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불타는 산
성공한 무언가에는 다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
사실 이것은 당연한 얘기였다.
특별한 무언가가 있으니 성공했겠지.
다분히 말장난스러운 얘기다.
어쨌든.
많은 분야의 것들이 특별한 강점으로 인해 성공한 것처럼.
유토피아도 나름대로의 특별한 강점이 있었다.
그 강점이란 바로 유토피아의 AI시스템이었다.
유토피아는 많은 특별한 점이 있지만 그중에서 AI시스템은 세심하고 배려 넘치며 사실적이고 훌륭하다는 평을 받았다.
실제로도 AI시스템은 훌륭했다.
유토피아에 존재하는 수많은 캐릭터들.
그들은 모두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어디에서 태어났고, 어떤 유년 시절을 보냈고, 친구는 누구인지.
말투, 행동, 성격, 습관 등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마치 진짜 사람인 것처럼.
사고 역시 사람처럼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나간다.
쌍둥이가 출발점이 같다고 해도, 예상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성장해 나가고.
매 순간, AI는 새로운 존재로 성장해 나간다.
그렇게 살아가는 인공지능 캐릭터 숫자만 무려 100만여 명.
그러니 유토피아의 콘텐츠가 다양할 수밖에 없다.
이 100만 명이 넘는 캐릭터들이 계속 세상을 바꿔나가니까.
그들이 인간과 다른 것은 유토피아를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뿐.
이렇게 현실 같은 AI 캐릭터들 덕분에, 유토피아는 수많은 사건 사고도 일어났다.
독재자가 탄생하기도 하고, 종교지도자가 탄생했다가 박해당하고 살해당하는 에피소드도 있을 정도.
AI 캐릭터가 지나치게 독주하면 게임사가 중간에 제지를 한다지만.
그래도 게임사는 캐릭터가 어지간하게 사고 치지 않는 한 자유롭게 놔두었다.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캐릭터들은 그 위상이 대단했다.
‘게임 캐릭터들이 많은 정보와 이점을 가지고 있지.’
게임 캐릭터들은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고, 그 점 때문에 많은 플레이어들이 캐릭터들과 친해지기를 원했다.
캐릭터와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많이 챙겨주니까.
즉, 호감도가 높을수록 플레이어에게 떨어지는 떡고물이 많다.
호준도 마찬가지였다.
뭐, 이런저런 일을 해결하다 보니 어느새 촌장과는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호감도를 높인 결과 지금과 같은 복이 굴러들어왔다.
“이걸 한번 보게나!”
촌장이 부담스럽게 반짝이는 눈을 하고 내미는 종이.
“아는 친구하고 술을 먹으면서 자네 이야기를 했더니, 이 의뢰서 얘기를 하더군. 내가 내용을 들어보니까 자네가 하기에 딱 좋은 것 같아서 지체없이 달려왔네. 어떤가.”
촌장의 말을 들으면서도 호준은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래. 잠시 말을 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와….’
호준은 종이에 적힌 내용을 보며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의뢰명】: 비틀로 마을 촌장이 빼앗긴 황금독수리상을 가져오시오!
【비틀로 마을 촌장, 비틀로가 10대에 걸쳐 내려오는 황금독수리상을 도둑맞은 이후로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황금독수리 상을 훔쳐 간 몬스터가 불타는 산에 살고있는 100개의 눈을 가진 사이클론이라는 말이 들려오자 비틀로는 더욱 깊은 슬픔에 잠겨있는데. 그는 부디 강한 힘을 지닌 누군가가 보물을 다시 갖다 주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습니다.】
【의뢰 조건】: 3시간 안에 불타는 산에서 황금독수리상을 가지고 나오기!
― 본 의뢰는, 비틀로 마을 촌장의 집에서 출발합니다.
― 파티 참여 가능
― 현재 참가자 55명 대기중
호준이 기뻐하는 원인은 바로 맨 아랫부분, 보상 때문이었다.
【보상】
** 10만 골드
** 비트로 마을 내 매장 1개 설치 가능
** 경험치 100,000 EXP
*** 본 의뢰는 12분 뒤 마감됩니다.
시간이 마감된 이후에는 참가가 불가능하니, 참가를 원할 경우 조속히 비틀로 촌장에게 참가 의사를 밝히십시오.
황금독수리상을 가져오라는 다분히 퀘스트다운 내용.
그 아래로 이어지는 보상이 꽤나 마음에 든다.
‘3호점을 열 수 있겠어.’
이 종이는, 비틀로 마을에 3호점을 열 기회였다.
“어때. 해 볼 생각이 있나?”
3호점을 열 수 있는 티켓을 놓칠 수 없지.
“물론입니다.”
