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를 너무 잘함-185화 (185/200)

185. 전설

쿠쿵 쿵―

축구경기 중에 가장 재미있는 것이 역전극이요.

누구도 예상치 못한 골이, 누구도 예상 못 한 결과가 터져나오면 보는 사람은 재미있기 마련이다.

거대한 알크메네가 사냥당한 순간.

무대를 눈앞에서 본 관람객들과 무대 아래에서 전광판으로 지켜본 용족들은 동요했다.

알크메네의 부속품을 챙기는 호준을 바라보며, 관람객 대다수가 깨달았다.

“아, 요리사를 데려오라고 했더니 누가 사냥꾼을 데려왔어!”

“타무르가 한 건 했구만. 살다살다 저런 기이한 사냥을 볼 줄이야. 인간이 저리 힘이 세다니.”

“저, 저자는 겉만 인간이고 속은 용족 아닌가?”

“허, 겉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인간인데. 대체 주먹이 아다만티움으로 만들어지기라도 했나?”

호준이 보기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그를 인간이라고 무시했던 용족들은 더욱 놀란 듯한 분위기였다.

알크메네 사냥 덕분에 몇몇은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경기가 시작되었음에도 움직이지 않는 호준이 백 퍼센트 질 거라고 말하던 이들이었다.

‘제대로 된 사냥감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니.’

‘가만히 때를 기다리던 거였어. 포기한 게 아니라.’

‘만전에 준비를 할 줄 아는, 꼼꼼하고 세밀한 성격이군.’

그들은 순수하게 호준에게 감탄했다.

정확히는 거대한 대어를 낚기 위해 자잘한 피라미들을 적에게 내어주는 전략에 말이다.

그동안 회의적으로 보았던 남자 용족이 입을 열었다.

“이거, 잘하면 역전할 수도 있겠는데?”

호준이 인간 최초로 콘테스트에서 우승할지도 모른다고.

이는 3,00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이어져 온 콘테스트에서 단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는 이변이었다.

“설마. 그래도 다른 용족들이 계속 사냥 중이니, 끝까지 지켜보세.”

“그러면 정말 놀라운 일이겠네만. 아무리 그래도 아직 시간이 넉넉히 남았지 않나. 설마 그럴려고.”

그러나 아직까지는 경기가 끝나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의견이 더 많았다.

실제로 무대에는 계속해서 몬스터들이 리젠되는 중이었고.

호준의 우승을 언급했던 용족은 피식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긴. 설마, 그런 일이 쉽게 일어나지는 않겠지.”

3천 년 동안 일어나지 않은 일이 오늘 일어날 거라 생각하다니.

자신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며 남자 용족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경기 관람에 집중했다.

“쯧.”

남자 용족의 2층 위에 앉아있는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잔뜩 찡그린 얼굴에는 오만함과 짜증이 동시에 느껴졌다.

대귀족 나타샤. 그녀는 지금 기분이 심히 좋지 않았다.

솔직히 속이 아주 많이 쓰렸다.

‘젠장. 렌리 녀석이 이겨야 하는데. 그놈한테 쏟아부은 돈이 얼마인데.’

지금 호준과 렌리가 펼치는 승부는 박빙이었다.

렌리는 비록 작은 몬스터를 사냥하지만 빠른 사냥속도로 재료를 모았고.

호준은 그에 굴하지 않는 양의 식재료를 모아 빠르게 따라잡고 있었다.

초반부에 렌리가 한참 앞서나가던 터라 안심하고 있었는데 웬걸.

갑자기 호준이 알크메네를 사냥하면서 바짝 따라붙은 격이었다.

렌리의 후원자로서 어마어마한 돈을 투자한 나타샤로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비보만 얻으면 왕이 될 수 있다. 왕족은 싸그리 다 죽여주지.’

그녀는 이번에 렌리가 가져온 비보를 이용해 반역을 시도할 생각이었다.

카이사르 왕과 그 왕족들을 죽이고 본인 스스로 왕에 오르는 것.

카이사르 왕은 스스로 보물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겠지만, 나타샤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문헌을 해석해내 알아냈다.

비보의 감춰진 진짜 힘을.

‘그래. 왕이 되기만 하면, 그깟 손해쯤이야 별거 아니지.’

렌리에게 투자하느라 수도에서 제일 비싼 집 2채를 버렸고, 지금은 외곽에 나와 살고 있다지만.

비보만 가져온다면 모든 손해는 싸그리 잊을 수 있었다.

“후우.”

침착하자. 침착해.

나타샤는 긴 숨을 내쉬며 애써 정신을 가다듬었다.

타각 타각―

무대 중앙에 놓인 시곗바늘이 40분을 가리키자 진행자 용이 나타났다.

