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3호점
철썩―
검푸른 파도가 암벽에 부딪혀 새하얗게 부서졌다.
호준은 거칠게 몰아치는 파도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들었다.
시야를 가득 메우는 탁 트인 바다.
보는 것만으로 속이 뻥 뚫렸다.
탁 트인 바다의 정경.
눈을 감아도 들리는, 철썩거리는 시원한 파도 소리.
짭짜름한 바닷바람 냄새.
시각, 청각, 후각이 말해주고 있었다.
― 여기가 바다구나 사악! 내가 살던 작은 연못과는 비교가 안된다 사악!
흥분한 이무기의 중얼거림도 들려왔다.
바다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이유는, 보는 것만으로 스트레스가 풀리기 때문 아닐까.
지친 마음도 한결 여유로워질 만큼, 바다는 아름다웠고 볼만했다.
호준은 이무기의 꼬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고개를 돌려 저택을 바라보았다.
그가 절벽에 온 이유는 바로 촌장이 이곳으로 안내했기 때문이었다.
촌장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저택을 소개했다.
“참 아름다운 절벽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저택이지요.”
“해가 질 때는 더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석양을 볼 수 있도록 창문도 널찍하게 달아두었지요.”
촌장은 저택의 난간을 손으로 쓸며 말을 이었다.
“이 저택은 제게도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저희 비틀로 마을을 처음 일으킨 세인 비틀로 님이 직접 지으신, 그리고 말년을 보내신 저택이지요. 세인 비틀로 님은 제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이기도 하신 분입니다.”
“그런 건물을 제게 주어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저도 저택을 잘 사용하지 않는 터라, 이왕이면 좋은 분께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딱 호준 님이 적격이죠.”
“감사합니다.”
“내부 관리를 철저히 했기때문에 안전한 건물이고, 특히 내부 인테리어가 훌륭합니다. 촌장이 아니라 제 개인적인 호의로 이 저택을 드리고 싶습니다.”
“음….”
호준은 잠시 말을 하지 않았지만, 촌장의 제안이 마음에 쏙 들었다.
음식점의 기본은 음식이다.
하지만 음식을 먹는 공간이 아름답고, 더불어 바깥의 풍경까지 아름답다면 더 좋은 일 아닌가.
눈이 즐거우면 마음도 즐거운 법이니 말이다.
호준이 입을 달싹이자 촌장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혹시 시내에서 장사를 하길 원하시면, 다른 건물을 알아봐드릴 수도 있습니다. 따로 시내의 건물을 알아볼까요?”
그 물음에 호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닙니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시내보다 오히려 이곳이 식사를 즐기기에는 더 분위기가 있죠. 그리고 이왕이면 아름다운 곳에 가게를 갖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런 훌륭한 건물에서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호의를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허허. 그럼 안을 소개해드려도 될까요?”
촌장이 한시름 내려놓은 얼굴로 가게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호준은 흔쾌히 그의 설명을 들으며 가게를 둘러보았다.
이미 건물은 촌장의 명령하에 1층이 음식점이었고.
2층부터 5층까지는 객실로 개조되어 있었다.
방문객들이 머물다가 1층에서 음식을 먹기에 딱 좋았다.
“단순히 인테리어만 된 게 아닙니다. 요리기구도 충분히 갖추어 두도록 했죠.”
호준이 아주 마음에 드는 부분은 주방에 가득한 요리기구들이었다.
오븐, 튀김기 등 새로운 기구들이 주인을 기다리며 반짝이고 있었다.
내부 구경까지 마친 호준은, 그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았다.
“앞으로 비틀로 마을에 많은 힘이 되주시길 부탁합니다 호준 님!”
“감사합니다.”
호준이 촌장과 악수를 하자, 그의 눈앞에 메시지가 떴다.
【3호점의 소유권을 얻었습니다】
고대하던 3호점이 손에 들어온 순간이었다.
* * *
촌장은 여러모로 호준의 일을 도와주었다.
그 대표적인 일례로.
촌장은 마을 주민 중에서 적합한 이를 골라 가게 직원으로 보내 주었다.
“안녕하세요! 루나!”
“루이!”
“루키입니다! 촌장님 소개로 찾아왔습니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그래. 반갑다.”
호준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 3남매에게 인사를 했다.
미리 촌장에게 들었던 대로, 3남매는 활기찬 얼굴에 밝은 인상을 지닌 10대였다.
루나는 빨간머리 앤을 연상케 하는 여자아이였고.
배시시 웃는 얼굴이 귀여운 인상을 지녔다.
루나가 첫째로 16살이고.
그 밑의 남동생 둘은 15살, 13살이었다.
