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를 너무 잘함-181화 (181/200)

181. 탈출

타인을 돕는 행동은 사람들의 호감을 얻는 가장 빠른 길이다.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붙잡힌 사람을 풀어주고.

선의를 베푸는 광경을 보며 사람들은 긍정적인 감정을 품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그렇기에 지금 호준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노예를 돕기 위해 나서는 것은, 유토피아에서 아주아주 보기 드문 케이스였으니까.

‘더불어 간도 크네.’

호준은 그냥 저택도 아니고 상급 용족의 대저택에 침입했다.

그것도 쥐라는 작고 유약한 동물로 변신해서.

대귀족이라면 분명 용력 또한 남다를 텐데, 그 부분은 걱정도 안 하는 듯 행동했다.

이미주는 조마조마했다.

혹시라도 배수관을 지나다가 고양이라도 만날까 봐 보는 내내 연신 입술을 깨물었다.

다행히 호준과 츄츄는 배수관을 통과하는 동안 어떤 생명체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잘 풀린 것 같지만 지금부터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었다.

이미주는 라텔의 입술이 열리는 것을 빤히 바라봤다.

“나를 지상으로 데려다줘.”

지상으로 데려다 달라.

지극히 당연한 요구였다.

호준이 뭐라 답하기 전에 라텔이 계속 말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걸 잘 안다. 네가 부탁을 들어주면 이걸 주겠다.”

라텔이 손가락을 튕기자 그녀의 정수리에서 구슬이 튀어나왔다.

구슬이 빙글빙글 돌며 섬광을 뿜어냈다.

어두운 감옥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이미주는 눈을 반짝이며 구슬 주위로 퍼져나가는 빛을 감상했다.

구슬이 물 흐르듯 호준의 손바닥 위로 올라갔다.

그가 구슬을 만지작거리더니 곧 변화가 보였다.

정확히 이미주는 보았다.

‘입꼬리가.’

호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을.

‘할 생각이구나.’

호준의 심경을 눈치챈 이미주와 달리 라텔은 초조해 보였다.

라텔은 입술을 곱씹으며 호준의 눈치를 보았다.

호준은 태연히 그런 라텔의 손바닥 위에 구슬을 올려놓았다.

“그래. 빼내주지. 그 대신.”

“그 대신?”

“츄우~?”

호준은 츄츄를 들어 올렸다.

츄츄가 고개를 갸웃하며 라텔과 호준을 번갈아 보았다.

“네가 죽어야 한다, 라텔. 쥐에게 먹혀서.”

호준이 츄츄를 내밀며 다가서자 라텔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 * *

“하암.”

하급 용족 쥬안은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그는 어두컴컴한 감옥 구석에 설치된 해먹에 누워있었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바로 옆엔 유일하게 빛이 남아있었다.

“아, 지루해 죽겠네.”

그는 못내 아쉬웠다.

오늘은 1년에 한 번 있는 요리 콘테스트가 있는 날이었으니까.

뽑기운이 없어서 당번에 걸려버리고 말았다.

몇 시간 뒤면 귀족들이 추천하는 요리사들이 모여 뜨거운 경연을 펼칠 테고.

“시식 음식도 많을 텐데. 아, 생각할수록 배고프네.”

거기에 있기만 해도 맛있는 요리를 잔뜩 먹을 텐데.

하필 왜 오늘 당번에 걸려서.

입맛을 다시며 쥬안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확 몰래 나가버려? 들키지만 않으면 될텐데.”

마음 같아서는 몰래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아직 남아있는 이성 한오라기가 그를 붙잡았다.

“에이 안 될 말이지. 죽을라고.”

이 저택의 주인이자 인어족의 주인인 대귀족 나타샤.

그녀는 대대로 용족의회의 의원을 배출한 명망가 출신의 대귀족이었다.

워낙 까탈스러운 성격이다 보니 실수로 인어족이 탈출하기라도 했다가는.

“불벼락이 떨어지고도 남지.”

권력을 가진 용족의 눈 밖에 나서 좋을 일이 뭐가 있을까.

쥬안은 아쉬운 마음을 꾹꾹 눌러담고 괜시리 볼을 긁적였다.

계단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바람이 볼을 때렸다.

권세가 없으니 바람 하나도 처량하게 느껴졌다.

쥬안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착잡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하, 책이나 보자.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백 배 낫지.”

쥬안은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는 바닥을 손으로 쓸었다.

바닥을 뒹구는 가방에서 책을 꺼내고 다시 누워보려는데.

“꺄아아아!”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발원지는 감옥 안.

비명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쥬안은 태평했다.

“또 벌레가 나왔나.”

쥬안은 비명을 듣자마자 바퀴벌레 때문이라고 단정했다.

일전에도 인어족은 바퀴벌레를 보고 경기를 일으킨 적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밟아죽이면 될 걸, 왜 저렇게 난리야.”

쥬안은 책을 내던지고는 창을 들었다.

날이 선 삼지창을 휘적거리며 그가 감옥으로 걸어가는 사이.

비명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사, 살려… 크윽.”

