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습격
자고로 전투에 승리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철저한 대비다.
적이 어떤 특징을 지녔고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그리고 숫자는 어느 정도이며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떤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등.
적의 동태를 많이 알수록 유리한 고점에 설 수 있다.
그 점을 잘 알고 있기에.
“흠….”
호준은 딸기왕자, 수장 두더지와 두더지족 병사들, 호구, 웜족 부부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동그랗게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눈 결과.
“문제는 60만 대군이 복숭아왕을 호위하고 있다 이거군.”
“맞습니다. 제가 알기로 60만이고 복숭아족은 번식이 빨라서 밤사이 5만 정도 늘어났을 가능성이 큽니다.”
딸기왕자의 대답을 들으며 호준은 잠시 입술을 짓씹었다.
60만이든 65만이든.
어쨌든 숫자가 장난 아니다.
개미 같은 크기도 아니고 복숭아족은 각자 무기를 쓸 수 있는 인격체이다.
그러니 65만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그러면 총 65만. 그 병력이 딸기성에 있다는 건가?”
호준의 물음에 수장 두더지가 앞으로 나섰다.
“그건 제가 답할 수 있습니다.”
호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두더지가 입을 열었다.
“우리 두더지족은 땅의 흔들림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저는 아주 오랜 세월 살아왔기 때문에 더 예민한 편이지요. 제가 느낀 바로는… 딸기성 인근에 살던 복숭아족이 일제히 성으로 향하고 있는 듯합니다. 새벽부터 지금까지 느껴진 진동으로 보아 제 예감이 맞을 겁니다.”
“왜 이동하는 거지?”
“아마 딸기성에서 즉위식을 거행하려는 걸 겁니다.”
딸기왕자가 사정을 알고 있다는 듯 손을 들었다.
“즉위식이라고?”
“네.”
호준이 눈짓하자 딸기왕자는 막대기로 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말을 이었다.
“복숭아 왕은 아직 완전한 왕이 아닙니다. 완전한 왕의 힘을 얻는 순간, 모두에게 그 힘을 드러내려는 속셈일 겁니다. 그들은 화려한 외관을 지닌 만큼 허례허식을 즐기는 종족이니까요.”
“완전한 왕이 아니라는 게 무슨 소리지?”
호준의 물음에 딸기왕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복숭아족이 완전한 왕으로 인정받으면, 성에 배치된 3,333개의 무기를 지배할 힘이 있습니다.”
* * *
상식적으로 무생물은 무생물일 뿐.
살아 움직이지 않는다.
연필이 살아 움직이거나 모니터가 뛰어다니지 않지 않는가.
호준이 살던 세계는 그런 세계였다.
그러나 이곳은 그 상식을 뛰어넘었다.
딸기왕자의 설명이 그를 뒷받침해주었다.
“딸기성은 살아 움직이는 성입니다. 내부에 배치된 3,333개의 무기를 자력으로 움직이죠.”
“그런 딸기성을 지배하는 것이 왕좌의 주인이다. 이거고.”
“맞습니다.”
설명을 들은 호준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딸기성의 크기가 얼마나 크던가.
끝을 모르고 치솟은 성에 배치된 수많은 무기들.
그 무기들이 오직 왕의 명령 한 마디로 움직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복숭아왕이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면 더 고전할 가능성도 높을 테고.
다행히 딸기왕자의 다음 발언이 그 걱정을 조금 덜어주었다.
“다행히도, 아직 복숭아왕은 완전한 힘이 없습니다.”
대체 복숭아왕은 왜 아직 딸기성을 다스리지 못하는 걸까.
왕좌를 차지했는데.
“왜 그런 거지?”
딸기왕자가 왕좌 모양의 그림을 나뭇가지로 툭툭 가리키며 답했다.
“본래 딸기성의 왕좌는 딸기족과 호환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딸기족이 앉게 되면 바로 왕의 힘을 쓸 수 있지만. 다른 종족이 앉으면 12시간이라는 적용 시간이 걸립니다.”