진행자 용은 무대에 있는 모두가 들릴 만큼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제 남은 시간은 20분, 20분 안에 모든 요리를 만드십시오! 경기의 즐거움을 위해 요리사의 공간은 가림막을 치도록 하겠습니다. 요리사들의 정신을 집중하게 돕고, 관람객들은 20분 동안 두근두근하는 마음을 부여잡고 기다리고. 일석이조죠! 자, 지금부터 20분 동안 최선을 다해 요리를 만들어주세요! 용족의 보물창고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녀석이 박수를 탁탁 치자 검은 가림막이 쳐졌다.

검은 가림막 덕에 그 누구도 요리사들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관중들은 지인들과, 옆에 있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주요한 주제는 당연히 누가 우승자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많은 이들의 의견은 엇갈렸다.

대강 나타샤가 들어봤을 때는, 호준과 렌리가 막상막하라는 의견이 많았다.

이 둘의 요리 재료가 얼핏 보기에 비슷했다는 의견이 많았다.

3위로 들어간 여자는 전투력이 현저히 떨어져서 우승후보에서 제외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일은.

‘기다리자. 차분히.’

애써 눈을 감았건만.

눈을 감으니 불안한 생각이 엄습했다.

렌리가 나가리가 되면 어쩌지?

결국 2등을 한다면.

2등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물론 렌리 본인은 2등이라는 명예를 얻겠지만 정작 나타샤 본인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노후자금용 저택들도 다 팔아버렸으니, 이대로 생활비나 벌면서 살아가야 하겠지.

나타샤는 입술을 굳게 짓씹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괜찮아. 렌리 녀석이 독종이라서 이 기출문제도 분명 준비했겠지.’

‘그래. 이길 생각만 하자.’

‘괜히 불안해할 필요가 뭐 있겠어?’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고 상상했다.

그래 긍정적인 상상, 최대한 긍정적인 상상을.

카이사르 왕의 유서를 조작해서 왕위를 물려받고.

모두의 앞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인간계에 전쟁을 선포하고 잡다한 나라를 정복하고.

수많은 종족을 노예로 삼아 용족의 위엄을 만천하에 떨치는….

‘그래. 할 수 있어.’

나타샤는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환하게 미소를 그렸다.

그녀의 부드러운 곡선을 띤 눈매는 고민 따위는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렇게 긍정적인 생각을 하던 그녀에게 팡파르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눈을 떴다.

“자, 신사 숙녀 여러분. 차분히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디어 1시간이 다 되었지요. 드디어, 모두가 궁금해하는 요리 결과를 확인할 시간입니다! 두구 두구 두구―”

진행자 용은 허공에 발을 흔들어 북을 치는 듯한 시늉을 했다.

모두가 숨을 죽이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용이 눈을 찡긋하며 웃더니 한쪽 발을 높이 치켜들며 외쳤다.

“자 결과는!”

꼴깍.

나타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베일이 벗겨지고.

그 너머로 얼마나 많은 요리들이 완성되었을지 비교해볼 수 있었다.

렌리가 더 많이 만들었느냐, 아니면 그 빌어먹을 인간 요리사 호준이 더 많이 만들었느냐.

나타샤의 미래가 지금 이 순간에 달려있었다.

잔뜩 뜸을 들이던 용이 남은 발을 들어올리며 소리쳤다.

“저 말고 카이사르 왕께서 막을 거둬주시겠습니다!”

“아오!”

“낚였네.”

“얄미워 진짜!”

“작년처럼 광고 어쩌구 했으면 브레스 쏠 뻔.”

“매년 저러는데 또 걸렸네.”

용족들의 푸념이 이어졌다.

곧 카이사르 왕이 의자에서 일어서자 무대가 다시 조용해졌다.

“공개하도록 하지.”

카이사르 왕은 질질 끌지 않고 바로 장막을 거뒀다.

그가 손을 튕기자 장막이 걷히고.

모두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두 요리사 쪽을 바라보았다.

‘………!’

분주하게 움직인 나타샤의 눈동자는, 곧 한없이 흔들렸다.

마치 정지화면처럼 멈춰있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격이 다르군.”

렌리와는 격이 다른 요리였다.

호준의 요리는.

‘이런 변수가 있을 줄이야.’

그녀의 달콤했던 꿈은 아스라이 사라져버렸다.

나타샤는 쓰린 배를 움켜쥐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 * *

‘………!’

렌리는 스스로의 삶에 부끄러움이 없었다.

지금까지 그는 오직 하나의 목표, 콘테스트 우승만을 위해 달려왔고.

힘든 훈련을 해나가면서도 언젠가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까지 그 믿음에는 한 치의 의심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그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장막이 걷히고.

장막 너머에 숨겨져있던 호준의 요리를 본 순간.

렌리는 마음을 비웠다.

‘상대가 안 되는군.’

호준은 더 많은 요리를 만들었다.

