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간절한 부탁
유토피아에는 인간만 사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족이 살아가는데 수인족, 인어족, 엘프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소수 종족들이 있다.
종류가 워낙 많아서 이름을 다 외기도 힘들 정도다.
그렇게 수많은 종족이 유토피아에 살지만, 플레이어들이 만날 수 있는 종족은 한계가 있었다.
대부분의 종족들은 인간과 거리를 유지했으니까.
인간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온 드워프족을 제외한 나머지 종족들은, 폐쇄적이었다.
어쩌다 마주쳐도 경계하는 경우가 다반사요.
싸우지 않고 지나치면 다행이었다.
그런 분위기이다 보니, 요정의 쉼터에 줄 서있던 사람들이 동요하고 있었다.
“요 용족이잖아?”
“용족이 여긴 왠일이래?”
갑자기 떡하니 나타난 용족 때문이다.
검은 갑옷을 갖춰입은 용족은 2m가 넘는 훤칠한 키를 가진 남자였다.
그의 이름은 타무르.
타무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경계가 가득했다.
“용족이 여긴 무슨일이지? 하늘국이랑 여기는 가깝지가 않잖아?”
“내말이. 살다살다 용족은 처음 보네.”
사람들의 말대로 용족이 요정의 쉼터에 나타나는 것은 일상적이지 않은 일이었다.
용족의 거주지로 알려진 하늘국에서 요나스마을까지는 거리가 상당하니까.
걸어서 움직인다고 치면, 족히 한 달은 걸릴 정도의 거리.
즉, 사람들이 보고있는 용족은 그 먼 거리를 감수하고 왔다는 소리였다.
스윽―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일까.
타무르는 흘러내린 옆머리를 질끈 묶으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좌우를 살폈다.
사람들이 괜시리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쉿….”
“흡….”
“…….”
삽시간에 조용해진 분위기속에서 타무르는 어딘가를 빤히 바라봤다.
그가 바라본 곳은 대기줄이 끝나는 지점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타무르가 줄 맨 뒤쪽에 섰다.
그의 앞으로 줄이 길게 늘어섰다.
‘언제 줄어들려나.’
그는 빨리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바라며 앞쪽을 흘깃거렸다.
팔과 다리, 꼬리를 덮은 검은 비늘이 햇빛을 반사해 반짝거렸다.
* * *
“끼루루!”
“묘옹!”
호준은 미르와 송이가 들뜬 울음을 내며 창문에 붙어있는 것을 빤히 보았다.
대체 뭘 구경하느라 저렇게 끼룩끼룩 우는 것일까.
생닭 손질을 마치고서 호준은 미르와 송이쪽 창문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길래 그래?”
두 녀석의 민둥민둥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창밖을 바라본 호준은, 둘이 왜 그렇게 흥분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쫙 찢어진 날카로운 눈, 훤칠한 키에 딱 벌어진 어깨.
비늘이 팔다리에 달린 용족이 줄을 서 있었다.
“용족은 처음 보네.”
용족을 볼 거란 생각은 한번도 해본적이 없기에 조금 놀랐다.
용족은 워낙 타종족과 교류도 잘 안할뿐더러, 용족의 주 거주지인 하늘국을 평생 벗어나지 않는 용족이 대부분이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더군다나 하늘국은 이 곳과는 한참 떨어진 곳이고.
그런데 오늘은 예외인 모양이다.
눈이 마주친 용족 남자는, 가게 안을 들여다보기위해 까치발을 들었다.
오만하다는 세간의 평과는 조금 다른 반응이다.
‘뭐. 여기까지 온 거면, 다 똑같은 손님이지.’
호준은 용족을 빤히 바라보는 미르와 송이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요리에 집중했다.
시간이 흘러 손님들이 쫙 빠지기 시작할 무렵.
장사가 끝무렵에 접어들자 뒤쪽에 있던 용족이, 드디어 가게로 발을 내디뎠다.
스스스스스―
타무르가 걸음걸음 걸어가자, 그의 꼬리가 바닥을 긁으며 기스를 냈다.
“저, 손님, 테이블은 이쪽인데….”
“괜찮네. 잠시. 이야기를 나누지.”
“네?”
타무르는 별이에게 고개를 젓고는 호준에게로 걸어가 바로 앞에 멈춰섰다.
호준은 파를 써는 작업을 중단하고 고개를 들었다.
둘의 시선이 말없이 교차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타무르였다.
“내 이름은 타무르라고 하네. 자네에게 긴히 부탁할 것이 있어 찾아왔네.”
“무슨 부탁 말입니까?”
