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라텔
유토피아에는 다양한 콘텐츠들이 있고 그 중에는 현대인이 보기에 불쾌한 콘텐츠도 종종 존재했다.
19금이라는 나이제한을 걸고 등장하는 고문, 살인, 방화 등.
그런 불편한 콘텐츠 중에 대표적인 하나가 노예제였다.
이 곳의 노예는 말 그대로 노예였다.
주인의 명이라면 가파른 절벽에서 뛰어내려야 했고, 죽으라면 혀깨물고 죽어야 했다.
노예제를 유지하는 나라는 많지 않았으나 없지도 않았고.
하늘국도 노예제를 유지하는 몇 안 되는 나라였던 모양이었다.
└ 【고구마말랭헐랭】: 헐… 완전 불쌍.
└ 【라면귀신】: 샤롯이랑 판박이인줄. 난 샤롯인줄 알았다구.
└ 【감자튀김볶음밥】: 진짜 노예는 처음봄 ㅠㅠ
└ 【선의의킬러】: ㅜㅜ 하늘국 좀… 음… 깨네.
이 광경을 보는 시청자들과 마찬가지로 호준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보기 불편하군.’
그는 마음이 심히 불편했다.
책으로 읽거나 영상으로 보는 노예제와 실제로 보는 것의 체감 온도는 확실히 달랐다.
축 쳐진 인어가 기어가는 모습은 처량해 보이기 짝이 없었다.
호준이 못내 씁쓸한 얼굴을 하자 파이젤도 그를 눈치챘다.
파이젤은 인어가 주인을 따라 사라지자 호준을 이끌고 외딴 골목으로 갔다.
그는 나무상자에 걸터앉아 속사정을 털어 놓았다.
“사실은 하늘국에는 원래 저런 노예제가 없었습니다. 저도 저런 모습을 원치 않지만. 이렇게 보여드리게 되어 죄송하군요.”
“어쩌다가 노예제가 생긴 겁니까?”
“오래전 인어족과 전쟁이 벌어졌지요. 그때 일부 과격파가 인어족을 노예로 만들자며 법을 밀어붙였고 그 법이 통과되었습니다. 아직 그 과격파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바람에 노예제를 없애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해를 하실까봐 덧붙이자면 대다수 용족들은 노예제를 폐지하기를 원합니다. 다만… 의회에서 만장일치가 있어야 노예제를 폐지할 수 있다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요.”
정리하면, 수백년 전 전쟁이 벌어진 이후, 노예제를 유지중이라는 것이었다.
일부 반대로 인해 폐지도 못하고.
복잡한 정치상황은 그렇다 치고, 호준이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그것이 아니었다.
“저 노예는 어디에서 구한 겁니까? 제가 아는 인어족과 너무 비슷해서요.”
“인어족은 아주 가끔 하늘국에 나타납니다. 주로 텔레포트장치의 이상이나 마법의 실패로 잘못 이동한 경우지요.”
“운 나쁘게 하늘국에 표류하면 노예가 되겠군요.”
“네. 지금으로서는 그렇습니다. 법대로라면 가장 먼저 인어족을 발견한 자에게 주인의 자격이 주어지지요. 아마 저 인어족도 그래서.”
“이해가 갑니다.”
호준은 파이젤의 말을 곱씹으며 이전 기억을 떠올렸다.
샤롯과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을.
샤롯은 기억상실증에 걸려있다가 요리를 먹고 기억을 되찾았다.
그때 금지된 주술을 사용한 부모님의 도움으로, 텔레포트하는데 성공했다고 얘기했었고.
‘혹시 그때 샤롯의 동생이나 친인척들도 같이 이동한 것 아닐까. 그러다 재수없게 하늘국에 떨어져서 노예 신세가 된 걸지도. 숨겨진 자매일지도 몰라.’
샤롯과 닮은 외관이다보니 샤롯 자매설에 힘이 실렸다.
역시 아까부터 속이 불편했던 이유가 이 때문인 듯 했다.
호준은 고개를 들어 파이젤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의 얼굴은 호준 자신 만큼 불편한 기색이 가득했다.
파이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증오는 혐오로 이어지고, 혐오는 마음을 좀먹는 벌레가 된다고 하죠. 저도 어서 노예제가 폐지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왕족으로서 안 좋은 모습을 보인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파이젤은 말뿐 아니라 실제로 마음이 불편했다.
자랑스러운 하늘국의 모습이 아니라 안 좋은 모습을 보인 것이 못내 아쉬웠던 것.
여기까지 와서 호준이 콘테스트 참가를 거절하지는 않겠지만 이왕이면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그의 진심이 전해졌던 것일까.
호준은 나무상자에 앉아 파이젤과 눈을 마주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니까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신경쓰이는 부분은 아까 그 인어족이 제 지인과 붕어빵처럼 닮았더군요. 그래서 놀란 겁니다.”
