 넓고, 그 넓은 곳에서 인어족 10만을 다 찾기란 지극히 힘든 일이라는 것을.
그렇지만 기억을 잃은 채로 뿔뿔이 흩어져 사는 동족을 외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라텔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 호준이 손을 내밀었다.
“내게 방법이 있다. 너를 도울 방법이.”
“무슨….”
라텔이 눈을 크게 뜬 채로 반문하자 호준이 말을 이어갔다.
그의 설명이 끝나자 라텔은 조용히 생각하는 듯했다.
5분가량 생각을 마친 라텔이 입을 열었다.
“그것들의 대가로 네가 바라는 것은?”
“인어족이 나와 영원한 동맹이 될 것. 내가 세울 요정국의 영원한 우방이 되는 거지.”
“단지 그것뿐인가? 내가 배신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네게 당할 정도로 내가 약해 보이나?”
“아니… 절대로 안 그래 보여.”
라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피식 웃었다.
눈앞에 앉은 남자는 지금까지 용족에게 당했던 수모를 모두 벗어나게 해준 이였다.
단순히 고마운 걸 넘어서서, 앞으로 미래에 두고두고 그 은혜를 갚을 생각이었던 그녀였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부로 생각이 바뀌었다.
“인간은 정말 재미있어. 두뇌회전도 빠르고. 동맹이라….”
동맹.
서로 대등한 입장에서 각자 힘든 일이 있을 때 돕는 관계.
이 자에게는, 은혜를 갚아도 모자란데.
호준은 오히려 동맹이라는 제안을 하며, 아이템을 주고 인어족의 재건을 돕고 있었다.
상대의 진심을 알아보고 신뢰하는 자에게는 신뢰로 보답하는 것이 도리였다.
“결정했나?”
호준의 물음에 라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지느러미를 꼿꼿이 세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하늘 높이 두 손을 뻗고는 외쳤다.
“바다신이여. 응답할지어다.”
그녀가 외치는 순간, 손끝에서 푸른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뭐지?’
호준은 불과 몇 초 만에 토네이도가 생성되는 광경에 입을 크게 벌렸다.
나뭇잎이 사방에서 흩날려 비가 되었고.
머리칼이 정신없이 휘날리며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아수라장의 중심에는 라텔이 홀로 서 있었다.
상아색 머리칼을 휘날리며 그녀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차기 인어왕으로서 바다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노니. 이 자리에 자리한 호준. 그가 요청할 경우, 반드시 요청에 응할 것을 맹세한다. 이 맹세를 어길 경우 바다신의 저주를 받아 다시는 육지의 땅을 밟지 못할 것이니. 바다신이여 이 간절한 맹세를 갸륵히 여기어 이 맹세의 증인이 되어 주리라.”
그녀가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토네이도가 일순간에 사라졌다.
짹짹―
태풍이 지나간 듯 나무들이 가로 방향으로 누운 것만 빼고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라텔은 조금 부산한 머리를 하고 다가왔다.
호준은 그녀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잘 부탁한다.”
“이쪽이야말로.”
그녀의 손을 맞잡는 순간.
호준은 볼 수 있었다.
【인어왕 라텔과 굳건한 동맹을 맺었습니다】
【당신은 인어왕 라텔의 무한한 신뢰를 얻고 있습니다】
【당신은 인어족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인어족 전원에게 당신의 호감도가 +50 올라갔습니다】
【인어족 전원에게 당신의 호감도가 최고치에 달했습니다】
【호감도가 최고치에 달한 경우,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인어족은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
동맹, 그로 인해 얻은 수많은 성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