호준이 흔쾌히 대답하며 의뢰서를 거머쥐자 촌장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조언했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떠나는 게 좋겠군.”
“그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허허. 나야 그저 자네 생각이 났을 뿐이네. 나는 좋은 소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겠네.”
호준은 촌장에게 따로 남겨둔 파이 10개를 전부 주고서 길을 떠났다.
3호점을 열기 위한 길을.
* * *
비틀로 마을 촌장의 집.
평소라면 텅 비어 있어야 할 공터에 사람들이 북적였다.
55명의 의뢰 참가자들이 의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대기중이었다.
총 세 개의 파티가 의뢰를 위해 이곳에 모였는데 급하게 모인 터라 서로 일면식도 없었다.
파티별로 동그랗게 모여앉은 사람들은 정보를 나누느라 바빴다.
자기소개도 하고,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누고.
세바스찬의 파티도 그러했다.
세바스찬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전 세바스찬으로 이 파티 리더를 맡았습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분들이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 각설하고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빨리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을 갖죠. 저는 직업은 흡혈귀로 죽은 몬스터의 체력과 마력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세바스찬이 꾸벅 인사하자 둘러앉은 참가자들이 박수를 쳤다.
짝짝짝짝―
“자, 차례로 자기소개 해주시겠어요?”
세바스찬의 진행에 따라, 파티원들이 자기소개를 했다.
“전 오카루 마을에서 활동 중인 힐러입니다. 후방지원을 맡겠습니다.”
“저는 탱커 역할을 할 생각이구요. 직업은 불굴의 전사입니다. 피통 하나는 끝내주니 몸빵하고 딜을 맡겠습니다. 저 그런데 얼음 마법사도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불굴의 전사의 질문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얼음 마법사는 ‘불’이라는 맵에 꼭 필요한 마법사였다.
“오오. 얼음 마법사면 프리징 마법이랑 눈바라기 마법도 할 수 있지 않나요?”
“맞아요. 저도 들었어요. 얼음 마법사라면 그게 기본 스킬이라고. 그쵸? 세바스찬 님?”
사람들이 얼음 마법사라는 말에 흥분한 채로 질문을 던졌다.
세바스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여유롭게 웃었다.
“맞습니다. ‘불타는’이라는 수식어가 들어가는 맵은 얼음 마법사가 특히나 활약한다는 건 누구나 아는 얘기죠. 그래서 어렵게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세바스찬이 입을 떼자 누군가 조용히 일어섰다.
지금까지 말없이 구석에서 로브를 푹 뒤집어쓰고 있던 이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로브를 뒤집어쓴 자에게 고정됐다.
작고 새하얀 손이 머리를 덮은 로브를 뒤로 젖히자 눈부신 백발이 흘러내렸다.
찰랑이는 발목까지 흘러내리는 백발머리.
선명한 초록색 눈.
그녀를 알아본 몇몇 사람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헉…! 얼음마녀님이시군요!”
“오오! 프로즌 길드 수장이 여기까지 오실 줄이야.”
“실물이 훨씬 예쁘시네요!”
“안녕하세요. 저도 얼음 마법사 막 시작했는데 얼음마녀님을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언젠가 마녀님만큼 강해지고 싶어요!”
얼음마녀, 그녀는 얼음 마법사 분야에서 제법 이름을 알린 인물이었다.
프로즌 길드는 얼음 마법사만을 받아들이는 길드로 최근 유명해진 길드였다.
얼음 마법사가 필요한 던전에 들어가려면 사람들은 줄곧, ‘프로즌 길드에 연락하자.’라는 말이 돌 정도로 프로즌 길드는 얼음 마법사 전문 길드로 명성이 있었다.
그 명성의 기반에는 바로 초창기부터 함께 한, 길드 마스터 얼음마녀가 있었고.
지금 그 얼음마녀가 이곳에 자리한 것.
“여기 세바스찬 님하고 제가 따로 친분이 있어서 이 자리에 오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길드 마스터가 이곳에 온 이유는 바로 보상 때문이었다.
‘비틀로 마을은 꽤 괜찮은 거점이 될 거야.’
비틀로 마을에 조각 판매점을 열고.
그곳에서 얼음 조각을 판매할 생각이었다.
비틀로 마을은 유동인구가 매일 3만명 이상이나 되니.
매출 면에서도 훌륭할테고.
길드 홍보 차원에서도 좋겠지.
“안녕하세요! 얼음마녀입니다. 잘 부탁해요!”
얼음마녀가 예의바르게 인사하자 사람들은 안심하는 분위기였다.
당연했다.
불타는 맵에서 가장 안전보장을 위해 필요한 얼음 마법사가 함께하는데다.
그냥 얼음 마법사도 아니고 길드 마스터급이라니, 마음이 든든할 수밖에.