“흠… 인어족은 개성이 있다고 알려져있는데. 얼굴이 비슷하면 같은 무리에 속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래서 한번 확인해볼까 합니다만. 그 인어족과 잠시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마련할 수 있을까요?”
호준의 물음에 파이젤은 입가에 손가락을 갖다대고 잠시 고민했다.
아까 그 용족 여인의 이름은….
파이젤은 잠시 생각한 끝에 입을 열었다.
“인어족이 어디있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만, 다만 제가 직접적으로 돕기는 무리입니다. 제가 아무리 왕족이라 해도 사적 재산을 이래라 저래라 명령할 권리는 없습니다. 인어족의 주인은 나타샤라는 자인데, 그녀는 부유한 귀족 집안 출신이지요. 아무래도 끼어들 명분도 없구요.”
끼어들지는 못하지만 길안내는 할 수 있다는 대답이었다.
호준에게는 그 정도 도움만으로 충분했다.
인어족과 대화를 하는 것이 주 목적이고.
대화 후에 어찌 행동할지는 스스로 결정할 사안이니까.
호준은 파이젤을 똑바로 마주하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왕족으로서 함부로 개입하기 어렵겠지요. 이해합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타무르 말대로 실력뿐만 아니라 자신감도 보통이 아니시군요.”
“조금 무모하다고는 하지만. 하고 싶은 것은 하는 성격이라서요.”
“저는 그런 점이 부럽습니다. 왕족은 의외로 제약이 많다보니. 흠흠. 저는 호준님이 무슨 일을 하던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겠습니다. 길안내만 돕도록 하지요.”
“그걸로 충분합니다.”
“후후.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파이젤은 그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앉았던 상자에서 삐그덕 소리가 났다.
호준은 저벅저벅 걷는 파이젤의 뒤를 호준이 따라갔다.
슬쩍 뒤를 흘깃 보았더니 아까보다 빛바랜 느낌의 시장이 보였다.
인어족이 맞는 광경을 보니 김이 팍 식어서일지도.
‘재미있군.’
지금은, 처음 시장에 들어섰을 때와는 다른 이유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파이젤이 허공에 손바닥을 휘저어 포탈을 만들자 푸른색 포탈 너머로 붉은색 저택이 보였다.
화려하면서도 음습한 느낌을 풍기는 저택이었다.
파이젤이 먼저 포탈로 뛰어들자 호준도 그 뒤를 따랐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음습한 장미의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 * *
철컹―
흐트러진 분홍빛 머리를 한 인어족이 감옥 안으로 들어오자 경비병이 문을 닫았다.
마법이 부여된 감옥문은 청아한 푸른 빛을 뿜어냈고.
“아야.”
마법 창살은 그 강렬한 기운때문에 옆을 지나가는 인어족의 피부에 상처를 남겼다.
정확히는 비늘에 기스가 생겼다.
따끔한 감각에 라텔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휴우….”
어두컴컴한 구석에 쪼그려 앉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반항이었다.
경비병은 그녀를 신경도 쓰지 않은 채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지독히도 어둡고 지독히도 조용한 이곳.
어두운 노예감옥에서는 한 줄기 달빛조차 사치였다.
‘창문이라도 있었으면 좋을텐데.’
창문이라도 있으면 조금 덜 답답했을텐데.
바란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바깥 공기를 못 마시는 기분은 너무나도 답답했다.
라텔은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바닥에 엎드렸다.
종일 기어다닌 덕분에 아래쪽 비늘에 생채기가 났다.
“힐.”
그녀는 남은 기력을 모아 비늘을 다듬기 시작했다.
쓱쓱쓱―
푸른 섬광이 그녀의 손에서 뿜어져나왔다.
손이 스쳐지나가는 곳마다 갈라지고 터진 비늘이 달라붙기 시작했다.
힐링을 마친 라텔은 멍하니 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하나, 둘, 셋.”
기억이 없는 그녀가 미치지 않기 위해 선택한 일은 천장 벽지에 그려진 물고기 무늬를 세는 일이었다.
아무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 적막하고 아무도 없는 어두운 공간에서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차라리 시끄러우면 신경이라도 쓰면서 생각을 할텐데.’
이곳은 너무 조용했다.
마치 무(無)의 공간처럼.
적막에 수 시간 노출되면 두통이 찾아오고 숨이 가빠졌다.
혼잣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힘들었다.
‘정신 차리자. 반드시 살아남아서 행복해질거야.’
기억은 없지만 어렴풋이 그녀는 꿈을 꿨다.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자신에게 미소짓던 몇몇 인어들.
그들이 바닥에 진을 그리고 자신에게 손을 흔들던 모습.
라텔은 절대 희망을 잃지 않았다.
기억을 되찾을 거라는 희망.
자유를 되찾을 거라는 희망을.
희망은 매일같이 찾아오는 절망을 참을 수 있는 유일한 동앗줄이었다.