그러나 가뜩이나 예민하고 짜증 난 쥬안은 소리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감옥문에 도달한 그가 창으로 창살을 세게 내리쳤다.

투캉―

“벌레 따위에 시끄럽기는. 그냥 입 닥치고 있으…… 뭐, 뭐야!”

늘 그래 왔듯 욕을 늘어놓으려던 쥬안이 순간 굳어버렸다.

그는 눈을 의심하듯 몇 번이나 눈을 깜박였다.

‘지금 이게 꿈은 아니… 지.’

꿈인가 싶을 정도로 눈앞에 보인 광경은 황당했다.

아니 기괴했다.

“쥐, 쥐떼가 대체 왜 여기에…!”

딱 봤을 때는 쥐떼가 인어족을 덮친 상황이었다.

바닥은 이미 피로 홍수를 이뤘고.

인어족의 전신은 쥐로 뒤덮여있었다.

얼굴조차 확인이 불가능해서 꼬리로 인어족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 난데없이 웬 쥐떼란 말인가.

“어이 대답해 봐. 어이!”

쥬안은 인어족에게 다가가려다가 바닥에 흥건한 피 웅덩이를 보고 질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피를 싫어하는 그는 소리높여 인어족을 불러댔다.

그러나 평소에는 꼬박꼬박 들려오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이런. 죽었구나. 젠장.’

쥬안은 여자의 입술 바깥으로 쥐꼬리가 튀어나온 것을 보고 혀를 찼다.

2개의 꼬리가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필시 쥐로 인해 질식한 것이리라.

가슴도 움직이지 않고.

꼬리뿐만 아니라 비늘 이곳저곳이 사포질이라도 당한 것처럼 상처가 있었다.

“이런 젠장할. 젠장! 하필!”

죽음의 책임은 자신이 질 것이 분명했다.

쥬안은 얼굴을 구기며 창을 내팽개쳤다.

연신 마른세수를 하며 그는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재산을 손상시키면 죗값을 치러야 한다. 문제는.’

그 죗값이 목숨이 될지도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폴리모프해서 인간계로 도망가자.’

쥬안은 창을 집어들고 단전에 에너지를 모았다.

하급귀족인 그는 바로 포탈을 만들 힘이 없었다.

“인간계로 가면 못 찾을 거야. 그래. 제아무리 귀족이라 해도.”

쥬안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포탈을 만드는 그때.

“네가 날 우습게 아는구나.”

서릿발 같은 음성이 쥬안의 뒷목을 움켜쥐었다.

“젠장!”

쥬안이 아직 덜 만들어진 포탈로 점프하는 순간.

파지지직―

“크에에엑!”

손목 굵기의 번개가 쥬안의 뒤통수를 타격했다.

쥬안이 바들바들 떨며 공중에 떠올랐다.

“으아아아아―!”

지독한 두통에 쥬안이 뒤로 고꾸라졌다.

마치 당구공 십여 개가 머리속에서 두개골을 세게 때리는 것 같았다.

쥬안의 동공은 극심한 고통에 활짝 열렸다.

나타샤의 힘 앞에 쥬안이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제, 제발. 잘못했습니다.”

나타샤는 쥬안의 머리카락을 쥐어 고개를 들어올렸다.

“말해라. 저년이 왜 저 상태인지.”

“그게… 쥐떼에게 습격을 당해 질식한 것 같습니다. 제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지요. 저, 저기 보십시오. 꼬리도 완전히 찢어지지 않았습니까?”

쥬안은 재빨리 인어족에게 다가가 그 상태를 보여주었다.

상처를 손으로 휘적거려도 인어족은 꿈쩍도 안 했다.

나타샤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손을 거뒀다.

“저년이 죽을 동안 넌 뭘 했느냐.”

“그냥 잠시 쉬는 중이었습니다요. 제, 제 잘못입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저는 정말 나타샤 님을 충성으로 모셨습니다.”

“네가 이 일을 꾸민 것은 아니고?”

나타샤가 쥬안의 머리칼을 휘어잡더니 위로 들어 올렸다.

마치 인형을 들어올리는 것 같았다.

“으으―”

압도적인 힘 앞에 쥬안의 발이 허공에 대롱대롱 흔들렸다.

쥬안은 머리카락이 빠질 것 같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하하. 제, 제가 꾸미다니요.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절대 아닙니다. 어르신. 저는 그저 하급 용족에 불과한걸요. 제 능력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절대 아닙닙니다. 아니고말고요.”

필사적인 항변을 들은 나타샤가 그를 바닥에 내팽겨쳤다.

“아이쿠― 후우….”

바닥에 턱이 제대로 부딪힌 쥬안이 턱을 비비적대며 무릎을 꿇었으나 나타샤는 인어족만을 바라봤다.

‘아깝긴 하지만. 필요 없으면 버려야지.’

지금은 요리 콘테스트장에 가기 위해 치장을 할 시간이었다.

쯧―

나타샤는 혀를 차며 허공에 손을 휘둘렀다.

츠츠츠츠츳―

라텔에게 내려졌던 노예 인장이 거두어졌다.

노예 인장을 제거한 나타샤가 몸을 돌려 계단으로 향했다.