호준의 물음에 타무르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당신이 꽤 유명한 요리사라고 저잣거리에서 소문이 자자하더군.”
“그저 요리사일 뿐인걸요.”
“흠흠. 내 용건은… 자네가 지금까지 만들었던 모든 음식을 하나씩 먹어보고 싶네. 시간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네. 가능하겠는가?”
“흠….”
호준에게 모든 요리를 만들어달라는 제안은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이미 만들어봤던 요리를 만드는 것이야 얼마든지 가능했으니까.
재고도 넉넉했다.
“혼자먹기에는 양이 너무 많을 텐데요.”
다만, 문제는 그 요리들은 혼자 다 먹을만큼의 양은 아니었다.
치킨만 해도 넷이서 배 터지기 먹을 양 아니던가.
과유불급이라고 너무 과한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만든 요리는 적은 양이 절대 아닙니다. 혼자서는 다 못드실텐데요?”
호준은 타무르가 주문을 바꿀 거라 생각하고 귀를 쫑긋했다.
그러나 타무르의 반응은 호준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타무르는 오히려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나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네. 탐식의 유전자를 타고나서 말일세. 어쨌든. 요리 가격은 두둑이 지불할테니, 가져다 주시게.”
“뭐…그렇다면야. 알겠습니다.”
“전체 다 합쳐서 1만 골드를 지불하겠네. 부족하다면 2만 골드도 괜찮네만.”
“1만골드면 충분합니다.”
호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요리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호준님, 제가 서빙할게요!”
“그래. 별아. 이것부터 차례대로 올리면 돼.”
호준은 별이의 도움을 받아 서빙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입가심용으로 과일주스와 특급 팥빙수를 서빙하고.
“포만감이 느껴지는 치킨과 치즈를 듬뿍 올린 피자입니다! 맛있게 드세요!”
치킨과 피자.
그 다음으로는 치즈를 듬뿍 올린 매콤한 떡볶이에 고구마튀김, 양파튀김, 감자튀김, 야채튀김을 고명으로 얹어 내보냈다.
이쯤되면, 보통 사람이라면 포크를 내려놓는게 인지상정이거늘.
“후루루루룹! 후우우. 후우우. 우 맵군. 아틀란트 계곡의 물고기에게 혓바닥을 뜯어먹힌 기분이야!”
“바삭바삭함이 살아있어. 마치 아틀란트 계곡에서 갓 잡은 생선의 비늘을 씹는 것 같군.”
타무르는 미친 먹방을 선보였다.
그는 3번이상 씹지않고 꿀떡꿀떡 삼켰다.
치킨을 라면먹듯이 후루룩 삼키는 것은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와…진짜 잘 먹네.’
호준은 음식을 공중분해하는 타무르를 보며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물론 서빙한 음식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김치전과 해물전입니다!”
“커피번, 코코아입니다. 뜨거우니까 천천히 드세요!”
“장미꽃 꿀사과파이, 꿀사과 절임차입니다!”
“태양오징어, 알찬 새우와 오동통문어가 들어간 해물라면입니다! 팔딱팔딱 뛰는 싱싱한 맛을 느껴보세요!”
“집게가 살아있는 라면, 꽃게라면입니다! 집게가 날카로와서 베일 수 있으니, 드실때 조심하세요!”
“해산물 넣고 푹푹 끓인 매운탕입니다. 밥 비벼먹으면 짱이죠!”
“건강을 생각한 삼계탕입니다. 닭죽을 드시고 싶으시면 따로 불러주세요!”
별이가 음식을 서빙하는 족족, 타무르는 음식을 마셨다.
마셨다는 표현이 옳다고 해야겠다.
“쫘작 쫘좍 쫘작 꿀꺽―!”
꽃게를 껍질채로 씹어삼키는 타무르는 기인열전을 보는 듯했다.
“히이익―! 보 보셨어요 호준님? 저 저 꽃게가…!”
“그래. 봤다…허 참.”
살다살다 꽃게씹어먹는 사람, 아니 용족은 처음 봤다.
타무르의 놀라운 음식먹는 기행덕분에, 그의 옆테이블에는 빈 접시와 냄비가 쌓여갔다.
타무르가 음식을 빨아들이는 동안.
호준은 마지막 음식으로 김치치즈 볶음밥과 연유커피를 만들었다.
한창 볶음밥을 만들고 있을 무렵.
바깥 상황을 보고하러 베티와 샤롯이 돌아왔다.
“호준, 바깥에 테이블 정리 마쳤어!”