“그렇다면 아직 12시간이 안 지나서 힘을 못 쓴다는 말인가.”
“핵심을 짚으셨습니다. 반면 본래 왕좌의 주인인 딸기족은 앉는 즉시 바로 힘을 쓸 수 있죠.”
“그래서 복숭아족이 딸기족의 씨를 말리려고 혈안이 된 거로군.”
이제야 이해가 갔다.
딸기족을 위한 왕좌.
그 왕좌에 앉으면 딸기성의 무기를 다스려 영구집권이 가능할지도 몰랐다.
다만 변수가 생긴 것은, 다른 종족도 그 왕좌에 앉아서 12시간 버티면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
그 점을 복숭아족이 노리고 들어간 것이다.
12시간만 버티면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그 생각이겠지.
딸기족 왕자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수많은 백성이 죽었습니다. 먼저 간 백성들을 생각해서라도 제가 반드시 왕의 자리에 올라야만 합니다.”
호준은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딸기왕자를 응시했다.
딸기왕자는 입술을 꾹 다문 채로 고개를 들고 시선을 마주했다.
“그들이 원하는 건 그 12시간을 버텨내는 겁니다. 그들이 힘을 얻기 전에, 저희가 먼저 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래.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지?”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지금부터 약 45분 정도 남았습니다. 그들이 왕좌를 차지한다면 더욱 힘들어질 겁니다. 딸기성에 배치된 수많은 무기는 왕의 눈과 귀가 되어줄 테니까요. 45분 안으로 해치워야 합니다.”
“정리하면 45분 안에 60만 대군과 복숭아왕을 죽이고. 왕좌에 너를 앉히면 게임 끝이군.”
“정확하십니다!”
“자. 다들 상황 파악했지?”
상황파악은 끝났다.
호준은 딸기왕자의 어깨를 끌어 주위에서 조용히 경청 중인 이들을 보았다.
지하 굴착기 웜족 부부.
든든히 뒤를 책임져줄 미르와 다크니스, 츄츄까지.
또랑또랑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호구와 떨리는 눈을 한 딸기왕자까지.
모두와 눈을 마주친 호준이 입을 열었다.
“전원 출발한다. 지렁이에 올라타도록.”
“호준 님, 정확히 어디로 방향을 잡을까요?”
호구의 물음에 호준은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답했다.
“당연히. 왕좌가 있는 곳이지.”
* * *
“와. 무슨 소설 속에 들어간 것 같다.”
“그러게. 퀘스트가 디테일하게 잘 짜여있어.”
“나도 저기 한번 가보고 싶다.”
“레드게이트라 갔다가는 바로 죽을텐데?”
“하긴. 언제 호준 님이랑 꼽사리껴서 갈 수 있으려나?”
“글쎄다~ 하하.”
강남 한복판.
여고생 둘이 각자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둘은 요정의 쉼터의 초창기 구독자로 호준의 광팬이었다.
매일 호준이 유명해지는 것을 바라보며 대리만족을 느끼고 친구들과 이야기도 하고.
덩달아 입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있달까.
일종의 덕질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까 들어보니까 60만 대군 어쩌고 하던데. 1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그 대군을 물리치는 게 가능한가?”
“논리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데. 뭔가 생각이 있으니까 가겠지.”
“하긴… 호준 님은 하고도 남지.”
둘은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편의점에 들어갔다.
점심으로 먹을 도시락을 사 들고 테이블에 앉은 둘.
“아 맛있겠다.”
“배고파 배고파!”
한창 먹을 나이인 10대 여고생답게 전자레인지에 도시락을 넣고, 빨리 데워지기만을 기다렸다.
그 둘과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는 한 여자 직원이 앉아있었다.
그녀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뜨거운 물을 넣은 컵라면은 이미 안중에도 없는 얼굴.