모기처럼 작은 목소리로 쥬안이 조심스레 물었다.

“나타샤 님. 이 녀석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쓰레기는 쓰레기 소각장에 버려라.”

“네, 나타샤 님.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잘 처리하겠습니다.”

나타샤가 떠나자 감옥은 다시 조용해졌다.

“후우. 다행이네. 살았다 살았어!”

쥬안의 환호성이 감옥에 울려퍼졌다.

쥬안의 환호성을 츄츄를 통해 듣고있던 호준은 나지막이 미소지었다.

‘이젠 자유로군.’

주인이 스스로 노예 인장을 제거한 그 순간부터.

라텔을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츄츄의 분신을 잔뜩 먹고.

꼬리를 뜯어내 자해를 한 라텔은 그렇게 15년 만에 자유의 몸이었다.

* * *

스카이림의 수도, 아스타샤.

아스타샤에 즐비한 수많은 술집들 중에서도 아로나의 술집은 제법 유명했다.

유독 손님이 없기로.

맛없는 맥주와 맛없는 파이 덕분이었다.

그런 아로나의 술집을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문이 벌컥 열리자 여주인, 아로나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어서오세… 어? 타무르 님!”

200년 단골손님, 타무르의 등장에 그녀가 담뱃불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타무르는 그녀가 가진 몇 안 되는 단골이자.

아스타샤를 움직이는 거대한 자금의 주인이었다.

“우리 술집 최고의 단골고객님!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1년 만이군.”

“뭐 필요한 거라도 있으신가요?”

타무르는 가게가 텅 비었음을 확인하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뒤에서 큼지막한 궤짝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에서나 볼 법한 평범한 궤짝인데 숨구멍처럼 구멍 하나가 나 있었다.

타무르는 궤짝 뚜껑을 툭툭 매만지며 아로나에게 당부했다.

“이 궤짝을 보관해주게. 내가 가지러 올 때까지 아무에게도 궤짝을 보이지도, 말하지도 말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제 방에 가져다 놓겠습니다. 누구도 방에 들이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고맙네. 수고비는….”

타무르가 소매를 뒤지는데, 불쑥 금화 주머니가 아로나에게 날아왔다.

탁―

“이, 이건…?”

아로나는 영문도 모르고 묵직한 금화 주머니를 품에 안았다.

곧 타무르의 뒤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인간?’

아로나는 인간의 얼굴을 세심히 보았다.

그동안 무수히 봐왔던 겁에 질리거나 기가 죽은 인간이 아니었다.

어깨를 당당하게 펴고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

인간은 스스로를 소개했다.

“저는 타무르 님의 지인인 호준이라고 합니다. 궤짝은 제 것이니 보관비도 제가 지불하는 게 맞는 것 같군요.”

“호준 님, 이 정도는 제 호의입니다. 여기까지 와주신 것만 해도 고맙기도 하구요. 제가 부담하게 해주시죠.”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합니다. 그래도 신세를 많이 졌는데 더 신세를 지고 싶지는 않군요.”

“허허. 이거 참. 그럼 호준 님 뜻대로 하겠습니다.”

아로나는 타무르에게 존대받는 인간의 정체가 뭘지 궁금해졌다.

‘타무르 님이 저렇게 챙기는 분은 난생처음 보는군.’

그냥 용족도 아니고 대대로 왕족의 혈통을 가진 이였다.

그런 자의 존대를 받는다는 것은 곧.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건 없다 이거지.’

달그락―

아로나가 얌전히 대화를 참여하기를 기다리는데 별안간 궤짝의 뚜껑이 들썩였다.

타무르와 호준의 입이 닫히고 둘의 시선이 궤짝으로 향했다.

물비린내로 보아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대강 예상이 되었으나 아로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두 분의 비밀이 무엇이든, 저는 못 본 것으로 하겠습니다. 잘 보관할 테니 다녀오십시오.”

빠른 눈치 덕분에 그녀는 500골드라는 짭짤한 팁을 얻을 수 있었다.

* * *

아로나에게 라텔을 맡기고 콘테스트장으로 가는 길.

호준은 타무르의 호의 덕분에 그의 저택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타무르와 꿀술을 나눠 마시고 꿀담배를 피우는 사이.

여기저기 구경하느라 신나 있던 다크니스와 미르, 츄츄가 낮잠을 잤다.

그들의 옆에 누워 호준은 생각했다.

‘역시 오길 잘했어.’

라텔은 인어족의 무수히 많은 세부 무리들을 통합한 인어왕의 셋째딸이자.

하늘국에서 벗어나게 하는 퀘스트를 제안했다.

퀘스트에 성공할 경우 얻는 보상은 꿀처럼 달콤했다.

【퀘스트 보상】

【영원한 우방 칭호 획득】

【인어족 전원 (10만 231명)의 호감도가 50 올라갑니다】

【역대 인어왕의 유골이 묻힌 유적을 자유롭게 탐사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인어족은 당신을 절대로 공격하지 않습니다 (호감도가 0으로 내려갈경우 공격 가능)】

【…….】

【인어왕은 당신과 동맹을 맺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라텔은 곧, 10만의 아군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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