역시 남매라 그런지 볼에 주근깨가 있고, 소박해보이는 미소가 매력 포인트였다.
“잘 부탁한다. 얘들아.”
“넵!”
“넵!”
“뭐든 열심히 하겠습니다!”
호준은 인사를 마치고 급여를 책정했다.
그러고는 셋에게 역할을 맡겼다.
루나는 음식점 아르바이트 경력이 있으니 요리를 맡겼고.
루이와 루키는 객실관리와 심부름, 서빙을 맡겼다.
가게는 이미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여서 청소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아이들에게 팥빙수를 주고는, 그들이 팥빙수를 먹는 사이 의자에 걸어 앉아 생각에 잠겼다.
‘음. 무슨 요리를 할까.’
3호점도 열었겠다.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보고 싶은데, 뭘 만들지 고민이었다.
호박죽은 아직 호박을 수확하지 못했으니 안 되고.
호준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을 거듭했고.
문득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까. 제면기가 있었지.’
촌장님이 설치한 새 조리기구 중에는 그가 유일하게 갖고 있지 않은 기계, 제면기가 있었다.
제면기, 즉 면을 뽑아내는 기계 말이다.
“면 요리도 괜찮지.”
쫄깃쫄깃한 면을 후루룩 후루룩 먹으면 얼마나 맛있나.
라면, 냉면, 쫄면, 비빔국수 등
문제는 면의 종류가 각각 다르다는 것.
‘일단 제면기부터 한번 보자.’
호준은 제면기를 살펴보고자 가까이 다가갔다.
오른쪽에 붙은 전원 버튼을 누르자 제면기가 지잉― 소리를 내며 켜졌다.
【제면기가 작동을 시작합니다】
【반죽을 넣고 원하는 면을 고르십시오】
【면 종류】: 라면용, 국수용, 파스타용, 냉면용…….
【굵기 설정】: 1단계, 2단계, 3단계
‘이거 완전 물건이네.’
버튼을 이것저것 눌러보니 대충 알 것 같았다.
제면기로는 면의 굵기, 종류, 면의 재료도 다양하게 설정 가능했다.
심지어 면의 재료를 혼합해서 밀 50%, 쌀 50% 같이 만들수도 있단다.
‘음. 그러면 뭘 만들까.’
지금 만들 수 있는 요리가 무엇인지 살피고자 레시피북을 펼쳤다.
책을 쭉 살펴본 그는 곧 책을 덮었다.
호준이 결정한 3호점 오픈 기념 요리는.
“이거다.”
붉은 왕새우, 태양 오징어, 오동통 문어를 듬뿍 넣은.
시원하고 칼칼한 국물맛을 지닌 해물라면이었다.
* * *
요리를 한다는 것은.
접시 위에 자신의 마음을 담는다는 것이다.
탁 탁 탁 탁― 스르륵
요리 재료를 다듬고, 삶고, 지지고, 지지고, 볶고.
정성들여 만든 요리가 접시에 담기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들고 노력이 들던가.
‘라면 하나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
호준은 대파를 냄비 안에 듬뿍 넣었다.
【다량의 야채를 육수 냄비에 투입했습니다】
【야채의 영양분이 추가되어 등급이 향상됩니다】
【야채의 맛이 감미되어 국물 맛이 더욱 훌륭해집니다!】
호준은 뽀글뽀글 피어오르는 라면 육수를 보며 흐뭇하게 웃고는, 뚜껑을 닫았다.
그는 지금 공장 기계에서 만들어낸 라면을 사다 물만 끓이는 것이 아니었다.
면과 육수, 그리고 토핑으로 들어갈 가지각색의 해산물까지.
모조리 직접 공수해 만들었다.
그러니 그냥 라면과는 비교도 안 되는, 정성이 듬뿍 들어간 라면이었다.
많은 양의 고기와 야채에서 맛있는 국물이 우러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그는 면을 만들기 시작했다.
“제면기에서 라면을 누르면 되는 거지요?”
옆에서 구경 중이던 루나의 질문에 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굵기는 1단계, 2단계, 3단계가 있는데. 2단계가 가장 보편적인 굵기야.”
“버튼을 누르면 되나요?”
“그래, 이렇게 준비한 반죽을 여기에 넣고. 버튼을 누르면.”
호준은 굵기 2단계 버튼을 눌렀다.
지이잉― 펑 펑 펑…….
반죽이 기계로 빨려들어가더니 라면사리 열 개가 연달아 튀어나왔다.
마치 뻥튀기 기계에서 뻥튀기를 튀기는 것 같았다.
“이 상태 그대로 익히면 되겠다.”
튀어나온 라면사리는 딱 라면봉지를 뜯었을 때 나오는 모양 그대로였다.