유토피아 본사 상황관리팀 10팀.
신입 김선정이었다.
식사 타임이 되어 혼자 편의점에 온 그녀는, 호준의 방송에 푹 빠져 있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화면 속 호준은 입술을 꾹 다문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호준과 그 일행은 자이언트웜을 타고 딸기성 내부에 진입한 상태였다.
다행히 호준 일행이 접근한 딸기성 상층부에는 복숭아족이 보초를 서고 있지 않았다.
‘다들 대관식 준비하느라고 1층으로 내려간 모양이군.’
대관식을 코앞에 두고 모조리 1층, 대관식이 이뤄지는 공간으로 내려간 것.
― 땅의 움직임이 아래로 향한다찍! 아래, 1층으로 가면 적들을 만날 것이다찍!
수장 두더지가 코를 찡긋거리며 보고하자 호준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곧 그는 대관식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공간으로 갔다.
마침내 대관식의 천장 중앙 부분에 도착하자….
“맙소사…!”
김선정은 경악했다.
“허업!”
“힉 저게 뭐야! 징그러워!”
“환 공포증 생길 듯… 으으.”
여고생들도 마찬가지 반응.
한 여고생은 몸서리를 치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김선정은 그보다 조금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불안한데.”
상황이 안 좋다는 것을 그녀 역시 감지했다.
복숭아족 65만.
65만이라는 숫자를 듣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개미도 60만이 모이면 그 숫자가 어마어마해지는데.
복숭아족이 60만이 바글바글대니.
‘징그럽군.’
너무 많은 복숭아족이 왕좌 주위를 성처럼 지키고 있었다.
질서라고는 전혀 없이 틈새를 꽉 채운 녀석들.
그런 녀석들을 비집고 들어가기란 어불성설이었다.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적이 너무 많아. 한 30분 남았나?’
레드게이트 퀘스트답게 시간제한이 너무 빡셌다.
아무리 호준이라도… 이건 힘들지도.
호준을 남모르게 응원하던 그녀 역시, 이런 생각이 들 지경인데 팬들이야 오죽할까.
“이러다 진짜 실패하면 어떡해! 이거 실패하면 페널티 장난 아니라는데.”
“그러니까. 진짜… 너무하다. 저기서 왕을 어떻게 찾아. 저 숫자 진짜 미친 듯.”
“너무 어려워. 레드게이트라고 해도 그렇지. 참.”
그럼 그럼.
너무 어렵고 말고.
이번에는 너무 심한 듯.
김선정 역시 여고생들의 반응에 슬쩍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아차. 라면.”
김선정은 깜박 잊었던 라면을 그제야 뚜껑을 열었다.
이미 라면은 너무 늦어 퉁퉁 불은 오동통 면이 되어 있었으나 그녀는 불만 없이 후루룩후루룩 먹었다.
면 한 젓가락 땡기고 국물도 꿀꺽꿀꺽 마시고서.
김선정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호준이 너무 높은 난이도로 인해 실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화면을 보는데.
“어…?”
화면 속 호준은 웃으면서 말하고 있었다.
┕ 지금부터 이곳은 불지옥이 될 거다. 우리를 제외한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는.
“……!”
살벌한 내용을 아주 태연한 얼굴로 말하는 호준을 보며, 김선정은 침을 꼴깍 삼켰다.
정말 가능한 걸까.
불지옥…?
반짝이는 호준의 눈빛은 결코 농담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곧이어 호준의 계획대로 일행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하자.
“오오! 불지옥이래. 개멋있다.”
“역시 뭔가 있다니까. 이래야 갓호준 님이지!”
“완전 개꿀잼!”
한껏 들뜬 여고생들의 반응이 이어지고.
옆에 김선정 역시 라면 국물을 들이마시며 눈을 빛냈다.
‘역시 재미있는 사람이라니까.’
어디로 튈지 모르는 호준의 다음 모습이 기대되는 그녀였다.