“오오! 얼음마녀님만 믿겠습니다!”
“마녀님 잘 부탁해요. 혹시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프리징 마법 한번 쏴주세요.”
“오오. 얼음 마법사가 있으니 뭔가 든든하네.”
“잘 부탁합니다.”
“물론이죠! 포션도 넉넉하니까 제대로 지원하겠습니다!”
얼음마녀는 많은 이들에게 싱글거리는 미소로 답하며, 떠날 채비를 했다.
의뢰 마감 시간까지는 채 5분도 남지 않은 시간.
얼음마녀가 있어서일까.
세바스찬이 속한 파티원들의 자신감은 하늘로 치솟을 듯했다.
“역시 우리 파티가 더 강한 것 같아요. 저기는 얼음 마법사 장비가 영 시원찮아 보이네.”
“그렇지? 내가 보기에도 그렇더라구.”
“당연히 우리쪽이 유리하지. 누가 뭐래도 얼음마녀님이 계신데!”
“고럼고럼.”
웅성거림이 이어지던 그때.
키 작은 노인이 나타나자 웅성거리던 소리가 확 줄어들었다….
노인은 기침을 한번 하고는 입을 열었다.
“크흠. 많은 분들이 와줘서 고맙구려. 지금부터 의뢰장소로 여러분을 이동시킬 마법진을 만들겠소.”
노인이 손가락을 튕기자 그 옆으로 동그란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이 위로 올라서면 이동할….”
휘이잉―
거센 바람이 불어닥치자 노인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머리가 정신없이 휘날릴 만큼 거센 돌풍이었다.
“뭐, 뭐야.”
“뭔 일이래?”
“웬 바람??”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바람에 두리번거리며 당황했다.
쿠웅―
묵직한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이 소란을 일으킨 당사자가 등장했다.
“꺄아! 뱀이다!”
“거대지렁이다!”
“괴물이야!”
“뭐야. 몬스터야?”
경악한 사람들이 빌딩 크기의 이무를 공격하려 하자 호준이 미르를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그의 주머니에서는 츄츄가 골골골 잠을 자고.
어깨에서는 다크니스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호준이 등장하자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멈칫했다.
“헉… 호준?”
“실물은 처음 보는데. 저게 이무구나!”
“헉…! 그럼 호준 님 맞죠? 저 지난번에 김치전 먹으러 갔습니다.”
사람들이 말을 걸자 호준은 손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꾸벅했다.
“안녕하세요, 저도 참가할 생각으로 왔습니다. 죄송하지만 잠시만요!”
사람들의 인사도 인사지만.
촌장에게 의뢰를 신청하는 것이 먼저였다.
“자네는 누군가? 설마 혼자 참가할 생각인가?”
촌장이 그런 질문을 할 수밖에.
호준 무리는 파티를 맺은 무리보다 현저히 숫자가 적었다.
설마 이대로 도전할 거냐는 질문에 호준은 싱긋 웃었다.
“네. 저도 참가하겠습니다.”
“아, 알겠네. 일단 시간이 없으니 그리 하지.”
【의뢰가 수락되었습니다】
【의뢰 참가자는 의뢰가 진행되는 불타는 산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의뢰가 진행되는 지역, 불타는 산에서는 나는 행위가 금지됩니다】
【부디 행운이 따르기를!】
“와. 호준 님 역시 패기 쩌네.”
“레드 게이트도 혼자 들어가는데. 이번에 싸우는 걸 직접 보게 되려나?”
“아쉽다. 우리 파티에 들어오면 요리 얻어먹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게. 그보다 우리 호준 님이랑 경쟁하는 거 아냐? 장난 아니겠는데? 얼음마녀님이 이기려나 아니면 호준 님이 이기려나?”
“글세…… 내 생각에는 호준… 아, 아니지. 얼음마녀님이지!”
“얼음마녀님보다는 호준… 아 음….”
호준을 보며 수다를 떨던 파티원들이, 이야기를 나누다 얼음마녀와 눈이 마주치자 슬쩍 눈치를 봤다.
그녀는 조금 어두운 표정을 하고 모른 체했다.
‘어느 정도 실력인지는 몰라도 지지 않겠어.’
얼음마녀는 얼음 마법사의 자존심을 걸고.
그리고 자금줄 확보를 위해 이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자, 다들 들어갑시다.”
“순서대로 마법진 위에 서면 됩니다!”
“자, 줄 서자고!”
참가자들이 순차적으로 마법진 위에 서고 불타는 산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마법진 위에 서서 이동하는 순간, 얼음마녀는 알지 못했다.
불타는 산이 얼마나 지독한지.
그리고 호준이 그녀의 예상보다 얼마나 강한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