【라면 사리 (굵기2단계)】 x 10개 획득!
【밀가루의 품질이 좋아 찰지고 쫄깃쫄깃합니다!】
【밀가루의 품질이 좋아 면이 국물을 잘 머금을 수 있습니다!】
“다음은 어떻게 하면 되나요?”
루나는 라면사리 하나를 손에 든 채로 물었다.
호준은 씩 웃으며 냄비 하나를 들었다.
“육수에 면을 넣고 면이 익을 때까지 끓이는 거야. 해산물을 듬뿍 올리는 것도 잊지 말고. 일단 내가 하는 걸 보고 따라 하도록.”
“네!”
루나는 수첩에 뭔가를 적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호준은 냄비에 적당량의 육수를 붓고, 면을 끓였다.
【라면이 완성되기까지 10분 남았습니다!】
면이 익는 동안 그는 토핑 준비에 들어갔다.
육수 냄비에서 태양 오징어를 꺼내 먹기좋은 크기로 자르고.
오동통 문어도 마찬가지로 잘라 다른 접시에 모아두었다.
오징어도, 문어도 본래 크기가 어린아이만 했던 터라, 조각만으로 커다란 대접 5개가 가득 찼다.
【라면이 완성되기까지 1분 남았습니다!】
1분을 앞두고 라면 위에 토핑을 시작했다.
탁―
계란을 살짝 얹어 서서히 익히고.
그 주위로 오징어와 문어 조각을 듬뿍 얹고.
화룡점정으로 붉은 왕새우 10마리로 둥그렇게 계란을 감쌌다.
위에서 보니 마치 노른자를 둘러싼 붉은 왕새우의 모습은 마치 꽃이 핀 것처럼 보였다.
“와… 정말 먹기 아까울 정도예요.”
“자, 마지막으로 반찬 그릇에 김치까지 올리면 완성이다!”
토핑을 다 올리자, 이제 30초 뒤면 완성된다는 메시지가 나왔다.
‘몇 등급이려나.’
늘 그렇지만 요리가 무슨 등급이 나올지는 예측이 불가능했다.
특히 새로운 요리는 더더욱 예측이 어려웠고.
‘특급이기만 해도 괜찮겠다.’
호준은 마음을 비우고 등급을 확인했다.
【요리 완성!】
【완벽한 해물 라면(특3급)이 완성되었습니다!】
‘특3급…?’
호준은 눈을 감았다 뜨며 숫자를 확인했다.
역시 특3급이란 숫자는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특3급은, 지금까지 만든 요리 중에서도 높은 쪽인데.
대체 왜?
지난번 장미꽃 꿀사과 파이가 특4급이었으니 그보다도 한 등급 높은 것이었다.
등급이 높은 이유를 살펴보니.
‘역시 재료 때문이구나.’
답은 재료에 있었다.
【밀, 고춧가루, 감칠맛 열매, 대파, 각종 해산물, 소고기, 돼지고기, 후추, 소금, 기타 야채 등의 재료 품질이 훌륭합니다】
【훌륭한 재료 덕분에 요리 등급이 대폭 상승했습니다!】
【붉은 왕새우와 오동통 문어의 조합이 훌륭합니다!】
【오동통 문어와 태양오징어의 조합이 완벽합니다!】
【재료 간 조합이 훌륭해 등급이 아주 많이 상승했습니다!】
새롭게 뜬 메시지에는, 재료 사이의 조합이 훌륭하다는 메시지도 있었다.
해산물끼리 시너지 효과가 있어서 등급이 많이 올라간 듯했다.
앞으로 해산물을 듬뿍 넣으면 된다는 팁이기도 했다.
호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라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 냄새 진짜… 너무 맛있을 거 같아요!”
루나의 말에 이어 루이, 루키도 라면을 보며 침을 꼴깍거렸다.
“라면… 라면…!”
“아아… 침이 절로 넘어가요.”
‘냄새가 좋긴 좋네.’
호준도 갑자기 배고파지긴 마찬가지였다.
호준은 라면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셋에게 젓가락을 내밀었다.
“오늘 아주 배 터지게 먹어보자.”
“와아아!”
장사를 앞두고 호준은 아이들과 라면을 마음껏 즐겼다.
시원하고 칼칼한 국물에 밥도 늑신 비벼 먹었다.
국물맛은 밥을 비벼 먹으니 더욱 일품이었다.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을 만큼 맛있었으니까.
아이들은 부른 배를 두드리며 라면국물이 묻은 입술로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눴다.
입 닦으라고 수건을 건네주며 그는 생각했다.
‘3호점은 라면 전문집도 괜찮겠다.’
3호점이 라면 전문점으로 첫발을 떼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