* * *
“우아아! 우리 복숭아족이 이제 딸기성의 주인이 되는 날이 몇 분 안 남았군.”
“후후! 그동안 딸기성을 가졌다고 자랑하던 딸기족 놈들 꼴을 안 보니 속이 시원하구만.”
“내 말이. 빨간 것만 봐도 이제 경기가 일 지경일세. 후후. 우리 복숭아족이 이제 다른 종족보다 우월하다는 걸 증명하는 게 될 테니. 이번 즉위식도 멋지게 치르자고!”
“맞는 말일세. 어서 큰 함성을 보태러 즉위식장으로 가자고!”
즉위식 시간이 다가올수록, 복숭아족은 즉위식이 열리는 딸기성 1층으로 향했다.
덕분에 딸기성 1층의 거대한 홀은 복숭아족으로 가득 찼다.
휘잉― 휘잉―
복숭아족이 마음 놓고 즐기는 사이 딸기성 1층으로 향하는 5개의 통로는 텅텅 비었다.
딸기족을 모조리 해치운 마당에, 그리고 왕이 등극해 모든 딸기족들의 힘의 근원을 뺏을 수 있으니 누가 보초나 서고 있으랴.
보초들도 모조리 떠나버린 복도 바닥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부스스슥―
바닥에서 올라온 것은 작은 두더지였다.
두더지 두 마리.
― 이쪽이다찍!
― 알았다찍!
한 마리는 기름 항아리를 뒤집어 통로 바닥과 벽, 천장에 듬뿍 기름을 뿌리고.
한 마리는 적들의 위치를 가늠해 어디까지 괜찮을지 측량에 들어갔다.
10m에 이르는 긴 거리를 기름으로 가득 채운 그들은 다시 바닥 구멍으로 도망갔다.
― 불이다찍!
― 불타라찍!
도망가기 전 미리 준비해둔 횃불로 불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고.
화르르륵― 푸시시식!
통로 1이 불바다가 되고.
딸기성벽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활활 불타오르는 통로 1은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공간이 되었건만.
불이 났음을 알아챈 복숭아족은 없었다.
“우와아아아!”
“왕이시다!”
“우리의 왕! 복숭아왕 만세!”
한창 즉위식이 거행되는 중, 다들 흥분에 겨웠던 것.
복숭아족의 우렁찬 함성소리에 불타는 소리 따위는 묻혀버렸고.
마지막 다섯 번째 통로가 불구덩이가 되는 순간.
임무를 마친 두더지가 입에 발가락을 갖다 대고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삐루루루―
두더지끼리만 전달되는 신호음을 들은 수장 두더지가 호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됐습니다.”
천장에서 대기 중이던 호준은 씩 웃고는 옆을 둘러보았다.
대관식이 열리는 천장 위.
올리브유 1,000 항아리가 골고루 배치되어 있었다.
천장의 양 끝에는, 웜족 부부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시작해!”
호준의 신호가 떨어지자.
취지지직― 취지지직!
웜족 부부가 산성 침을 내뱉어 올리브유 항아리를 지탱하던 천장의 양단을 끊어냈다.
푸와아악―
힘을 잃은 천장이 무너지고.
천 개의 올리브유 항아리들이 복숭아족들에게 그대로 떨어졌다.
“으악! 뭐 뭐야.”
“이게 뭐야?”
“고 고소한 냄새가 난다!”
“왜 갑자기 천장이 무너지는 거야?”
난데없이 기름을 뒤집어쓴 복숭아족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위를 바라보았고.
그중 호준과 눈이 딱 마주친 녀석이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누군가 있다 습격자다!”
그 외침에 호준은 씩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했다.
“미르 시작해라.”
호준의 신호에 미르가 긴 시간 준비한 대형 브레스를 발사했다.
푸와아아악―
곧이어.
복숭아가 익어가는 달콤한 냄새가 딸기성을 메우기 시작했다.