달각―달각―
“열 여섯, 열 일곱… 스물.”
라텔은 비늘에 감춰두었던 목걸이를 꺼내 매만지며 멍하니 무늬를 세었다.
오늘은 천 까지 세려나.
아니면 어제처럼 이 천을 넘기려나.
무심한 얼굴로 물고기를 세는 그녀에게 평소와는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찍찍― 찍찍―
숨소리마저 잘 들리는 적막한 곳이기에, 그녀는 즉시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쥐?”
동글동글한 쥐가 바닥의 구멍에서 기어올라오고 있었다.
공기가 들어오는 작은 쇠로 된 구멍을 통과한 쥐는 토실토실하니 귀여워 보였다.
“한 마리가 아니잖아?”
그런데 쥐가 한 마리가 아니라 무려 두 마리였다.
생전 처음 쥐가 방문한 것에 라텔은 눈을 반짝였다.
쥐가 뭐라고 할지 모르나, 그녀에게는 이 적막을 지워줄 누구라도 반가웠다.
“안녕. 쥐돌이라고 불러야나? 얘는 쥐돌이라고 하고. 너는 쥐순이가 좋겠다. 아. 그런데 왜 이렇게 비슷하게 생겼지? 쥐가 원래 다 똑같이 생긴건가? 같은 쥐라서 그런걸지…!”
늘 혼자있어 혼잣말이 능숙한 라텔은, 곧 말을 멈추었다.
그녀의 눈이 튀어나올듯이 커졌다.
“잠깐 얘기 좀 했으면 합니다만.”
쥐가 한 순간에 사람으로 변했다.
검은색 정장으로 입은 사람은 어둠속에서도 눈이 반짝일 정도로 기운이 강했다.
눈빛만으로도 압도당하는 기분에 라텔은 연신 입술을 안으로 말았고.
“내 말 알아들을 수 있지?”
호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경청하는 라텔에게 호준은 연이어 질문했다.
“이름은?”
“라텔.”
“왜 여기에 있지?”
“그 그건. 기억이 안 나. 나도 기억하고 싶은데.”
“나이는.”
“열 다섯. 맨날 열 다섯이나 되는 주제에 능력이 없다고 뭐라고 해.”
“너 말고 다른 인어족을 본 적 있나?”
“아니. 인어족은 한번도 못 봤어.”
호준은 얌전히 대답하는 라텔을 내려다보았다.
라텔은 대답을 하면서도 호준이 아니라 츄츄를 보고 있었다.
츄츄가 라텔의 무릎에서 잠을 자니 아주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동물을 좋아하는 10대 여자아이로 보였다.
호준은 마지막으로 메신저 구슬을 작동시켰다.
“호준님, 하이용!”
공중에 화면이 생기고는 샤롯이 화면속에서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우와. 이게 뭐야?”
“메신저 구슬이라는 거다. 그것보다. 이 녀석도 인어족인데 혹시 기억 안나?”
“아까 얘기했잖아. 기억을 완전히 잃었다니까. 그나저나 저분 나랑 똑같다. 어쩜 눈도 코도 입도. 비슷해.”
라텔은 화면에 빨려들어갈 것처럼 다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로써 라텔이 기억이 없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흠. 무슨 퀘스트같은 게 나타날 줄 알았는데.’
메신저 구슬 작동을 해제하고서 호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샤롯의 경우에는 스스로 찾아와 퀘스트를 제안했다.
이 인어족도 똑같거나 비슷한 퀘스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던 걸까.
“아아. 너무 귀엽다.”
태평하게 츄츄를 쪼물닥쪼물닥 만지는 라텔과 달리 호준은 벽에 기대 앉아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의 고민이 깊어지던 그때, 그의 눈에 뭔가가 보였다.
“어…? 이게 왜 이러지?”
라텔의 목걸이가 푸른 빛을 띄며 허공으로 뜨기 시작한 것.
라텔이 당황해 목걸이를 바라보자 목걸이에 달린 보석조각의 꼭지점이 정확히 호준을 가리켰다.
호준은 마치 주문에라도 걸린 것처럼 보섯 조각을 손으로 쥐었다.
【퀘스트 발동 조건을 달성했습니다】
퀘스트 메시지가 뜨자마자 어둠이 가득한 감옥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목걸이에서 뿜어져나온 푸른 바람이 라텔을 휘감았다.
잠시 뒤, 바람이 사그라들고 다시 나타난 라텔은 이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기억이……돌아왔어.”
상아색 금발머리를 한 라텔의 눈빛은 방금전과는 달랐다.
그녀의 눈빛은 삶에 대한 의지로 충만했다.
큰 변화가 일어났지만, 호준은 라텔을 살펴볼 여력이 없었다.
【당신은 봉인된 왕족의 힘을 해제했습니다】
【당신에게 새로운 퀘스트가 부여됩니다!】
【앞으로…】
기다리던 새로운 퀘스트가 눈앞에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