더불어 렌리가 느끼기에도 그 자신의 요리보다 호준의 요리가 더 구색을 잘 갖춘 것으로 보였다.

‘맛있어 보이네.’

접시에 담긴 알크메네의 고기꼬치는 먹음직스러움 그 자체였다.

겉이 알맞게 바삭하게 구워져있고 기름기가 적당했다.

그대로 씹으면 육즙이 배어나오겠지.

부드러운 살코기와 고소한 맛.

양념이 따로 필요 없을 것이다.

‘흠잡을 데 없는 맛에. 거기다 장식까지 했군. 저게 대체 얼마짜리야…!’

그에 더불어 호준은 통큰 장식까지 했다.

접시의 밑에 형형색색의 알크메네 깃털 장식들.

알크메네의 깃털은 알크메네가 죽는 순간 30개의 색깔로 변하는데 이를 두고 용신의 축복이라 불렀다.

용신의 축복을 상징하는 이 깃털은 개당 최대 500골드까지 나가는 비싼 깃털이었다.

그런데 호준의 요리가 담긴 접시, 그 아래에는 깃털이 10개씩 깔려 있었다.

마치 꽃처럼, 형형색색의 깃털이 접시 바로 아래를 장식했던 것.

‘어쩌면 깃털의 가치를 모른 걸지도.’

호준이 저렇게 깃털을 잔뜩 깔아둔 것은, 아마도 아름답게 보이려고 한 것이었겠지.

깃털을 깔아둔 결과.

아름다운 건 기본이요.

호준의 요리는 그 가치가, 수천 골드로 뛰어버렸다.

“자, 요리를 먹은 뒤 각자 맛있었다고 생각하는 쪽에 접시를 갖다 주면 됩니다! 접시가 많이 모인 참가자가 우승입니다! 먼저 먹으신 분은 추가로 먹을 수 있으니 맛있게들 드십시오!”

진행자 용의 진행 아래, 이미 렌리의 예상은 사실로 변하고 있었다.

“이야. 양념을 하지 않아도 이 맛이 나온다니. 대박이네.”

“으음. 살살 녹아. 이 깃털도 너무 이쁘다.”

“용신의 축복을 주는데 투표를 안 할 수가 없네.”

“당연하지. 이 정도 요리를 먹고서 투표 안 하면 영. 양심에 찔려.”

“렌리 요리도 맛있기는 한데. 이쪽 요리가 워낙 훌륭해서.”

렌리는 씁쓸한 마음에 카운터 뒤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수많은 날들,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던가.

몸을 더 빨리 움직이기 위해 매일 아침 달리기 훈련도 빼놓지 않았다.

렌리가 바닥에 의미 없는 그림을 그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던 그때.

“저. 실례합니다.”

누군가 그의 테이블에 찾아왔다.

자신감이 떨어져있던 렌리는 스르륵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호준이 보였다.

이번 대회 우승자가 대체 여기에 왜 온 거지?

렌리가 자리에서 주섬주섬 일어나자 호준이 접시 하나를 내밀었다.

“한번 드셔보시라고 가져왔습니다. 만드신 토끼고기 요리를 먹어봤는데 맛이 아주 괜찮더군요. 잡내가 나지 않게 잘 구워져서 제 입맛에 잘 맞았습니다.”

“아… 네.”

“경기 결과가 어떻든, 나중에 한 번 더 요리를 먹고 싶습니다. 렌리 님은 제가 만난 요리사 중에 가장 요리를 잘 하시는 분이었거든요.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호준의 갑작스러운 칭찬에 렌리는 할 말을 잃고 얼어붙었다.

낙담하던 기분이 날개 돋친 듯 날아올랐다.

렌리는 붉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애써 모른척하며 말했다.

“아. 네. 가, 감사합니다. 과찬이십니다. 호준 님 요리에 비하면 영 못한걸요.”

“아닙니다. 모든 요리는 다 그만의 가치가 있는 걸요. 그럼 잘 부탁합니다.”

호준은 그렇게 짧은 대화를 마친 뒤 제자리로 돌아갔다.

처음에는 염탐하러 온 것 아닌가 했는데.

정말 요리를 전달하고 맛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 온 모양이었다.

‘맛있었구나.’

호준에게 칭찬을 듣고 나자 왠지 모르게 렌리의 머릿속에 작은 불빛이 들어왔다.

시합 결과가 어떻든, 중요한 것은 이번 콘테스트가 끝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모든 요리는 다 그만의 가치가 있다.’

렌리는 호준이 주고 간 알크메네 꼬치를 맛있게 먹고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호준의 테이블 위에 접시를 내려놓으며 렌리는 호준에게 귀띔했다.

“우승하시거든….”

대귀족 나타샤의 야심에서 시작된 전설.

그 전설을 얻을 기회가, 호준에게 주어진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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