“핑구랑 토순이랑 나머지 요정들은 다 잠자러 집으로 들어가고 우리만 남았어.”
종일 쉬지않고 일한 둘의 눈가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고생했다.”
호준은 미리 준비해두었던 먹을거리를 둘에게 건넸다.
아까 여분으로 더 챙겨둔 김치전과 해물전, 그리고 삼계탕 5개였다.
물론 급여와는 별개로 주는 것이었다.
“따로 챙겨놨으니까. 들어가서 먹어. 어서들 들어가.”
“아싸 퇴근! 이거 잘 먹을게!”
“오오오! 김치전도 주는거야? 땡큐우!”
베티와 샤롯이 화색이 되어 가게를 떠났다.
가게에는 이제 타무르와 호준, 별이만이 남았다.
“진짜 잘먹네요. 원래 용은 저런가봐요?”
“글쎄. 미르도 잘 먹기는 하지만. 저 정도까지는 아니지.”
“그러니까요.”
별이와 대화를 나누며 호준은 미르와 송이를 바라보았다.
두 녀석들은 한몸처럼 딱 붙어 있었는데, 기둥 뒤에 숨어서 타무르를 관찰중이었다.
타무르의 비늘과 자신들의 비늘이 비슷하다는 걸 인지한 모양이었다.
“후우우우!”
호준은 국물 한 점 남기지 않고 삼계탕을 원샷하는 타무르에게 마지막 식사를 건넸다.
“자, 이게 마지막입니다. 김치볶음밥하고 연유커피죠.”
“후후. 이것도 맛있는 냄새가 나는군. 고맙네!”
타무르는 호탕하게 웃으며 김치볶음밥을 수저로 푹푹 떠 먹었다.
먹방을 왜 보나 싶었는데, 타무르를 보니 새삼 계속 보게되는 점이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안 흘리고 먹지?’
빨리 먹으면 보통 음식을 흘리기 마련인데, 타무르는 한번도 흘리지 않고 깔끔하게 먹었다.
음식 먹는데도 기술이 필요한 건가.
처음 보는 입장에서는 참 신기했다.
탕―
연유커피와 볶음밥까지 다 먹은 타무르는 배를 두드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타무르는 부른 배를 두드리며 음식값을 지불했다.
“정말 잘 먹었네. 과연. 소문이 헛것이 아니었어.”
“뭐. 맛있게 드시니 저도 보기 좋습니다.”
그를 배웅하고 가게를 청소하려는데. 이상하게 타무르가 발길을 옮기지 않았다.
뒷짐을 진 타무르는 꼬리를 살랑살랑치며 눈치를 보는 듯했다.
꼭 무슨 부탁이 있는 사람처럼.
호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신지?”
“아, 그것이… 저. 미안하지만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나?”
“무슨 부탁입니까?”
“원래 내가 처음 본 사람에게 이런 부탁을 하지 않네만. 자네라면 가능할 것 같아서 말일세. 사실은 말일세.”
타무르의 긴 사연이 이어졌다.
호준은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그의 부탁을 한 마디로 정리했다.
“그러니까 애인하고 결혼하려는데, 장인한테 뺀찌를 맞았다. 그래서 장인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출장요리를 해달라 이거죠?”
“그렇네. 장인어른이 워낙 미식가라서, 웬만한 요리는 만족하지 못한다네. 그래서 백방을 돌아다니며 실력있는 요리사를 찾아다녔지. 자네와 이렇게 만난 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하네. 어떻게. 안 되겠는가.”
호준에게는 갑작스러운 출장요리 제안이었다.
‘이런 퀘스트도 있었나?’
처음 들어보는 패턴인지라 호준은 뭐라 답할지 딱히 떠오르지 않아 입을 달싹였다.
초조해보이는 타무르의 눈을 마주보는 그 순간, 호준의 눈앞에 메시지가 떴다.
【당신은 용족 타무르로부터 인정받아 특별한 제안을 받았습니다】
【타무르의 예비 장인, 용족의 왕을 만족시킨다면, 특별한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제안을 수락하시겠습니까?】
예비장인이 그냥 용족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용족의 왕을 만족시키라는 제안이란다.
【용족의 왕을 만족시킬 경우….】
그 뒤로 이어지는 메시지에 보상이 적혀 있었다.
호준은 메시지를 보자마자 확답했다.
“하겠습니다.”
그의 선택은 당연했다.
【본 제안을 성공할 시, 용족의 비보 1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단 한 번도 들어간 적 없는, 오직 용족만이 들어갈 수 있는 보물창고.
그곳에 숨쉬는 비보를 얻을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